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생명반 에세이

베토벤 · 교향곡 9번 “합창” -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도이치 그라모폰 (Beethoven · Symphonie No.9 – Berliner Philharmoniker · Hervert Von Karajan · Deutsche grammophon) (1984)

인생명반 에세이 51: 베토벤 · 교향곡 9번 “합창” -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도이치 그라모폰 (Beethoven · Symphonie No.9 – Berliner Philharmoniker · Hervert Von Karajan · Deutsche grammophon) (1984)

 

종교와 국가의 벽을 넘어 사람의 시대를 합창하다

 

■ 내 삶에 내린 계시

“음악은 모든 지혜와 철학보다 한수 위의 계시이다.”

 

베토벤이 남긴 말이다. 나는 음악이 내 삶을 이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음악은 내게 언제나 동반자였으니까. 다만, 내가 듣는 음악이 내 삶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음악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음악은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때로 나는 음악 감상을 통해 나 자신조차도 못 깨닫고 있던 내면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면들을 봤을 때, 음악은 내 삶에 내린 계시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내 삶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저 말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베토벤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을 듣게 된 계기란, 역시 내 삶에 벌어진 변화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원래 견디기 힘든 감정이 몰려올 때면,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는 게 늘 우선이었는데, 그 때 듣는 음악은 대게 염세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내 마음의 흐름과 같은 흐름을 공유하는 음악을 들으면, 나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10년이나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는 왠지 염세적인 음악이 예전만큼 와 닿지 않게 된 것이다. 염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게 되었다. 그 때,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뮤지션이 베토벤이었다.

 

사실 베토벤이 떠오른 이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가 첫째는 쇼팽이요, 둘째가 베토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쇼팽보다는 왠지 베토벤이 듣고 싶었다. “비창(Pathétique)”이라 불리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은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애착을 가지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차분한 분위기의 2악장을 좋아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클래식을 듣는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안을 위해 비창 2악장을 찾았는데, 그걸 다 듣고 나니 뭔가 다른 악장들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1악장부터 다시 재생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2악장과는 전혀 다른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내 평소 많이 듣던 2악장은 슬픔을 포근히 안아주는 느낌이었다면, 1악장은 그야말로 갑작스레 다가온 슬픔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감정의 거센 파도를 표현한 느낌이었다.

 

 

▲ 베토벤 초상화, Ludwig van Beethoven, Carel L. Dake(1857~1918) 작

■ 베토벤의 동시대적 역동성

비창 1악장에서 의외의 느낌을 받은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베토벤의 음악을 그저, 클래식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가둬놓고, 그의 음악에 대해 동시대적 감정을 느끼는 데에 소홀했다는 것을. 모든 음악을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내가, 사실은 클래식에게만 은연중에 편견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클래식을 그저 “교양”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가두려고 했고, 그저 편안한 음악으로 취급하려 했던 경향이 있었던 거다. 그러나 클래식은 그저 교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음악도 아니고, 편안함만을 얻기 위해서 들어야 하는 음악도 아니다. 클래식도 엄연히 내가 사는 바로 이 시공간 속에서 동시대적 감성을 선사할 수 있는 음악이며, 편안함은 클래식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 중 하나일 뿐이다.

 

클래식을 들으면서도 EDM을 듣듯이 신나서 몸을 흔들어댈 수 있는 것이고, 클래식을 들으면서도 록을 들으며 느낄 수 있는 분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EDM에서도 슬픈 정서를 느낄 수 있고, 록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한 음악 장르에 대해 보편적 인상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음악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에는 배경이라는 게 있으니, 그 배경에 따른 개성은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편적 감상에만 갇혀 편견을 형성하는 것은 음악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깨달음에 이르러, 나는 클래식에 대한 편견 때문에 클래식을 들으며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 되돌아보았다.

 

나는 베토벤의 정신을 체득하고 싶었다. 베토벤과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음에도 작곡을 이어간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는 대게 이런 이야기를 위인전이나 학교에서만 듣고, 그저 습관적으로 대단하다는 말만 한마디 뱉고서 흘려버린다. 나는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난 후 어떤 곡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걸 들으면, 베토벤이 청력을 잃었을 때에도 작곡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 그 위대한 정신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교향곡 9번이었다. 교향곡 전체를 들으면 1시간을 족히 채우는 방대한 분량이었으나, 평소 대중음악 정규앨범 하나를 통째로 듣는 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이런 도전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음반을 찾아 재생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vert Von Karajan)

■ 카라얀과 베토벤 교향곡 9번 그리고 음반의 역사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를 논할 때, 언제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vert Von Karajan)이다. 그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 위용을 음악으로 직접 경험할 기회는 갖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베토벤 교향곡 9번 음반을 찾게 되면서 비로소 카라얀이 지휘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주제로 삼은 음반을 지금까지 총 세 개를 들었다. 한국의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이 연주했고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에서 발매한 앨범,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하는 미토 챔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고 데카(Decca)에서 발매한 앨범,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담은 도이치 그라모폰 1984년 발매 앨범이다.

 

정명훈, 오자와 세이지, 둘 다 좋았지만, 역시 가장 와 닿았던 건 카라얀의 지휘였다. 특히 내가 들었던 범위 내에선 오자와 세이지 앨범과의 비교로 가장 극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오자와 세이지가 베토벤 시대의 소규모 편성으로 섬세한 감성을 표현했다면, 카라얀은 압도적인 스케일로 웅장하게 곡을 표현한다.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는 베토벤의 감성에 집중했다면, 카라얀은 베토벤이 겪었던 고난에 집중하는 느낌이랄까. 베토벤이 역경에 신음하고 결국 그걸 딛고 일어서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카라얀의 지휘는 헤비메탈처럼 자극적이다. 원곡은 74분이지만, 카라얀의 지휘는 곡의 진행을 좀 더 빠르고 긴박하게 바꾸어, 67분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베토벤 교향곡 9번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겐 카라얀의 지휘가 첫 번째 선택으로 가장 좋을 것이다.

 

카랴안을 들어야 할 이유는 음악 내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음악 외적으로도 그러니까, 음반 산업에서도 카라얀은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이 덕분에 카라얀은 지휘자 역사뿐만 아니라, 음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즉, 카라얀의 앨범을 듣는다는 건, 음반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40년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음반 녹음에 부정적이었던 대다수 지휘자, 연주자들과 달리, 카라얀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이 지휘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녹음하기 위해 열정적이었고, 이런 카라얀의 행보는 각종 음반사들의 임원들과 친분으로 이어졌다. 이는 카라얀의 지휘 실력과 더불어, 카라얀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카라얀의 행보와 더불어, 첩보로 전해지지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화 하나가 있는데, 이는 카라얀이 음반 산업에서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 카라얀과 함께 선 소니 회장과 필립스 오디오 담당자

1970년대 후반, 새로운 음반 매체인 CD를 개발하던 소니 측에서 카라얀에게 CD의 표준 규격으로 어느 정도가 적당하겠느냐 물었는데, 카라얀이 이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LP 두 장에 나눠담아야 하지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74분이 좋겠군요.” 사실 필립스도 소니와 공동으로 CD를 개발 중이었는데, 필립스는 60분 정도를 담을 수 있는 11.5cm를 표준규격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소니는 카라얀의 말에 의해 74분을 담을 수 있는 12cm를 표준규격으로 내세웠고, 결국 1981년 4월 15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카라얀과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그리고 필립스 오디오 담당자 주프 반 튈뷔르흐(Joop Van Tilburg)와 함께 한 자리에 서서, CD의 표준규격이 74분을 담을 수 있는 12cm로 채택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토록 카라얀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음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 카라얀의 지휘로 만나는 베토벤의 역동적인 정신

카라얀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 외에도 더 있는데, 일단 카라얀이 베토벤과 같은 독일어 문화권에서 살았기에, 베토벤의 정서를 깊게 이해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더 중요한 건 카라얀과 베토벤이 음악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는 거다. 카라얀이 20세기 이후 현대 클래식계에 새로운 지휘 트렌드를 형성했던 것처럼, 베토벤도 시대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무렵 작곡에 새로운 트렌드를 열었다는 유사성이 있다. 베토벤은 흔히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은 작곡가로 평가 받는다.

 

교향곡 9번 “합창”은 교향곡에서 최초로 합창을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를 통해 기존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새로운 걸 추구하는 베토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베토벤이 남긴 마지막 교향곡 작품이기에, 그 의미가 특별하다. 베토벤의 음악이 현재 우리에게도 여전히 와 닿는 것은 이런 계속해서 새로운 걸 추구하는 베토벤 정신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베토벤 정신이 카라얀처럼 트렌드를 추구하는 지휘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될 원동력이 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외에 현대 대중음악에서도 독보적으로 많은 재해석을 낳는 작곡가가 아니던가.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직후 작곡된 곡이기에, 곡에서 절망의 정서가 느껴질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들어보면, 베토벤이 겪은 인생 최대의 시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음색을 들려준다. 물론 비장하고 웅장한 연주도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마저도 “환희의 송가”를 향한 여정처럼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토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숭고함을 향해 굳건히 나아가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 1악장

1악장의 시작은 고요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르는 연주가 이어진다. 그러다 연주가 급속도로 웅장해지면서 비장한 느낌을 한껏 증폭시키는데, 이는 이 곡의 전체적 맥락으로 봤을 때, 베토벤이 꿈꾸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곡은 이런 시련과 맞서 싸우듯, 긴장감 넘치는 음색을 위풍당당한 느낌으로 순식간에 치환시켜버린다. 곡은 다시 조용함에 삼켜지다가도, 다시 급속도로 웅장해지기를 반복하며, 베토벤이 곡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정신에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1악장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급박하게 2악장의 포문이 열린다. 처음부터 현악기와 타악기가 서로 웅장한 연주를 주고받는 장면이 일품이다. 이는 1악장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1악장에 비해 더욱 위풍당당하고 밝은 음색을 보여주며 시련에 맞서는 자세가 한층 능숙해졌음을 드러낸다.

 

3악장에서는 1악장과 2악장에서 보여준 웅장함이나 긴장감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린 것처럼 시작한다. 시련에 맞서는 것도 지쳤다는 듯이 고요한 음색 속에 애수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곡은 서서히 소리를 높이며 이전 악장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되찾는다. 마침내 곡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다시 웅장한 연주를 출현시키며 청자를 놀랍게 만든다. 곡의 마무리는 곡의 시작처럼 고요히 수그러들 듯이 끝나는데, 4악장은 1악장과 2악장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긴박한 연주로 시작한다. 마치 3악장에서 고요한 와중에 갑자기 드러낸 웅장함이 복선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 인류의 화합을 통해 환희에 찬 세상을 그리다

긴박했던 연주는 다시 수그러들어 3악장과 비슷한 형태로 다시 자리 잡는데, 여기에선 왠지 3악장에서 느껴지던 애수나 편안한 감성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묘한 긴장감은 곧 이 때까지 길게 이어지던 연주에선 전혀 보여주지 않던, 눈이 부시도록 밝은 음색으로 이어진다. 마치 오랜 시련 끝에 광명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빛은 아직 어둠을 이기지 못했는지, 다시 긴박한 연주가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수그러들었다, 다시 긴박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4악장 처음에 등장한 그 선율이 다시 등장하며 곡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데, 이 때 갑작스레 모든 악기 연주가 그치고 바리톤의 목소리가 곡을 지배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순간이다.

 

바리톤의 목소리는 마치 신의 계시처럼 청자의 마음을 공명한다. 바리톤의 목소리에 이어 합창이 이어지고 이들은 인류 역사상 다시는 없을 위대한 환희를 맞이하듯 밝은 음색을 내뿜는다. 하지만 이들의 환희에 찬 음색을 방해하려는 듯, 다시 긴박한 연주가 이어진다. 사람의 목소리가 긴박한 연주에 먹히다가도, 결국엔 다시 합창이 목소리를 높이며 웅장한 악기 연주와 결합하는데, 여기에서 많은 시련이 있지만 결국 그것을 이겨내고자 분투하는 인류의 강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이 부분의 가사는 당시 독일의 유명 시인이었던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가 썼는데, 실러가 남긴 시에 베토벤이 선율을 붙인 것이다. 이는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로 제목을 붙인 것으로서, 이 가사에서 곡의 주제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 몇 줄 있다.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함께 환희의 송가를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정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들도 모두 부르자! 그러나 그 조차도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조용히 떠나가라.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으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선인이나 악인이나 장미 핀 오솔길을 환희 속에 걷는다. 환희는 우리들의 입맞춤과 포도주를 주며 죽음조차 빼앗아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이는 타인의 정을 조금이라도 얻은 모든 사람은 화합할 수 있으며, 인간의 잣대로 나눈 선인과 악인이라는 구분법도 화합의 길에선 무의미하며, 인류가 화합의 길로 나아갈 때, 하늘의 축복과도 같은 환희를 인류 전체가 쟁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이런 가사는 선율과 결합하며 베토벤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지혜와 철학보다 한수 위의 계시”처럼 청자의 마음에 각인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암울한 모습만 보면 전혀 이뤄질 것 같지 않은 환희 찬 인류의 모습이, 음악 속에서는 분명한 계시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가슴에 밝은 소망을 갖게 만들고, 그것을 조금씩 실현시킬 원동력을 준다.

 

■ 종교와 이념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세상

베토벤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교향곡에 사람 목소리가 들어가고, 그것이 인류 최초로 시도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크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에는 계몽주의가 유럽을 강타한 이후였으며, 이는 전통적 종교와 그에 따른 가치관들의 쇠퇴를 불러왔다. 베토벤이 자신의 선율과 더불어 전하는 저 가사는 마치, 곡의 과반을 차지하는 사람 목소리 없는 연주들마저도 모두 사람 목소리가 등장하는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가사 없는 음악이 주는 특별한 위로 또한 분명히 있다. 이 교향곡의 1악장, 2악장, 3악장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역시 이 곡의 가장 강렬한 감동의 순간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4악장이라 말하고 싶다. 베토벤은 이 곡을 통해서 특정 종교나 이념이 아닌,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종교와 이념의 벽을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서 우정과 우정으로 묶이는 그런 세상, 존 레논(John Lennon)이 “Imagine”을 통해 노래했던 그런 세상 말이다. 신의 진정한 모습은 어쩌면 종교나 이념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화합하는 모습 안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 4악장 “환희의 송가” 부분

음악은 오랜 시간 특정 종교나 국가 이념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19세기 낭만주의가 들어서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종교나 국가가 아닌, 개인의 기교나 감성을 뽐내기 위한 곡들이 이 무렵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전에 베토벤의 이런 파격적인 시도가 낭만주의로 가는 길을 마련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그럴 자격이 있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고, 그의 위대한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 바로 교향곡 9번 “합창”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 염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나는 아직 인류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벗을 생각이 없지만, 이런 내 시각이 나 자신을 지겹도록 괴롭힐 땐, 잠시 베토벤이 그린 환희에 찬 세계에 마음을 놓고, 다시 미래를 만들어갈 힘을 얻고 싶다. 실제로 느리긴 해도 조금씩 베토벤이 그리던 그런 세상이 다가오는 것 같다. 물론 인류는 여전히 여러 갈등을 겪고 있기에, 인류의 모습이 마냥 환희에 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계는 날이 갈수록 종교나 이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지 않은가. 결국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을 통해 인류에 내린 계시는 맞아떨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베토벤의 위대함을 느끼기엔, 그와 관련한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그는 뮤지션이므로, 그가 만든 음악을 책처럼 읽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마냥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든 선율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읽으려는 노력을 곁들여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위대한 정신은 뮤지션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의 귀감이 되기에 마땅하다. 그가 청력을 잃고 명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그 전부터 훨씬 높은 차원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놀라운 일화가 생긴 건, 어찌 보면 베토벤에겐 당연했으리라. 이런 베토벤의 위대한 정신을 음악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란 말인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한 올해엔 유독 그의 음악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음악은 모든 지혜와 철학보다 한수 위의 계시이다.” 그의 말은 옳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만든 음악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음악을 통해 보았던 환희에 찬 계시가 현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그 소망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라도, 베토벤의 위대한 정신을 생각하며 힘겹게나마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어본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이어진다.

 


트랙리스트

1.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 "Choral" -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 "Choral" - 2. Molto vivace

3.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 "Choral" - 3. Adagio molto e cantabile

4.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 "Choral" - Excerpt From 4th Movement - 4. Presto

5. Beethoven: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 "Choral" / 4. - "O Freunde nicht diese Töne" -

 


같이 보면 좋은 기사

▲ 명곡이 아닌 “명반”의 가치

 

 

▲ 음악적 “꼰대”의 탄생과 그 기원에 관하여

 

 

▲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 Antichrist Supersta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