인생명반 에세이

보수동쿨러(Bosudong Cooler) - yeah, I don't want it

손계명 2025. 5. 26. 18:27

인생명반 에세이 99: 보수동쿨러(Bosudong Cooler) - yeah, I don't want it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전에 이미 여름처럼 선명해진 마음

 

날씨가 점점 더워진다.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여름이 되면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우리나라 바다라고 한다면, 대게 부산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나도 부산 바다를 참 사랑한다. 부산을 떠올리면,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좋은 기억만 잔뜩 떠오른다. 여름이라면 바다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내게 여름은 사랑의 계절이다. 그냥 사랑도 아니고 뜨거운 에로스가 떠오른다. 열기에 가슴은 땀으로 젖어간다.

 

내 가슴이 바다 냄새를 풍길 때 즈음이면, 사랑은 여름처럼 선명해진다. 내가 사랑이라면 여름을 떠올리는 게, 여름의 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인생을 바꿀 만큼, 내가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이 여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장미가 피어날 무렵이면, 나는 한 여인을 떠올린다. 내 마음은 여름의 열기와 함께 장미처럼 빨갛게 익어간다. 날씨가 점점 더워질 때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 보수동쿨러.

 

2019년, 보수동쿨러 첫 EP “yeah, I don't want it”이 세상에 나왔다. 생각해 보니, 장미 피어나는 계절에 태어난 그 여인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도 2019년이었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여름처럼 선명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그리는 사랑은 기쁨보단 아픔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아프다. 그러나 이걸 듣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사랑은 아픔을 달콤한 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앨범을 들으면서 달콤한 아픔에 젖어간다.

 

 

▲ 2번 트랙 “0308” 뮤직비디오

사랑은 도둑처럼 찾아온다. 예상하지 못한 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렇게 사랑을 만났다. 도둑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 가슴에 찾아온 도둑은 자기 발자국처럼 내 가슴에 사랑을 남기고 갔다. 나는 내 가슴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간다.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내 가슴에 새겨진 너의 발자국을 따라가니, 오히려 네가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너의 발자국은 길어지기만 하고, 너는 보이지 않는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엉킨다.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그 중독으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실험을 해보자.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익숙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인정하자.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

 

나는 너에게 중독된 걸까. 내가 전에 경험한 사랑과 너를 사랑하는 건 뭐가 다른 걸까. 전에 내 가슴에 있던 사랑도 언젠가 끝났던 것처럼,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도 언젠가 끝날까. 영원한 건 없으니까, 이 마음도 언젠가 끝나겠지. 아닌가?

 

“우리는 서로를 비춰봐.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앞서 길고 바쁘게 독백을 읊조리다가, 가락에 더욱 상쾌한 바람이 불고, 독백은 노래가 되어 흥겨움을 더한다.

 

너를 향한 내 사랑은 전에 경험한 사랑과 똑같지 않다.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사랑이랴. 사람이 다르면 사랑도 다르겠지. 너를 사랑하며, 나는 실험한다. 영원한 사랑을 만드는 실험을 한다. 너와 내가 손잡고 걸어가는 이 길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길은 끝없이 경계가 부풀어질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을 깨뜨리고, 끝이 없는 길로 나아가자. 너를 향한 중독이 끝날 때, 그때부터 진짜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너와 함께 걷는 이 길은 영원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 길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랑이 언제나 쉽고 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서로가 뿜어내는 열기에 지쳤다. 우리의 사랑은 사막처럼 황폐해진다. 그러나 사막이라도 너와 함께 걷는 사막은 아름답다. 텅 빈 황량한 사막에 너와 나, 단 둘이 있으니, 세상에 온통 우리 둘만 있는 것 같다. 사막은 너와 나, 단 둘만의 세상이다. 덥고 힘겨운 시간들이 사실은 우리의 사랑을 더욱 무르익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우리, 사막 같은 사랑 안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안녕, 서로 인사하자. 인사하기도 힘들 만큼 힘겨운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도, 안녕, 서로 인사하자.

 

 

▲ 5번 트랙 “목화” 라이브 영상

사랑에 힘겨워지던 우리는 서로를 아픔과 두려움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픔과 두려움이 되어버렸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너 때문에 아프지 않으면 나는 숨 쉴 수 없다. 네가 내 가슴에 새긴 이 아픔이 나를 살게 한다.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너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기에, 아파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벗어나고 싶다가도, 너 없이는 못 살겠다고, 또 너를 벗어나고 싶다가, 또 너 없이는 못살겠다고, 내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마치, 내가 지어 입는 옷 같다. 하루에도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는지, 너는 내가 만든 옷 같다. 그렇게 너를 향해 말을 걸다가, 말하는 것마저 지쳐서, 신음으로 너를 부른다. 나는 말을 잃고, 아픔은 강렬해진다. 아픔이 가장 강렬해질 때, 신음은 갑자기 끊긴다. 나는 죽은 것처럼 잠에 빠진다.

 

“넌 날 아프게 해.”

 

잠에서 깨어나 겨우 입을 뗀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다시 또 너 때문에 아프다. 이렇게 아픈 여름은 언제 끝날까. 아, 우리는 끝이 없는 길을 걷자고 약속했지. 그래,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이 아픔은 끝나지 않아. 이 여름은 끝나지 않아. 내 세상은 네가 내게 새긴 아픔들로 이뤄졌어. 여름은 끝나도, 아픔은 끝나지 않아. 아픔이 끝나면, 내 세상도 끝나겠지.

 

이 앨범은 이토록 사랑을 뚜렷하게 그려내면서도, 가사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들으면서, 내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낱말은 너무 뻔하고 흔해서, 내가 겪고 있는 이 복잡한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낱말을 지우고 사랑을 말한다. 너와 내가 눈을 맞추는 동안엔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어색해지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이 내 가슴에 뚜렷하게 살아 움직일 땐, 사랑이라는 낱말이 되려 어색해진다.

 

 

▲ 6번 트랙 “이 여름이 끝나고”

앨범 이름을 다시 본다. 기분 좋다는 듯 “yeah(예)”라고 뱉어 놓고, 뒤에 이어지는 말은 이러하다. “I don't want it(난 이거 싫어)” 이 앨범 이름은 사랑을 대하는 내 태도를 닮았다. 사랑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아픔이다. 그런데 내게 힘겨운 이 아픔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이 아픔은 내게 달콤한 아픔이다. 이 앨범은 여름처럼 선명해지는 사랑의 아픔을 감당할 힘을 준다. 내가 그토록 힘겨운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내 마음을 닮은 이런 노래들이 나를 지탱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사랑은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내 가슴에 노래가 있어, 나는 버틸 수 있다.

 


트랙리스트

1. You were here, but disappeared
2. 0308
3. 도어
4. 목화 (Intro)
5. 목화
6. 이 여름이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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