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54: 저스디스(JUSTHIS) - 2 MANY HOMES 4 1 KID
윤리를 심장에 타투로 새긴 한 악마의 고백
■ 예술가는 악당이다
“예술가와 범죄자에 대해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어. 예술가는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기 쉽지. 범죄자도 그렇지. 예술은 사회가 허용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지. 범죄는 막무가내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것이 남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바로 범죄고 예술이지. 예술가도 범죄자도 자기 생각에 골몰한다는 것은 공통점이야. 자신에게 사로잡혀서 독특한 생애를 산다는 점도 같은 면이지. 자기 생각에만 도취되어서 행한 어떤 짓이나 활동이 어쩌다 사회와 맞으면 성공하고 대박이 나는 것이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영웅처럼 대접받기도 하지. 이런 경우는 예술가라고 불리지. 그런데 사회통념과 안 맞으면 철장에 갇히거나 사형 당하고 말지. 이런 경우에는 범죄자가 돼버리는 거야.”
화가 김점선 산문집 “점선뎐”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실제로 탁월한 예술가일수록 모범 시민보다는 범죄자에, 영웅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 혐의로 옥에 갇혔고, 헤르만 헤세는 국가 이념에 반역했다는 죄목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젠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 “도둑 일기”를 집필한 장 주네는 실제로 절도범이었고, 파블로 피카소의 엄청난 여성 편력은 말 해봐야 입이 아플 정도다.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 방송 역사상 최초로 “Fuck”이라는 단어를 송출했으며, 공연 도중 관객을 폭행하는 사건도 벌였다. 미국의 수많은 유명 래퍼들이 갱스터 출신에, 마약 판매상이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유명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예술가들을 영웅으로 섬기는 이유는, 이런 예술가들의 과격한 언행에도, 그들이 예술을 통해 이뤄낸 성과가 그들의 과오를 덮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룬 성과란 무엇인가. 그들이 아니고선 결코 알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세상과 인간 내면의 이면을, 그들이 알리고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격려 받고, 위로 받으며,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그토록 골몰하지 않았다면 다른 말로, 누군가에겐 악당처럼 보일 만큼 이기적인 성질을 타고 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위대한 업적들이 과연 가능했겠냐는 거다.
그들이 당대엔 범죄자였어도, 시대가 바뀌며 지금은 더 이상 그들이 저지른 일이 범죄 취급을 받지 않게 되어, 본의 아니게 도덕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단지 자기 육감에 충실했을 뿐인 오스카 와일드가, 21세기 들어서면서 성소수자 인권의 아이콘이 되고, 당시 독일의 국가 이념이었던 파시즘에 반역한 헤르만 헤세가 추축국이 패배한 현재, 영웅으로 추앙 받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이 아닌 추축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헤세가 과연 영웅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지금이야 영웅이지만, 당시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나라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그들은 확실히 도덕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악당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도덕이 시대를 지나며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역사 속 도덕은 일직선이라기 보단 오히려 원을 그리는 것에 더 가깝다. 전에 도덕이었던 게, 어느 순간 부도덕이 되고, 그 부도덕이 다시 도덕이 되는, 이런 순환 구조 말이다. 어쩌면 도덕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모습이 바뀌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특히 시대를 거치며 가장 자주 바뀐 도덕 기준을 몇 개 뽑아보자면, 크게 동성애와 대마초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고대 그리스는 현대 못지않게 관대한 성 문화를 갖고 있어, 동성애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중세 시대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폐쇄적인 성 문화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탄압이 생긴 것이다. 대마초 또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이 여가를 위해 자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사실 대마초가 불법이 된 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였다. 그런데 세계에서 동성애 탄압과 대마초 불법화에 가장 앞장섰던 미국에서, 21세기 현재 동성 결혼 합법화 및 대마초 합법화가 한참 진행 중이니, 이 무슨 도덕과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 힙합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
2016년에 발표한 “저스디스(JUSTHIS)” 정규 1집 앨범 “2 MANY HOMES 4 1 KID”는 발표 당시도 그렇고, 출시 4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많은 리스너들에게 명반이라 칭송 받는다. 오히려 지금은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여러 명반 중 하나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그런데 가사 내용을 보면, 불효, 학교 폭력, 자해, 음란, 약물 등 부도덕한 가사들이 줄을 잇는다. 게다가 저스디스는 이런 가사를 뱉는데 아무런 거리낌이나 부끄럼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힙합이 과격한 음악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마저 들 수 있다. 이런 음악을 사람들이 왜 명반이라 칭송하는 걸까. 여기엔 이런 도덕적 결점을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 막강한 호소력과 카리스마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저스디스는 여기서 자신의 어려웠던 가정환경을 나열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처지를 동정해달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게토(Ghetto)라는 무법지대에서 자랐지만, 그걸 자신의 Swag으로 승화시키는 본토 래퍼들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PC주의에 입각해, 힙합을 유색인종 특유의 열약한 환경이 만들어낸 아픈 문화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하는데, 난 이게 오히려 당사자성이 결여된 시각이라 말하고 싶다. 흑인들에게 힙합이란 자신들의 치부가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라, 그들의 강인함을 과시하기 위한 무기에 더 가까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나도 이방인인 건 마찬가지지만, 힙합을 PC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아무리 봐도 모순처럼 보여서 말이다. 이걸 한 번 지적하고 싶었다.
도덕적 삶을 살았던 사람만이 사회 비판을 할 수 있는가. 어쩌면 부도덕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본 사람이야 말로, 사회의 부도덕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내부고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터, 힙합을 굳이 PC라는 도덕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힙합은 도덕의 틀 밖에 있더라도, 여전히 훌륭한 사회 비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거다. 오히려 도덕의 틀 밖에 있는 사람이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표출한 음악이기에, 도덕의 틀 안에서 충분히 보호 받은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 경험하도록 이끌어주며, 사회 비판의 색다른 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앨범에서 저스디스는 자신이 악당 취급 받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자신을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나는 차라리 저스디스처럼 힙합을 표현하는 것이, 힙합을 가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인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힙합에 그 어떤 도덕적 당위도 부여하려 하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 앨범이 훌륭한 건, 순전히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예리한 사회 비판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비수처럼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숨겨진 무기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갈고 닦은 것이라 더욱 날카롭다. Swag을 가장한 컨셔스 랩(Conscious rap)인 셈이다.
■ 방황을 거듭하며 너무 많은 집을 가졌던 소년
본 앨범은 1번 트랙 “Motherfucker”부터 자신의 불효를 전시하며 시작한다. 훅(Hook)에 “그니까 털 거야 네 돈 Motherfucker.”라는 구절을 굳이 집어넣은 것과 “I love you mama.”라고 말해놓고, 바로 “Mo'fucker. Yeah, we them mo'fuckers.”를 외치는 이 악랄함을 보라. 유교 문화가 뿌리 깊게 박힌 대한민국에서 어찌 이런 망발이 나올 수 있을까. 그에겐 부모보다도 힙합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실제 사람은 안 그럴지라도, 적어도 이 곡에서 묘사한 본인의 모습은 그렇게 보인다. 2번 트랙 “HOME. 1”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HOME”이란 저스디스에게 결코 따스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방황이 시작된 곳이며, 그 때문에 친구의 집을 전전하며 숱한 밤을 지내야 했음을 드러낸다. 그렇게 소년 저스디스는 너무 많은 집을 갖게 된 것이다.
2번 트랙을 지나 3번 트랙 “씹새끼 (Motherfucker Pt. 2)”에 이르면, 1번 트랙에서 실컷 자기소개를 끝낸 저스디스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이 곡은 학교 폭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몇몇 구절 때문에 저스디스가 자신의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기억하라. 저스디스는 결코 이 앨범에서 자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묘사한 적이 없고, 청자를 향해 동정을 호소한 적도 없다. 오히려 강렬하고 역동적인 플로우로, 자신을 더욱 악랄하고 위악적인 모습으로 꾸민다. 동정을 호소하는 것 대신, 악랄한 위악을 택한 저스디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힙합 특유의 강인함을 실감한다.
그럴지라도, 이 곡에서 저스디스의 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이 곡의 일부분 때문에 전체를 매도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학교 폭력을 일삼는 본인의 모습을 “악마들이 내 두려움을 다 가져갔”다라고 묘사하기도 했고, “그래 나는 씹새끼야.”라는 말까지 하며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충분히 인정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곡 말미에 화자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서, 그 때 그 씹새끼는 이미 죽었다는 걸 표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현 대한민국에서 학교 폭력과 불효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이기에, 이런 민감한 소재들을 두고 적나라한 묘사를 해내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스디스는 논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부끄럼이 없어 보인다. 저스디스는 청중들로부터 욕을 좀 먹더라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고 싶었던 거다. 그게 힙합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Real Shit이라 여겼던 거다. 저스디스가 겪은 상황은 본토 래퍼들이 얘기하던 게토와 비교하면 그토록 악랄한 무법지대는 아니었을지언정, 자기 나름 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게토와 비슷한 상황들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며 호소력을 얻는다.
이 앨범이 훌륭한 이유는 저스디스를 그저 단순한 씹새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4번 트랙 “HOME. 2”를 통해 저스디스는 서울 노원구의 길거리를 자신의 두 번째 집으로 정의한다. 그걸 지나면, 선우정아의 목소리가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5번 트랙 “노원 (No One)”이 등장한다. 이 곡은 힙합을 통해 그 누구보다 “진짜”가 되고 싶은 저스디스의 열망을 담은 곡이다. 자신이 진짜를 추구하다 보니, 자신 만큼 진짜인 사람은 없게 되었다며, 서울 지명 노원을 “No One”이라는 말과 라임을 맞춰 Swag을 뿜는다. 이젠 단순한 씹새끼에서 벗어나, 힙합을 통해 성장하는 첫 단계로 들어선 셈이다.
■ 씹새끼에서 왕으로
6번 트랙 “HOME. 3”를 통해, 저스디스는 힙합을 자신의 세 번째 집으로 정의한다. 첫 번째 집과 두 번째 집을 거치며 방황을 거듭했던 저스디스에게, 세 번째 집 힙합은 자신의 부도덕했던 과거와 내면의 광기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더없이 편안한 장소다. 하지만 저스디스는 그저 집에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가 자신을 표출한다.
DJ Djanga의 화려한 턴테이블 연주가 귀를 즐겁게 하는 7번 트랙 “I Ain't Got None”에선, 래퍼들끼리 이루는 정치보다, 자기 작품 세계에 몰두하는 게 진짜가 되는 길이라며, 자신의 예술 철학을 설파한다. 자신의 예술 철학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역동적이고 압도적인 플로우 속에 담아내는 저스디스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그의 말에 강제로 설득당하는 느낌이 든다. 8번 트랙 “Veni, Vidi, Bitch”에선 7번 트랙에서 설파한 자신의 예술 철학을 기반으로, 한국 힙합 안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멍청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지 고발한다. 한국 힙합의 거목인 팔로알토, 그리고 트렌디 랩이라 하면 늘 언급되는 오케이션의 참여로, 저스디스의 고발은 더 큰 힘을 얻는다.
9번 트랙 “Sell The Soul”은 본 앨범에서 가장 컨셔스 랩 요소에 충실한 트랙으로서, 이 앨범을 해석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앞서 이 앨범을 Swag을 가장한 컨셔스 랩이라 평했는데, 여기 근거로 내세우기 딱 좋은 곡이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왕인 걸, 그냥 전 왕입니다 하면 돼. 아빠가 왕이면. 근데 우린 그 왕이 되려고 싸우고 있다니, 그럼 왕이 되면 대체 뭐가 남는 거야. 몰라, 가. 결국 또 우리 답인 거지. 인생은 왕과 악마 사이를 오가는 bullshit.”
여길 보면, 저스디스가 바라보는 세상에 천사나 영웅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왕이 곧 선이요 정의인 셈이다. 그래서 왕에게 붙어 복종하는 사람들만이 곧 선이고 정의인 건데,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왕좌를 노리는 악마가 되는 셈이다. 저스디스는 다른 왕에게 복종하는 걸 거부했고, 자신이 악마에 머무르는 것 또한 거부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길은 힙합을 통해 돈과 권력을 얻어, 자신이 직접 왕좌에 오르는 것이다. 부모의 돈을 훔치고, 학교 폭력을 일삼던 씹새끼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며, 부모에게 뒤늦게나마 효도하고, 다른 왕들을 존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너그러운 왕이 되겠다는 다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사회의 씁쓸한 이면이 담겨있다. 앞서 말했듯, 저스디스가 바라보는 세상에 선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모두가 악마다. 왕이 되기 위해선 악마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현실을 고발한 셈이다.
“네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네 눈빛은 빛난 걸 모두 기억해. 허나 너의 눈은 이제 악마보다도 빨개. 사실 너도 모르겠지, 너가 이걸 뭐 땜에 하는지. 뭐 땜에 하는지 yeah.”
사실 이런 컨셔스 랩 요소는 3번 트랙 “씹새끼”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다음 구절이 크게 논란을 일으킨 탓에 묻히긴 했지만 말이다.
“Yo, fuck you. 병신은 병신이니까, 그냥 쳐맞고 닥치고 있던 거지. 문제는 네가 병신인거지.”
이 구절 때문에 저스디스는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건 전적으로 피해자의 탓이라 몰아세운다는 오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저스디스는 이 논란에 관해, 과거의 자신에 이입해서 가사를 쓰다 보니 이런 가사까지 나왔다며 항변했다. 누가 보기에 급조한 변명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이 노래 가사와 앨범의 맥락을 분석한 결과, 이게 급조한 변명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논란의 구절, 바로 다음 줄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똑같이 닥치고 있던 선생과 경찰도 문제인거지.”
이걸 보면, 저스디스 자신이 사회가 만든 괴물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사회가 제대로 굴러갔다면 자신과 같은 괴물은 탄생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사회를 향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거다. 이건 오히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와 컨셔스 랩 요소가 적절히 어우러진 좋은 예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외에도 3번 트랙에는 “Fuck it 돈이 망쳐놓은 우리 가족. 난 가난함에 대한 열등감 보다는 돈을 증오했지, 딱 내 외로움만큼.”이라는 문장으로 자본주의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이 병신들 대학이 삶의 절반이란 선생 말 믿었네. 그건 선의의 거짓말도 아니었지.”라는 문장으로, 학벌위주 사회를 공고히 다지기에 열심인 현 교육 시스템을 비꼬기도 했다.
다시 9번 트랙으로 돌아와서, 왕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적어도 저스디스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을 “Bullshit”이라 정의한 걸 보면, 왕이 되어도 인생은 여전히 힘들며,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의 문제들도 여전히 잔존할 거라는 푸념이 느껴진다.
■ 저스디스의 네 번째 집
제 아무리 명반이라도, 정규앨범이면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 앨범은 오히려 마지막 네 트랙에서 가장 깊게 몰입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10번 트랙 “HOME. 4”에 들어서며, 이제 저스디스는 자신의 네 번째 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 집의 정체를 바로 풀지는 않는다. 우선 이 네 번째 집에 초대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부터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 천천히 네 번째 집의 정체를 밝힌다.
11번 트랙 “Doppelgänger”에서는 자신처럼 어려운 가정환경을 타고나, 힙합을 통해 왕이 되려고 분투하는 “제 2의 저스디스”들을 향한 외침을 담았다. 여기 저스디스는 한 때 “씹새끼”였지만, 힙합을 통해 사랑과 윤리를 깨달은 자신의 모습을 은근 슬쩍 드러낸다.
“누가 이 세상을 바꿨지 하면, 우리. 근데 내가 바꾸겠다하면 음, 무리. 라고 하는 놈들과 다들 어떻게 잘도 하는지, 무리. 난 그냥 답해줄게. 자, 왜 혼잔지 묻길. 진짜 없으니까, 진짜들이. 형들 영혼이 메말라 술이나 간에 붓지. 해서 내가 진심을 말하면, 간이 부었지 네가? 하면서, 이 벼룩의 간도 헤쳐먹지. fuck it.
동생들 세월호를 보고도 웃길래, 사람 먼저 되라 하면 음, 꼰대 JUSTHIS.
내 세상은 미쳐있네. 알면 웃는 거여도, 모름 쪼개는 거지. 쪼개진 우리 집 가족사진, 우리 엄마 아빠가 불쌍해 보여. 다신 돈이 우릴 못 쪼개도록. 나 모르는 사람인데, 성공과 옷과의 연관관계. Parents type my name on 녹색 창 all day. So I smile like ha. Flex like hi mom and pa. I'm the shit. 근데 어디 있지, 시스템 바꿔보자던 넌 어디 있지. 따라오라던 형들은 어디 있지. Where's my Doppelgang. 난 여기 있지 king god. Fuck that, I am Hip Hop. this is JUSTHIS. Swag.”
그러나 저스디스도 본인 과거가 어땠는지 뻔히 알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비난을 접고, 이미 모두 체념해버린 듯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인마.”라는 말을 계속 외쳐댄다.
힙합의 위대함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게토라는 무법지대에서 자란 미국 흑인들이라 하더라도, 그들도 사랑을 알고 사랑을 외친다. 힙합은 인간의 이기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랑마저도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는 걸 깨닫게 만든다. 사랑이란, 도덕으로 그 가치를 함부로 매길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도덕이 실종된 게토라는 무법지대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궁극의 가치임을, 그 어떤 음악보다도 힙합이 가장 잘 드러내는 셈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크게 바뀌는 건 없다. 여전히 인간에겐 이기심이 잔존하고 있으므로. 왕이 되기 위해선 악마가 되어야 하는 이 사회는 전혀 바뀌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왕이 되었다고 자처하는 저스디스지만,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 트랙 “Sell The Soul”의 제목을 보라. 아무리 왕이 되었어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이상, 왕이라도 여전히 악마는 악마인 거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도플갱어들을 자신의 네 번째 집 “아뜰리에”로 초대한다.
■ 악마와 뱀들이 득실대는 아뜰리에
12번 트랙 “아뜰리에 (Atelier)”는 이 앨범의 주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트랙이다. 저스디스의 작업실, 혹은 예술적 영감이 곧 저스디스의 네 번째 집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이 트랙을 이 앨범의 킬링 트랙으로 뽑는 바이다. 이 트랙에선 자신이 왕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에 관해 본인이 깨달은 바를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그니까 내가 만들어 온 건,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평화상을 내게 주고, 너는 폭탄주나 말아. let's drink.”
자신의 예술은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한 위력을 가졌으며, 이건 곧 무기로도 쓰일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는 걸 알리는 구절이다.
“여기 도덕은 not allowed but, 윤리는 우리 심장에 tattoo. 얘넨 봐야만 믿으니 내가 죽어야겠군, Let's drink. Let's drink, with a devil and snakes. Let's drink. 얘넨 봐야만 믿으니 내가 죽어야겠군, Let's drink.”
자신과 동석한 이들은 모두 자신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는 뱀들이며, 이들이 바로 저스디스와 같은 진정한 예술가들이다. 그럴지라도 자신들은 자신들만의 윤리가 있으므로, 나름대로 지킬 건 지키며 산다는 걸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도덕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술가의 과격한 모습만을 보고 믿으므로, 그들에게도 나름의 윤리가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믿으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사회가 정한 법칙이나 교육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본인 삶에서 직접 겪은 경험으로 체득한 교훈이며, 이제는 개념이 아닌 감각에 더 가까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부러 도덕이 아닌 윤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리라. 여기 자신들의 심장엔 분명히 윤리가 타투로 새겨져있는데, 아무도 믿질 않으니, 누가 자기 시체를 부검해야, 자기 심장에 새긴 윤리의 타투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은유다. 술이나 실컷 마시다 얼른 죽는 게 인생 즐기는 거라는 그런 뜻도 담겨있는 것 같다.
“어디 있어, 평론가 말고 불러와 하루키를. The rap sounds like 마일스 데이비스의 trumpet. 언젠가 정맥을 탔던 drug 덕분이래. But it's okay.”
대한민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야말로 일본 문예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런 인물일 텐데, 지금이야 이토록 바다 건너 한국까지 엄청난 명성이 퍼져있지만, 그는 사실 오랫동안 일본 문단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래서 일본 평단으로부터 오랫동안 제대로 된 대접도 못 받았던 게 사실인데, 그래도 하루키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분출해냈다. 그 결과, 그는 지금처럼 명성 넘치는 문예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거다. 여기서 굳이 하루키 얘기를 꺼낸 건, 예술의 가치는 이것저것 따지는 걸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은 그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걸 분출하는 게 본질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환각성 약물의 도움을 받아,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킨 사례가 어디 마일스 데이비스 그뿐이랴. 비틀즈도 한 때 LSD를 찬양하는 노래를 썼었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노래 중엔 제목부터 대놓고 “Heroin”인 것도 있다. 이 구절에 앞서 저스디스는 “위대함을 환산할 줄을 몰라 전부 노인임.” 이런 가사도 뱉었는데, 낡은 도덕 기준에만 갇혀 있으면 예술의 위대함을 절대 발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무엇보다 이 노래 전체에 걸쳐서, 저스디스 자신은 예술의 위대함을 정확히 환산할 줄 알고, 그걸 아낌없이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자신의 이 앨범은 반드시 명반이 될 거라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 예술가는 도덕의 수호자가 아닌, 인간의 본성을 해방시키는 사람
저스디스는 13번 트랙 “Welcome to My HOME”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God show me the way. Because the devil trying to break me down. Welcome to my home. 내 형제는 real. 내 가사는 아파. 네 건 다 내꺼지, 내꺼는 내꺼니, 왜 나빠. 나는 다 나눠 (나눠), 나는 다 나눠 (나눠), 나는 다 나눠. 나는 다 나눠 (나눠), 나는 다 나눠 (나눠), 그러니까 나눠.”
저 악마가 자신을 끌고 간다는 표현은 전 12번 트랙에선 슬픈 곡조로 부르다가, 13번 트랙에 들어서서 조금 더 밝아진 음색으로 부르는데, 이젠 악마가 된 자신의 모습을 긍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스디스는 자신의 이런 악마적인 가사들을 나누는 게 전혀 나쁘지 않은 거라며 항변한다. 어차피 자기 안에 있는 악마는 모두 당신들에게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 내 악마는 네 악마이기도 한데, 네 악마는 내 악마니까, 내 것은 내 것이니까, 그걸 나누는 게 뭐가 나쁘냐는 거다. 어쩌면 저스디스는 이를 통해, 내 도덕성의 결함을 욕하는 건 좋지만, 나를 욕하기 전에 당신 본인의 내면을 먼저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랑도 깨닫고 윤리도 심장에 타투로 새긴 저스디스지만, 여전히 이 앨범 전체를 놓고 보면, 도덕보다는 부도덕이 더 눈에 띈다. 그럼에도 저스디스의 랩은 역동적인 플로우와 화려한 언변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듣는 이를 압도한다. 이 카리스마야 말로, 도덕을 뛰어넘는 최고의 설득력이다. 여기엔 도덕적 당위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그저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작품 가치를 따질 때, 카리스마 하나로 도덕의 결여를 모두 용납하는 일은 자제해야겠지만 반대로, 굳이 도덕을 들이댈 필요도 없는 부분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저스디스가 아무리 이 앨범에서 자신을 악당이라 표현했어도, 이 앨범에서 드러난 훌륭한 컨셔스 랩 요소들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의 가사가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철학적 사유와 압도적인 카리스마까지 모두 부정하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영원한 도덕은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만이 영원에 더 가깝게 보인다. 도덕은 항상 인간의 이기심을 억누르는 역할을 해왔는데, 예술은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깨우고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예술과 도덕은 필연적으로 대척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나 예술과 도덕, 둘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둘 다 사회에서의 제 역할이 있고, 그래서 둘 다 적절한 방법으로 공존하는 게 중요하다.
도덕, PC주의, 모두 중요하다. 나는 결코 이것들이 나쁘다고 말한 적 없다. 혹여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위선에 불과할지라도, 인간 사회엔 위선도 적당히 필요한 법이다. 어쩌면 그 위선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시인 김소연의 작품 “소유”에선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조금 더 아름답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선을 소유해야 하고,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씩 위악을 소유해야 한다.”
음악, 더 나아가 예술에까지 도덕을 지나치게 들이대려 한다면, 도대체 인간의 본성을 어디를 통해 해방시켜야 할까. 그런 도덕이나 PC 등은 예술 이외에, 직장이나, 정치인들에게만 들이대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예술이 과격해질수록, 사회는 오히려 건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인간의 본성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결국 식욕과 성욕이거늘. 억눌린 욕망을 예술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수단으로 풀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예술을 통해서 해방시키는 게 가장 건전한 수단 아닐까.
세상에서 예술가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할 때, 저스디스의 본 앨범이 던지는 메시지는 중요하다. 이는 예술의 본질에 관해 가장 날것의 언어로 표출한 결과물이며, 힙합이야 말로 현 시대에, 예술의 역할을 가장 트렌디한 방법으로 표출하는 음악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비록 그 방법이 조금 폭력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것이 인간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 아닐까. 악마는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곧 악마일지도 모른다.
“한 방만 노린 니네가 나의 퀄리티를 up. Relax mind you never ever catch me up. 너넨 한 방, 나는 영원. 자도 되지.”
저스디스가 “2 MANY HOMES 4 1 KID” 앨범을 통해 증명한 어둠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다. 저스디스는 힙합을 통해, 그리고 이 앨범을 통해, 스스로 “정복하고 구원”을 동시에 이뤄냈다.
* 마지막 14번 트랙에 관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으므로, 다음 링크에 따로 정리해두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14번 트랙 “JUSTHIS” 가사 해석 보기
트랙리스트
1. Motherfucker
2. HOME. 1
3. 씹새끼 (Motherfucker Pt. 2)
4. HOME. 2
5. 노원 (No One) (feat. 선우정아)
6. HOME. 3
7. I Ain't Got None (feat. DJ Djanga)
8. Veni, Vidi, Bitch (feat. 팔로알토, 오케이션)
9. Sell The Soul
10. HOME. 4
11. Doppelgänger
12. 아뜰리에 (Atelier)
13. Welcome to My HOME
14. JUS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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