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56: 탐쓴(Tomsson) - NON-FICTION
현실은 언제나 픽션보다 잔혹하다
■ 작년 여름과 올해 가을
인생명반을 통해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웹진 빅나인을 통해 그와 인터뷰를 가진 지도 어느덧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돌아보면 1년 사이에 나 자신에게 많은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작년만 하더라도, 전염병으로 세상이 이렇게 암울하게 물들어버릴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나는 역병이 도는 세상 속에서도 삶을 유지하고,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 변화는 나의 의지보다는 운명에 이끌린 것에 더욱 가까웠다.
내가 맞이한 운명의 중심에 래퍼 탐쓴(Tomsson)이 있었다. 내가 방금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인터뷰를 했노라 말했던 그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걸 거부해왔다. 그것은 내 음악취향에도 반영이 되어, 이대로 가다간 내 취향과 다른 음악이라면 우선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소위 “꼰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떨림을 느끼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접한 탐쓴의 정규 2집 “META FICTION”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내 음악세계의 저변을 넓히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가 작년 여름이었다.
탐쓴은 재키와이 앨범을 통해 힙합에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긴 내게, 힙합에 대해 좀 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나의 음악취향을 넓혀주고 “꼰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준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과 함께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비록, 세상이 그를 충분히 알아주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건 내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올해 가을, 정규 3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써준 글과 나와의 인터뷰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정규 3집 발매를 앞두고 진행한 “음감회”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거기서 나는 CD까지 선물 받고 기뻐서 정신이 한동안 아득해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동성로 어느 작은 LP바에서 진행된 음감회에, 정규 3집 첫 번째 트랙 “I'M NOT OK”가 울려퍼졌다.
■ 잔혹한 현실
“아쉽게 내 삶은 방송과 신문 사진과 각종 사설과 미디어선을 통해 절대 알 수가 없어.”라고 말하다가도 그래도 “I'M OK”를 외치며 아무도 모르는 길일지라도 어쨌든 자신만의 길을 가겠노라, 2집에서 당당하게 노래하던 탐쓴이었다. 그런데 3집은 처음부터 “I'M NOT OK”를 외치다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순식간에 그의 1집 앨범 “PULP FICTION”을 떠올렸다. 앨범의 프로듀서인 “CASH NOTE”가 “난 원래 음악을 시작한 이유가 섹스를 하고 싶어서야.”라고 말한 걸 여과없이 그대로 내보내거나, 마땅한 창작물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인맥 빨 버프도 못 받아 너네 rap shit, 곱게 썩어도 구제도 안 될 fake shit.”이라며 거칠게 욕하던 앨범이었다. “FICTION”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음에도, 이보다 더 솔직할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어찌 보면 잔혹하기까지 한 앨범이었다.
그러나 이번 3집 앨범은 픽션이 아니다. “NON-FICTION” 그는 이제 픽션이 아닌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비트와 빽빽한 랩 스킬로 일관하는 이 앨범은, 솔직함이 넘쳐흘러 잔혹함마저 느끼게 했던 “PULP FICTION”보다도 훨씬 살벌하게 느껴졌다. 이 앨범을 감상하는 내내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역시, 픽션이 아무리 잔혹해봐야 현실만큼 잔혹하지는 않구나. 탐쓴이 맞이한 현실이 탐쓴에게 이런 살벌한 음악을 만들게 했구나.
음감회가 진행되며, 11번 트랙에 이르렀을 때는 전율과 함께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오기도 하였다. 1번부터 10번 트랙까지 늘어놓은 현 한국 힙합 씬에 대한 살벌한 비판을,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들이댄 것이다. 나의 영웅 탐쓴, 그러나 내 영웅도 세상 앞에선 결국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드러내는 아픈 순간들이었다.
“난 순수와 진심은 통한다고 뱉고 또 괴로워. 꿈같던 우상들 별천지 같던 그들을 따라 가길 바랐던 꼬마애가 본 현실은 나락. 대한민국에 힙합은 없었고 그냥 다 entertain. 다 직업인거지 유지를 위해 꾸며 생존게임. 난 내가 정답이라 외칠 만큼 자신 없지. 자본의 한계를 맛보고 다가오는 현실 복귀. 난 아무리 외쳐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잖아. 난 그냥 편하게 내 탓을 택해서 더 하찮아져. 약속의 장소, 우리 다시 만나는 장소, 이대로만 한다면 나 갈 수 있을까? 수많은 작사가들 속 내 한계점이 보였고, 난 눈을 가리다 이젠 뽑게 되고 꼬였어.”
- 11번 트랙 “유진박”
“내 꿈에 나타나 그냥 사라지는 걸 저 부유한 래퍼들의 천국의 조건. 다른 사람의 머리를 밟고 위로 Jump off. 친구라 불리던 이들을 꺾고 하나 둘 다 버리며는 그 때 갖게 되는 명품. 보상인 듯이, 진리인 듯이, 물질의 가치를 퍼뜨려 더. 보상인 듯이, 진실인 듯이, 그에 반하는 내 소린 열등인 듯이.”
- 12번 트랙 “SAY MY VISION”
■ 순수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는 앞서 3번 트랙 “NOBBACK”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 순수를 망치는 쟤네를 인정할까요. 내 순수는 진지하게 내 삶을 구원했고, 그 순수를 만든 사람, 추락을 안 좋아해요.”
내게는 이 앨범의 마지막 다섯 트랙이, 내게 순수한 힙합의 멋을 알려준 탐쓴의 추락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 아픈 감정은 곧 희열로 바뀌며, 마침내 래퍼 탐쓴에 대한 감탄에 이르렀다. 이런 절박한 상황마저도 랩으로 풀어버리는 그는 뼛속까지 힙합이며 아티스트라는 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음악세계에서 탐쓴은 힙합을 깨닫게 해준 영웅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현실에선 아직도 그는 인지도가 부족한, 정규 3집까지 냈음에도 그만큼의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 불운의 래퍼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 래퍼 본인이 이 사실을 가장 깊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참한가.
며칠 후, 나는 그와 다시 한 번 인터뷰를 갖게 되었다. 사람 셋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대구 3호선 남산역 근처, 빌딩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아담한 스튜디오였다. 그 아담한 공간에는 그가 사용하는 컴퓨터 및 녹음 장비들과 함께, 그의 롤모델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포스터가 벽에 즐비하게 붙어있었다. 아담하지만 그의 야망을 보여주기엔 충분할 만큼 세심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1집과 2집은 그래도 밝은 노래가 몇 개씩은 꼭 들어있는데, 이번 앨범은 밝은 트랙도 전혀 없고 살벌하기까지 하다고, 어쩌다 이런 분위기의 앨범이 나왔느냐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제가 바라본 현재 한국 힙합은 절대 핑크빛이 아닌 걸요.”
■ 힙합의 본질과 순수를 이야기하면 꼰대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는 나의 음악취향이 꼰대처럼 굳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준 영웅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발언은 모순적이게도 그를 꼰대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진행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변화된 음악적 색깔이 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훨씬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탐쓴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이미지가 “붐뱁”으로 굳어지는 게 싫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붐뱁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소망을 자신의 결과물로 확실히 증명해보였다. 이번 정규 3집 “NON-FICTION”은 그의 지난 1집, 2집 앨범에 비해 훨씬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준 앨범이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붐뱁의 색깔을 거의 빼버리고, 트렌드를 반영하는 데 훨씬 공을 들인 작품이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서 가장 감명 받은 부분인, 힙합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본인은 이렇게 변화한 음악성에서도 자신의 근본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붐뱁은 요즘 유행하는 “트랩”에 비해 박자에 대한 이해와 숙련된 랩 스킬을 훨씬 많이 요구하는 음악으로 알려졌는데, 그런 만큼 탐쓴은 자신이 해오던 붐뱁의 고난도 스킬을 트렌드에 자연스레 녹여내며 강력한 시너지를 뿜어낸다.
그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으면서, 진정 중요한 본질은 충분히 지켜갈 수 있다는 걸, 자신의 작품으로서 증명했다. 과거의 산물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지키려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진정 중요하게 지켜야 할 본질은 분명히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본질, 그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사람들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탐쓴은 허상에 찌든 꼰대에 불과한 걸까. 탐쓴이 이번에 낸 결과물을 들어보면 결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탐쓴 자신이 부르짖는 “본질”은 트렌드를 타고 결과물이 되어 “실존”으로 나타났다. 그가 부르짖는 본질이라는 걸 허상이라 치부하고 옆으로 치워버리기엔, 탐쓴은 이번에 무척 훌륭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특히 마지막 다섯 트랙에서 보여준 자아성찰은 깊다는 말로도 모자라 심연 그 자체라고 평해야 마땅해보인다. 그 지독한 자아성찰을 트렌드에 녹여낸 영민함을 경험한다면, 이 앨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실존으로 청자의 마음속에 각인될 것이다.
정규 1집 “PULP FICTION”에서 자신의 꿈과 야망을 거친 언어로 여과 없이 보여주던 탐쓴, 2집 “META FICTION”에서 잠시 치열한 자아성찰을 보여주더니, 이제는 3집 “NON-FICTION”으로 자신이 맞이한 살벌한 현실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줄어들지 못하는데 빚더미가 되어도, 난 E SENS 또 META 또 MINOS 다음 ain’t no joke 그게 진짜로 나.”
그는 이 말이 현실이 되어 자기 앞에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I'M NOT OK”를 외칠 것이라 한다. 2집 마지막 트랙에서 자신의 여러 결점과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칠 수 없다며, 끝내 “I'M OK”를 외치던 강인한 탐쓴의 모습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다시 당당하게 “I'M OK”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분명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 이번 신보로 그걸 증명까지 해냈으니 말이다. 그의 랩과 음악에는 분명, 이 잔혹한 현실마저 극복해버릴 가공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
트랙리스트
1. I'M NOT OK
2. NON-FICTION (Feat. Loxx Punkman)
3. NOBBBACK
4. TAKE OFF
5. COPY CAT (Feat. 수다쟁이)
6. FM (Feat. viceversa, Dayoff)
7. MORSE CODE (Interlude)
8. ASSEMBLE (Feat. ANTI MIZMO, Dayoff)
9. ANTENNA (Feat. Sikboy)
10. GREEN RECIPE (Feat. Queen WA$ABII)
11. 유진박
12. SAY MY VISION
13. UNMASK (Feat. 화나)
14. LOVE FOR (Feat. $atsuki)
15. THE END OF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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