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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이문세(Lee Moon-sae) - 休(휴) = 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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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49: 이문세(Lee Moon-sae) - 休(휴) = 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

 

겨울, 추위보다 시린 그리움의 계절

 

■ 겨울은 그리움의 계절

당신은 겨울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눈이 많이 내려서 눈사람 만들고 놀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을 테고, 방학을 맞이하여 친구들과 함께 스키를 즐기러 갈 계획을 짜는 대학생들도 있을 것이며, 크리스마스에 연인 혹은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겨울은 참 즐거운 계절이다. 그런데 실은 겨울이란 그렇게 유쾌한 계절이 아니다. 봄은 생명의 계절, 여름은 성장의 계절,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흔히들 말하지 않던가. 그런데 겨울은? 결실이 끝나고 그것들을 모두 거둔 다음에는 뭐가 남을까.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 허무의 계절이다. 실제로 사계절 중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계절이기도 하고.

 

옆에 연인과 한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연인의 손을 잡으며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겐 시린 바깥 공기와 대비되는 연인의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감미로우리라. 그들에겐 겨울이 그토록 따스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리라. 마치 설원의 새하얀 풍경처럼.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떠나보낸 고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겐 겨울이 어떻게 느껴질까.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추위는 내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만든다. 움츠러든 마음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끝도 없이 불러온다. 그럴 때 맞이하는 눈 내리는 풍경은 마음에 떠오르는 시린 그리움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겨울은 고독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 춥고 외로운 계절을 어떻게들 견디고 계시는가. 외로운 자들에겐 음악만큼 좋은 친구가 없을 것이다. 여기, 겨울의 추위처럼 시린 그리움을 노래하는 음반이 있다. 1999년에 발표된 작품, 이문세 정규 12집 “休(휴) = 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이다.

 

 

▲ 작곡가 이영훈

■ 어느새 불혹을 맞이한 시대의 아이콘

80년대 후반, 이문세는 청춘들의 대변자였다. 그가 부르는 젊고 세련된 감각의 노래들은 해외 팝 음악 위주였던 당시 국내 음악시장을 뒤집었다. 나 또한 이 시절에 활동하던 이문세의 노래들로 처음 그를 알았으며, 이문세와 동시대를 지낸 사람이든 요즘 젊은이든 간에, 이문세라고 하면 가장 먼저 80년대 후반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풍의 중심에는 작곡가 “이영훈”이 있었다. 가수 이문세의 인기는 그의 정규 3집 앨범에 “난 아직 모르잖아요”, “빗속에서”, “소녀” 이 세 노래가 실리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저 세 노래의 작곡가가 바로 이영훈이며, 다음 정규앨범 4집에선 9곡 전곡을 이영훈의 곡들로 채우게 된다. 그 다음 정규앨범 5집, 6집, 7집까지도 그러했다. 이 시절 히트곡의 명단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진다. “사랑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광화문 연가”, “붉은 노을” 등등 세는 게 벅찰 정도.

 

하지만 91년에 발표한 노래 “옛사랑” 이후로 이문세는 당분간 딱히 내세울 만한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8집에서 이영훈의 곡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95년 발표한 9집에서 다시 이영훈과 만나 전처럼 앨범의 곡을 모두 그의 곡으로 채웠지만, 이마저도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10집에선 다시 이영훈이 앨범에서 완전히 빠지고 “조조할인”이라는 히트곡을 내놓게 되지만, 이영훈 없이 만든 또 하나의 앨범 11집에서는 이만큼 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문세의 인기는 저물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불혹을 맞이한 이문세는 다시 이영훈과 만나 정규 12집 “休(휴) = 사람과 나무 그리고 쉼”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 앨범을 들어보면, 이문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4집, 5집 당시의 음악 색깔이나 정서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구슬픈 멜로디를 잘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이영훈이었지만, 그 시절의 곡들보다 훨씬 체념의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고, 멜로디가 좀 밋밋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다양한 음악적 실험도 보이는데, 자극적인 파격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처음엔 요란한 브라스 연주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잔잔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흐르는 독특한 곡 구조를 채택한 1번 트랙 “애수”나, 조영남이 성악을 시도하며 이문세와 호흡을 맞추는 5번 트랙 “흐르는 강물처럼”이나, 한국 대중음악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안데스 뮤직의 색채가 느껴지는 8번 트랙 “로뎀나무 아래서”까지.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난해한 면도 있었다.

 

 

▲ 1번 트랙 “애수” 1999년 “이소라의 프로포즈” 라이브영상

■ 청자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가수 그리고 작곡가

그래서 이 앨범은 이문세의 히트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단번에 친해지기 어려운 앨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앨범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만 바꿔보면, 이 앨범의 진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앨범을 통해 이문세와 이영훈이 청자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탓에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보다는 오래도록 들어도 편안한 멜로디를 주로 채택한 것일 테고, 음악적 실험도 좀 더 고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리라. 이문세가 당시 유행이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로 이문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문세와 이영훈은 팬들 앞에 좀 더 깊고 완숙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문세도 99년 당시 이미 불혹을 맞이한 중년이 되었으니, 언제까지 트렌드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확실히 이 앨범은 깊고 완숙하다. 이 표현이 딱 맞는 거 같다. 이 앨범의 깊고 완숙한 멋을 가장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가사인데, 가사가 곡과 정말 잘 어울리면서도, 이 앨범의 주제와 색깔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멀지 않았던 날에, 그날도 오늘 같던 하늘. 함박눈 갑자기 내려 온 세상 덮어도, 이 세상 모든 게 따뜻했지. 이젠 모두 지나간 시절에, 아직도 그리운 그 모습. 따스하던 너의 손 내음이 그리우면, 가끔씩 빈손을 바라보네. 가끔씩 빈손을 맡아보네.”

 

1번 트랙 “애수”의 가사다. 짙은 그리움을 표현하는 가사와 그것을 읊조리는 보컬, 그 사이로 요란한 브라스 연주가 이들을 비웃듯 끼어든다. 왠지 나이가 들만큼 들었음에도 아직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며 청승 떠는 모습을 풍자하는 것 같다. 남들 보기에 우스워 보일 만큼 청승을 떨면서도 그 모습을 끝내 버리지 못한 한 인간의 처량함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날, 연인과 함께 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은 아름답기만 했고, 연인이 있었기에 겨울마저 따스했건만, 이제 그 사람은 떠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 내리는 하늘 아래 벌벌 떨며,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맡아보며 청승 떠는 것뿐이다.

 

 

▲ 3번 트랙 “슬픈 사랑의 노래” 2020년 “유희열의 스케치북” 라이브영상

이 앨범은 총 수록곡이 12곡인데, 이 중 마지막 두 트랙은 가사 없는 연주곡이고, 가사가 존재하는 곡은 10곡이다. 그런데 10곡 중 절반에 해당하는 5곡에서 눈(雪)이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특히 1번 트랙부터 4번 트랙까지 4곡 연속으로 등장하며, 이 앨범의 중심이 눈과 겨울이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다. 2번 트랙 “그해 겨울”에서는 제목부터 “겨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겨울의 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1번 트랙은 화자의 청승을 조금 풍자하는 느낌이었다면, 2번 트랙은 풍자를 완전히 뺀 담백한 연주로 화자의 비참한 심정을 드러낸다.

 

“슬프게 살다보면 슬픈 것도 모르게 되는지, 이젠 혼자 있어 외로움도 느끼질 않아. 그렇게 한 세월을 사랑했는데 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픔도 못 느낄 정도로 슬픔을 오래 앓아왔다고 고백하면서도, 끝내 지난 인연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처연함을 드러낸다. 그리움은 살에 촘촘히 스며드는 추위보다도 시리게 가슴을 울린다. 대중을 상대로 발표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고 비관적인 가사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보면, 이 앨범이 이문세와 이영훈 입장에서 대중성보다도 작품성을 더 우선시 한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2번 트랙의 짙은 그리움은 연인과 헤어지던 그 때 당시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불러오는 3번 트랙 “슬픈 사랑의 노래”로 이어진다. 2번 트랙이 담백하고 잔잔한 멜로디로 연인과 헤어진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시절을 묘사했다면, 3번 트랙은 이문세와 “이소라”의 듀엣으로 격정적인 멜로디라인을 전개하며 이별 당시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 시린 그리움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나고

이 앨범은 그리움에서 오는 아픔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남겨두면서도 그 안에서 잔잔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전한다. 그 희망의 메시지가 노골적이지도 않고 은근해서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날 모두 지나가버린 지금은, 하얗게 덮여가는 세상 같이, 살아있다 하여도, 살아가는 동안에, 변하지 않았던 건 나의 마음 속 안에. 그래요. 그대 모습은 어릴 적 나의 소망과 같이, 변하지 않은 그대로 흰 눈에 덮여가요.”

 

7번 트랙 “눈 나리던 날”의 가사 한 부분이다. 이젠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을 변하지 않는 모습 그대로 간직할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이 노래는 도입부가 인상적인데, 밝은 음색을 드러내는 건반 연주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며든다. 곡 제목과 함께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눈이 잔뜩 쌓인 곳에서 이리저리 뛰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 건반 연주와 아이들 소리가 뒤로 물러나면, 담백한 기타 연주와 함께 이문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지난 인연의 모습을 그린다. 그 사이로 조금씩 건반 연주가 끼어들고, 곡이 점점 고조되면서, 곡 구조에 역동성이 더해진다.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해둔 그 사람의 모습이 그 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벅찬 감동을 표현하는 것 같다. 강렬한 록 연주로 밝고 힘찬 분위기를 연출한 9번 트랙 “유럽이나 그대 어디든지”이나, 연인과의 좋은 시절을 회상하듯 밝고 잔잔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10번 트랙 “약속”도 눈여겨볼만하다.

 

 

▲ 7번 트랙 “눈 나리던 날”

사람들은 내 나이를 알면 아직 한참 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음반 수집을 10년 정도 하다 보니, 그 중에 어릴 때보다 나이 들어서 훨씬 좋아하게 된 뮤지션이나 음반이 있다. 이 음반이 딱 거기에 해당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이문세의 앨범 중에서도 4집과 5집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 앨범을 가장 많이 듣는다. 어릴 땐 이 앨범의 수록곡 몇몇만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의 겨울에 점점 가까워지는데, 그걸 느낄 때마다 위로를 갈망하게 된다. 그럴 땐 내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지만, 어쩔 땐 전혀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생기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속이 풀리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땐 음악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다. 인생의 겨울이 가까워짐을 느끼는 순간마다 이 앨범이 잔잔한 위로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좋은 음악 덕분에 이번 겨울도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트랙리스트

1. 애수

2. 그해 겨울

3. 슬픈 사랑의 노래 (Duet with 이소라)

4. Crystal

5. 흐르는 강물처럼 (Duet with 조영남)

6. 아주 멀리 가세요

7. 눈 나리던 날

8. 로뎀나무 아래서

9. 유럽이나 그대 어디든지

10. 약속

11. 아주 멀지 않았던 그 날 (Trumpet Solo)

12.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 (이영훈 소품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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