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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폴립(POLYP) - For Our Misty Lives

 

인생명반 에세이 57: 폴립(POLYP) - For Our Misty Lives

 

지독할 정도로 상냥함을 갈구하는 청춘의 외침

 

 

생에 있어 기쁨의 순간은 짧고, 슬픔의 순간이 대부분이라며 불평하던 때가 많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슬픔 속을 살아갈 때, 기쁜 순간들을 추억하는 것만큼 큰 힘이 되었던 건 없었다. 찰나의 기쁨이 영원 같은 슬픔을 이긴 것이다.

 

생은 어쩌면 기쁨으로 생을 대부분 채우기 위한 과정이 아닌, 영원 같은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찰나의 기쁨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취라는 것이 그토록 힘들고, 연애와 결혼이 그토록 괴로워도, 여전히 그것들을 갈구하며 생을 이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마저도 무력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순간의 기쁨이 내 모든 걸 집어삼킬 때가 있다. 이 순간이 영원할 수는 없을까. 이뤄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어떤 때보다도 이뤄질 수 없는 소원에 간절해지는 순간. 이 기쁨의 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이 기쁨을 다시 되찾으려, 관계를 독촉하는 병적인 갈구가 발현된다. 갈구는 관계를 망치고, 기쁨은 다시 찾지도 못한 채, 삶은 다시 고독으로 빠진다.

 

사랑은 잔인하다.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기쁨을 얻지 않았더라면, 이 기쁨을 잃었을 때 얻는 이토록 큰 슬픔도 몰랐을 텐데. 이게 다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마저도 없으면, 삶 자체가 없을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에 아프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아픈 건 싫은데. 사랑에 아픈 건, 아파도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다. 이 아픔이 나를 살게 하는 것 같아서.

 

아픔에 지쳐갈 무렵, 지친다는 말조차 지겨워질 무렵, 어쩌다 다시 찾아온 사랑의 기쁨은 다시 나를 살인적인 갈구 속에 밀어 넣는다.

 

“날 끌어안고 잠든 너의 모습을 영원히 묶어둘 순 없을까. 아침햇살이 밝아오지 않는대도, 너의 등불이 되어줄 텐데. 도무지 알 수 없는 너의 마음을 영원히 멈춰둘 순 없을까. 한없이 엉킨 우리가 곪아가도, 결코 돌아서지 않을 텐데. 내 맘이 흩어져 날려서, 네게 뿌리를 내리고 네가 시들어가면 아아, 꽃을 피워줄 거야.”

  

  

▲ 1번 트랙 “ 冬蟲夏草 (Parasite)”

사랑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것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연 속에 묶어버리더라도, 그렇게 사랑이 어둠 속에서 곪아가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이렇게 다짐하는 이의 읊조림은 얼마나 처절한가. 모든 것이 선명해서 아픔마저도 선명해지는 시기, 이뤄질 수 없는 갈구로 점철된 생이라서 더욱 찬란한 아픔. 그렇게 잔혹한 청춘의 송가는 시작된다.

 

“손에 쥘 수 없을 것들만 난 바랐던 걸까.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조각난 슬픈 눈.”

 

결국 소년의 잔혹한 바람은, 바람만으로 실천조차 되지 않고 그저 바람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바람은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을. 그것을 깨닫기는 했어도, 여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어서 슬프다. 아직 현실을 덜 깨달은 소년이라서, 현실보다는 꿈으로 살아가는 소년이라서, 그래서 더 치열하게 현실과 다투는 중이라서, 그래서 소년은 슬프다.

 

그는 마치 낭떠러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가진 육신의 유한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슬픔 속을 헤매는 소년이지만 여전히 그는 관계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아픔을 동병상련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외로운 길을 떠나는 소년.

 

“낭떠러지 위에서 서로를 찾네.”

 

슬픔에 잔뜩 절여진 소년은 슬픔에도 지쳐버려, 이제는 다시 밝은 햇살을 향해 뛰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살을 베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감춰두려 애썼던 마음마저 포근하게 안아줄 사람이 생긴 것 같고, 밤이 찾아와도 전혀 외롭지 않다.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다. 이제 더 이상 내 생에 아픔은 없을 거라는 서툰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간다.

 

“우린 서로 뒤돌아선 채로 멀리멀리 달려 나가고선, 두 눈을 감아도 잠들 수가 없었어. 널 세다 지새운 밤을 넘어서.

 

짙어진 마음과 다가서는 걸음은 모두 너에게로. 두터운 옷깃에 여민 어깨 두 쪽을 내어줄 거야. 한참을 걸어도 끝을 알 수 없었던 밤을 넘어서.”

 

 

▲ 3번 트랙 “When Wolves Cry”

서툰 생각은 점점 부풀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내 안에 넘쳐흐른다. 부푼 생각은 다시 지난 시절 경험했던 관계의 파탄을 예감한다. 슬픈 예감은 여름의 장마처럼 내 마음의 바닥을 치열하게 적신다.

 

“발끝은 돌아서지만 머물러 있을 마음은 손바닥 아래 묻어버린 두 눈으로 비가 되어 올 거야.”

 

장마가 끝나고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찬란하게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그 뜨거운 햇살마저도 우리의 사랑 덕분에 따사롭고 감미롭다. 우리는 바다로 향한다. 바다의 향기를 머금은 우리의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소년 시절을 회상하며 즐거움에 젖어가는 것도 잠시,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현실로 갑작스레 돌아왔다. 모든 것에 무뎌져버린 나는 더 이상, 소년 시절처럼 누군가를 그토록 치열하게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랑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문신처럼 남아,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그 아픔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네가 없는 여름은 축축하고 짜증날 뿐이다. 짜증에 절여진 한숨을 깊게 쉬고 나니, 한숨에 모든 걸 뱉어버린 듯, 이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 생각의 빈틈 사이로 여름의 찬란한 햇빛이 내 마음을 적신다.

 

“내가 목 놓아 맴맴 울면, 여름처럼 내게 다가와, 내 머리 위를 맴맴 돌아, 떠나보낼 수 없는 너야.”

 

 

▲ 9번 트랙 “매미”

 

▲ 10번 트랙 “The Melting Candle”

여름이 올 때마다 여름보다 뜨거운 사랑의 순간을 앓아왔던 나였는데, 그 사랑은 이제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런 사랑은 다시 내게 올 수 없는 걸까.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친밀함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뎌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익숙함이 무뎌짐으로 변할 때, 익숙함은 잔혹함이 된다. 익숙함이 주는 잔혹함에 문득 격렬히 저항하고 싶어진다.

 

가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이 되고, 여름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봄과 여름이 오더라도, 그런 청춘의 순간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런 땐, 모든 것이 선명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청춘만큼 선명했던 아픔마저도.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 그래서 모든 것에 무뎌진다는 것. 그것은 잔인한 일이다. 요란하게 잔인하지 않고, 고요하게 잔인하다. 때론 요란한 것보다 고요한 것이 내 목을 더 깊게 조르는 것 같다.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청춘의 아픔이 가진 찬란함을 치열하게 기록해놓은 음악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내 청춘은 끝나겠지만, 이 청춘의 음악은 계속 내 곁에 있을 테니. 이 청춘의 음악에 빠져드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청춘일 테니. 음악이 외치는 아픔이 선명해질수록, 나를 살게 하는 모든 찰나의 기쁨은, 내 기억 속에서 더욱 강한 빛을 내뿜는다. 음악과 함께라면, 나의 계절은 언제나 청춘이다.

 


트랙리스트

1. 冬蟲夏草
2. Snowflakes
3. When Wolves Cry
4. MIMOSA
5. Hide And Seek (feat. 장영은 of igloo)
6. Nightwalk
7. Rainsong
8. Blue As The Sea
9. 매미
10. The Melting Ca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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