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53: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 - With Teeth
색을 가지면 그것은 더 이상 선도 악도 아니다
■ 남들이 명반이라 불러야 꼭 명반인가
명반이란 대게 음악적인 이유로 정해지지만,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을 수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평가가 좀 뒤떨어지는 음반이라도, 내게는 얼마든지 명반일 수 있다. 명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는 수록곡 간의 유기성 혹은 신선한 음악적 충격이 없어도, 개인적으로는 명반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 들면, 수록곡 중 하나가 지극히 마음에 들어 그 한 곡 때문에 다른 곡들도 마저 좋아지는 때, 수록곡들의 음악성과는 별개로 그 수록곡들이 내 삶을 잘 설명해주고 있을 때,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번에 소개할 앨범 “With Teeth”의 경우에는 내가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품고 있어, 음악성과 별개로 내게 명반으로 각인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불후의 명반을 발표한 뮤지션이라 할지라도, 앨범을 여러 장 발표하다 보면, 그 중에서 꼭 하나는 커리어에서 제해버려도 괜찮을 법한, 이른바 “똥반” 앨범이 생기기 마련이다. 퀸(Queen)에겐 “Flash Gordon”이 있고, 메탈리카(Metallica)에겐 “St. Anger”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에겐 “The High End of Low”가 있다. 트렌트 레즈너의 1인 밴드였던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경우 2005년 작 “With Teeth”가 바로 그런 앨범이었다. 그러나 남들이 흔히 똥반이라 부른다고 그것들이 내게도 반드시 똥반일 수는 없다. 내가 한참 트렌트 레즈너를 숭배하던 고등학생 때는 그 앨범이 사람들이 말한 것과는 달리 굉장히 명반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은 트렌트 레즈너에 대한 경외심이 많이 사라지면서, 그들이 왜 그 앨범에 가혹한 혹평들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 사람으로서 솔직한 감정을 담다
이 앨범이 나온 지도 어느덧 15년째, 지금은 평가가 많이 바뀌었을까. 당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똥반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명반까지는 아니더라도,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앨범 정도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자극적이지도 파격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수록곡들의 음악적 색깔이나 그 곡들의 주제가 워낙 중구난방이라서, 수록곡 간의 유기성도 약하게 느껴진다. 명반이라 부르기엔 좀 애매하긴 하다. 그런데 난 어떻게 고등학생 시절에 이 앨범을 명반이라 느꼈을까.
이전에 발표한 나인 인치 네일스 앨범들 “The Downward Spiral”, “The Fragile” 등을 예로 들면, 이 앨범들 속에 트렌트 레즈너는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지독하게 염세적이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을 홀로 걸어가는 생명체 말이다. 하지만 “With Teeth”에서는 사운드의 과격함을 좀 덜어내고, 좀 더 부드럽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트렌트 레즈너의 모습을 낯설게 느껴 이 앨범을 좋게 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뮤지션 레즈너가 아닌, 사람으로서 레즈너를 알려면, 이 앨범은 필히 청해야 한다. 이 앨범만큼 트렌트 레즈너 개인이 가진 철학과 사랑에 대해 솔직한 모습이 드러나는 앨범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때 이 앨범을 좋아했던 것 같다. 뮤지션 레즈너뿐만 아니라, 사람 레즈너도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사람 레즈너를 알고 싶었던 내게는 이 앨범만큼 좋은 앨범은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 앨범을 낮게 평가하는 세간의 많은 평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 상냥함에 대한 지독한 갈망
그걸 알고 있는가, 나인 인치 네일스의 노래 제목에 “Love”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곡은 모두 “With Teeth” 앨범에만 있다는 사실. 물론 가사에선 종종 그 단어를 쓰긴 했지만, 제목부터 그 단어를 사용한 앨범은 2017년 “ADD VIOLENCE”가 나올 때까지 없었다. 그나마 “ADD VIOLENCE”에서도 “Love”가 아닌 “Lover”를 쓰고 있다. 그만큼 “With Teeth”는 트렌트 레즈너의 인간적 면모가 부각되는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에서 두드러지는 정서는 상냥함에 대한 갈망이다. 다른 앨범에서도 상냥함을 갈망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그건 왠지 현실의 암울함, 잔인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대비 효과에 불과해 보인다. 반면 이 앨범에서는 상냥함을 더욱 적극적으로 갈망하게 되면서, 이전 앨범과 다른 색채를 띤다. 이것이 이 앨범에 제목부터 “Love”라는 단어가 나오는 곡이 두 곡이나 실린 이유일 것이다. 물론 나인 인치 네일스 특유의 파격이나 위악이 사라진 건 아니다. 음색은 여전히 부드러움보단 거칠기에 가깝다. 그러나 거친 음색도 갈망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1번 트랙 “All The Love In The World”에선 외로움에 신음하는 화자가, 사랑에 둘러싸인 어떤 존재를 바라보며, 지독한 동경을 표출하는 정서가 느껴진다. 중간 중간 새어나오는 기괴한 음색에서, 그 동경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느껴진다. 그러나 노래가 중반부 이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밝게 전환되며 활기를 띤다.
5번 트랙 “Love Is Not Enough”는 제목만 보면 연애에 관한 노래로 착각하기 쉽지만,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들이 모두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라고 한탄하는 노래로서, 개인적인 노래라기 보단 세상을 걱정하는 노래에 더 가깝다. 사랑으로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위악적인 음색으로 담아냈다.
영화 “원티드” OST로도 유명한 6번 트랙 “Every Day Is Exactly The Same”에서는 무겁고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로, 일상의 무료함이 얼마나 숨 막히게 다가오는지를 표현했다. 상냥함과 따스함을 갈망하는 걸 넘어, 그것에 실망하여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 깨부숴버리는, 처절한 트렌트 레즈너의 모습은 이 앨범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 상냥함을 갈망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싸워야하고
우리가 상냥함을 갈망한다고 해서, 마냥 남들 앞에 친절할 수만은 없다. 상냥함을 갈망하는 이유는 우리 주변에 상냥함이 없기 때문이고, 나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을 내가 상냥하게 대한다면, 오히려 나를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 그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고 착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서로 대등한 관계로 상냥함을 주고받아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서도 종종 오해가 발생하여, 그로 인해 우리는 상처 받는다.
2번 트랙 “You Know What You Are?”는 빠르게 몰아닥치는 비트와 거친 음색으로, 자기 마음에 실컷 썩어문드러진 상처들을 표현하고 있고, 바로 다음 3번 트랙 “The Collector”에선 쫀득쫀득한 그루브 속에 거칠게 기타를 갈기면서, 그 상처들이 징그럽게 날뛰는 모습을 포착하며, 가사에선 자신이 그 모든 것들을 모으는 사람이라며 자책한다.
4번 트랙 “The Hand That Feeds”에서는 간결한 기타 리프와 거친 연주로 나인 인치 네일스가 재해석한 펑크(Punk)를 만나볼 수 있는데, 이 펑크 연주가 드러내는 것은 역시, 70년대 영국의 펑크 로커들이 뿜어내던, 세상을 향한 반항이다. 우리를 착취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밥 굶는 것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울분을 토하며, 우리의 먹이를 주는 그들의 손을 깨물어버리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8번 트랙 “Only”에서는 상냥함을 지독하게 갈망한 탓에 오히려 망가져버린 관계를 표현한다. 관계의 해체와 같이 따라오는 환멸의 순간을 기괴한 음색에 담아냈다. 댄서블 비트에 조심스레 얹어지는 피아노 연주, 그 위를 훑고 지나가는 거친 음색까지, 환멸 앞에서 비틀비틀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가 관계를 망치는 요인이, 상대방을 향한 지나친 기대, 거기서 비롯된 헛된 바람이라는 걸 드러낸다.
“Yes I'm alone but then again I always was, As far back as I can tell. I think maybe it's because you never were really real to begin with, I just made you up to hurt myself.
그래 난 혼자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난 항상 그래 왔어. 생각해보니 너는 처음부터 절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나 자신을 상처주기 위해 너를 만든 거야.
I just made you up to hurt myself.
나 자신을 상처주기 위해 너를 만든 거야.
There is no you. There is only me. There is no you. There is only me. There is no fucking you. There is only me. There is no fucking you. There is only me.
너는 없어. 오직 나뿐이지. 너는 없어. 오직 나뿐이지. 씨발 너는 없어. 오직 나뿐이라고. 씨발 너는 없어. 오직 나뿐이라니까.”
■ 현실과 환상, 선과 악
이 앨범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을 뽑으라면 역시 10번 트랙에서 마지막 13번 트랙까지 네 곡이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8번 트랙 “Only”를 보면, 환상에 빠진 자기 자신을 현실로 빼내기 위해 고단한 노력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10번 트랙 “Sunspots”에서 다시 환상에 젖어드는 화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곡의 잔잔하게 일그러지는 음색은 환멸도 괴롭지만, 때론 환상 속에 젖는 것도 괴로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감정이란 대부분 우리의 상상이 빚어내는 것이므로, 기쁨도 슬픔도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즉, 슬픔도 상상이 빚어내는 것이기에, 때론 현실보다 환상에서 더 큰 슬픔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다.
11번 트랙 “The Line Begins To Blur”에서는 10번 트랙에서 일그러진 음색이 더욱 처절하게 일그러진다. 환상과 현실, 선과 악, 그 사이에 끼여 있던 사람이 그 경계를 부수려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이 연상된다. 중간 중간 보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부분에서, 그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12번 트랙 “Beside You In Time”은 11번 트랙이 미처 끝을 맺기 전에 자리를 차지한다. 노래 제목이 해석하기가 좀 난해한 편인데, 모든 경계를 허물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면서 만난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혹은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이상이나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이 곡은 연주에는 멜로디를 거의 죽인 채로 같은 소리만 반복하며, 보컬 읊조리는 멜로디도 지극히 연하다. 중간 중간 급작스레 곡의 분위기가 바뀌는 부분에선 화자가 초월에 더 가까워지는 모습이 마저 연상된다.
마지막 13번 트랙 “Right Where It Belongs”에선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허무한 풍경을 묘사한다. 일그러진 음색이 피아노 연주 사이로 먼지처럼 떠다니는데, 세상의 모든 가치가 소멸되어 사라지는 모습 같다. 이 곡의 화자는 마음속에 있는 공허야 말로 우리 마음의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Feel the hollowness inside of your heart. And it's all, Right where it belongs.
네 가슴 속 공허를 느껴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원래 있던 자리인 거야.
What if everything around you, Isn't quite as it seems. What if all the world you think you know, Is an elaborate dream.
만약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게, 네가 보고 있는 것과 같지 않다면. 만약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상 모든 게, 그저 정교한 꿈에 불과하다면.
What if all the world's inside of your heart, Just creations of your own, Your devils and your gods, All the living and the dead. And you really are alone.
만약 네 가슴 속 모든 세상, 네 악마와 네 신, 모든 산 것과 죽은 것들, 그 모든 게 그저 네가 만든 창조물에 불과하다면. 넌 정말 혼자인 거야.
You can live in this illusion. You can choose to believe.
너는 이 환상 속에 살 수 있어. 그것들을 믿기로 결정할 수도 있지.”
■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색을 갖고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생각과 기준을 놓고 타인을 판단하고 세상을 해석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의견이 같지 않기에,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일수록 사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정말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통달한 사람이 있을까. 어느 한 종교나 이념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면, 세상은 왜 아직도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놓고 다투기만 할까. 이 다툼은 언제 끝나는 걸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선과 악은 실은 없는 것이고, 모든 게 각자의 색깔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흰색과 검정색은 완전히 반대의 색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거기엔 그 어떤 색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우리 각자는 우리만의 색을 갖고 있는데, 세상을 한 가지 색으로만 물들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색이 없는 흰색이나 검정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앨범 속 화자는 언젠가, 세상이 너무 다른 색들끼리 섞여 있어 어지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결국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아무 색도 존재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깨달았다. 공허가 진정한 우리의 고향임을.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공허 속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도 언젠가 다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나가면서, 새로운 사랑을 만들고, 새로운 싸움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다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게 될 것이다.
트렌트 레즈너는 이 앨범을 통해 세상의 모든 색을 지워버리려는 괴물이 아닌,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공허 속이 가장 편안하다는 결론은 같겠지만,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도 결국 자신과 맞지 않는 세상이지만, 자신만의 색깔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처럼 보인다. 나도 그처럼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색을 지워버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앨범을 들으며 다시 힘을 내본다.
트랙리스트
1. All The Love In The World
2. You Know What You Are?
3. The Collector
4. The Hand That Feeds
5. Love Is Not Enough
6. Every Day Is Exactly The Same
7. With Teeth
8. Only
9. Getting Smaller
10. Sunspots
11. The Line Begins To Blur
12. Beside You In Time
13. Right Where It Belo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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