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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이센스(E SENS) - The Anecdote

 

 

인생명반 에세이 43: 이센스(E SENS) - The Anecdote

 

[ Cash, Fame, Fake, Bitches를 건너 REAL을 찾아 방황하는 영혼 ]

 

 

쇼미더머니를 거부한 남자

 

TV 방송국 엠넷(Mnet)”에서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2012년에 첫 방송을 탄 이후로, 힙합(Hip Hop)은 완전히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올라섰다.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곡 중에 힙합의 비중이 크게 늘었고, 이제 랩만 해도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중에도 이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심야와 손대현(Kim Ximya X D. Sanders)”2017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에 공개한 노래 “Manual”에서는 이런 냉소를 내뿜는다.

 

아직도 힙합이 유행인 줄 아는 병신들아 정신 좀 차려, 지금 가장 뜨거운 건 랩이 아니라 SHOW ME THE MONEY.”

 

앞에서 음원 차트에 랩의 비중, 랩 스타 등을 이야기 했지만, 이상하게도 쇼미더머니에 나간 음원들 위주로 차트에 나타나고, 지금 유명한 래퍼 중 과반은 쇼미더머니에 나간 래퍼들이다.

 

쇼미더머니이 얼마나 욕망에 가득 찬 제목이란 말인가. 본토 힙합 특유의 솔직함을 한 문장으로 정의해버리다니. , 우리 중에 돈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 아니던가. 음악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있는 게 바로 돈이지 않던가. “쇼미더머니는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돈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쇼미더머니의 새로운 시즌이 방영할 무렵, 뉴스 연예란은 모두 쇼미더머니 이야기로 가득하고, 그에 따라 방송국은 광고료를 비싸게 받아먹을 수 있다음원으로 벌어들인 부가수익이나, 쇼미더머니 이름을 걸고 엠넷에서 개최하는 공연은 매번 만석을 자랑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그야말로 한국 힙합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며, 한국 힙합에서 소위 잘나가는 래퍼가 되기 위해선 필수 등용문이 된 셈인데, 이걸 거부한 래퍼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센스(E SENS)” 쇼미더머니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물론 그는 이미 최정상급 래퍼라서 여유가 충분하기 때문에 거절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돈이란 누구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않은가. 아무리 많아도 더 가지고 싶은 게 돈인데, 그런데도 그는 쇼미더머니 출연제의를 거절한 것이었다.

 

 

▲  힙합 전문 웹진 “HIPHOPPLAYA”의 동영상 콘텐츠 “내일의숙취”. 밑으로 이어질 글에 출처가 되는 영상이다.   이 영상은 “쇼미더머니” 이야기뿐 아니라, 수감 생활, 1집 제작 비화, 2집 이야기 등 이센스에 대해 여러 가지를 깊이 알 수 있는 영상이다.

이센스, 그도 처음엔 쇼미더머니 출연제의가 솔깃했다고 한다. 쇼미더머니 시즌 1에선 자신이 동경했던 한국 1세대 래퍼들의 문화를 약간 희화화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목은 일단 마음에 퍽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즌 2에서 4분 내내 오로지 랩만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좋은 인상이 더 강해졌다고 밝혔다. 그래서 시즌 3 제작에 맞춰 제작진으로부터 출연제의를 받았는데, 이센스는 제작진들에게 시즌 2에서 보여줬던 그 좋은 모습을 충분히 반영한다면 그 땐 출연하겠다고 밝히고, 한 시즌을 더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시즌 3를 보니, 자신이 제작진에게 말한 것들이 전혀 반영 안 된 걸 보고, 앞으로도 계속 쇼미더머니엔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밝혔다. 그는 결정적으로 그곳에 안 나가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나에 대한) 무슨 편견이 작용될지가 너무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쓰이고 내 인생이 소비된다? 나는 랩을 처음 시작한 2001년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그렇게 소비하기 싫어요. (내 인생은) 그 정도의 편집에 쓰일 인생보다 가치가 있어요.”

 

 

늘 내 귀에, 내 인생에 맴돌던 이름

 

이센스, 그는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부터, 줄곧 내 귀에 맴돌던 이름이었다. 비록, 그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일단 내가 경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땐, 한참 그가 속해있던 랩 듀오 슈프림팀이 최정상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 인기는 내 20대 초반 내내 이어졌다. 프로듀서 프라이머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라는 노래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스물셋 군대에 들어갔을 무렵에, 내 동기가 그 노래를 워낙 좋아해서 TV로 계속 틀던 때도 있었고. 그가 마약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고, 수많은 언론과 래퍼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것도 기억한다.

 

2018년 국내 최대 음원 서비스 멜론을 통해 발표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 그의 이름이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보고 기겁했던 일도 기억난다. 47명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음악 지성들이 모여, 반세기 넘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총망라하는 리스트에, 그것도 힙합 음반만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발표한 지 겨우 3년이 지난 음반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악할 일인가. 이것은 한국 힙합에서 이센스라는 이름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사건이었다. 물론, 안 들어볼 수 없었다. 한 번 들어보긴 했는데, 그 땐 아직 힙합을 유희로만 즐기던 시절이라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그 이후로도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대구에서 살기 시작한 후로, 대구에서 처음 음악을 시작한 이센스의 이야기가 대구의 전설처럼 공기를 떠돌아다녔고, 나랑 대구에서 만나 친해진 형 한 명은 술자리에서 갑자기 힙합 얘기가 나왔을 때, 한국 힙합 원톱 래퍼로 망설임 없이 이센스를 뽑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센스라는 이름이 내 귀에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때는, 래퍼 탐쓴을 만나 인터뷰를 했을 때였다. 나는 그의 앨범을 통해, 힙합의 맥락과 깊은 매력을 깨달아가고 있었는데, 그런 탐쓴도 나와 인터뷰를 하며, 은근하게 이센스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니, 내 마음이 끓는점에 이른 물 같았다. 나는 그 때 듣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해 치워버렸던 “The Anecdote” 앨범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힙합의 맥락을 깨닫고 나서 다시 들어보니, 첫 트랙부터 내 가슴을 깊이 관통하는 게 느껴졌다. 과연 나온 지 3년 만에 “100대 명반한 자리를 차지할 무시무시한 명반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실은 “100대 명반이란 수식이 오히려 이 앨범의 본질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앨범 안에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쇼미더머니가 재밌는 이유

 

힙합의 매력을 가장 깊이 깨닫는 방법은, 힙합의 맥락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힙합은 대중음악의 다른 그 어떤 장르들보다도 맥락이 중요하다. 힙합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힙합이라는 음악 양식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랩을 뱉는 래퍼가 어떤 캐릭터인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솔직히 힙합을 음악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쉽지 않은가. 일정하게 반복되는 비트에 그냥, 랩을 얻은 게 전부다. 이 비트 안에는 멜로디도 별로 없다. 곡 구조도 벌스(Verse), (Hook), 벌스, ,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반복될 뿐이다. 어떤 이는 이런 지나친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힙합을 재미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힙합이 어렵다는 건 음악적인 요소 때문에 그런 건 결코 아닌 셈이다. 그냥 말을 빨리해서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 외엔 없을 텐데, 랩을 빨리해도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래퍼들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이니, 이것도 힙합이라는 음악을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요소는 아닌 셈.

 

 

▲  “김심야와 손대현”의 노래 “Manual”

그럼, 힙합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여기서 래퍼의 캐릭터가 부각된다. 래퍼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면 힙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힙합은 대중음악의 그 어떤 장르보다도 가사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물론 가사 없는 힙합을 전문으로 하는 아티스트도 소수 있지만, 힙합이라면 대게 가사가 중요하다. 래퍼가 가사를 뱉는 스타일을 플로우(Flow)”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힙합의 음악적 요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훌륭한 플로우란, 가사와 잘 어울리는 플로우를 의미한다. , 랩을 뱉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면, 저 래퍼가 왜 저런 목소리로 랩을 하고, 왜 저런 말투로 랩을 하고, 왜 저런 가사들을 뱉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니, 여기서 힙합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긴다. 비트가 아무리 좋아봐야 래퍼의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면, 비트만 귀에 맴돌 뿐, 랩이 가슴에 깊게 파고들 수 없다. 결국 힙합에 있어서 비트 또한, 플로우와 마찬가지로 래퍼가 뱉는 가사에 힘을 실어주는 장치로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쇼미더머니가 재밌는 이유, 그리고 쇼미더머니에 나오지 않는 래퍼가 인기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쇼미더머니는 방송이 진행되며, 제작진 측에서 래퍼들의 캐릭터를 확실히 잡고, 자기들이 잡은 각 래퍼들의 캐릭터를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온갖 노력을 쏟는다. 그러니 시청자들은 그 방송을 통해 힙합의 매력을 더욱 쉽게 알고 거기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잡음이 많기는 하지만. 그런데 쇼미더머니에 나오지 않는 래퍼들은 방송처럼 자극적으로 캐릭터를 잡아줄 존재가 없으니, 당연히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래퍼들보다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쇼미더머니에 나오지 않은 래퍼들은 인기가 덜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할이기도 하고, 지위이기도 하다. , 래퍼의 캐릭터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래퍼의 성격뿐만 아니라, 힙합 씬 내에서의 역할과 위상까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센스가 이야기하는 REAL

 

래퍼는 연기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물론 랩에는 어느 정도 연기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랩의 가사는 실제 본인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힙합의 암묵적 룰이다. 래퍼가 뱉는 이야기들은 모두 래퍼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둬야하며, 픽션을 늘어놓는 랩이라도 그것이 래퍼의 캐릭터와 잘 어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FAKE”로 낙인 찍혀 추방당하는 게 이 바닥 생리다. , 힙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고, 그 맥락을 잘 따르기 위해선 자신이 “REAL”임을 증명하는 게 가장 중요한 셈이다.

 

 

▲ 1번 트랙 “주사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센스의 첫 번째 정규앨범 “The Anecdote”는 이센스 본인이 “REAL”임을 훌륭하게 증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힙합이야말로 정규앨범이라는 양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래퍼에게 있어 정규앨범이란 단순히 음악 모음집이 아닌 자서전과 다름없을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정규앨범을 듣지 않는 전 세계 청자들의 요즘 추세와는 별개로 말이다. 이 앨범이 훌륭한 이유는 첫 트랙 주사위부터 쉽게 알 수 있다.

 

야 돈 많고 잘나가면 장땡이야. 네가 뭘 하든 굶으면 의미 없어. 야 다 주사위 게임이야. 그 다음 바닥에 처박던지 아님 위로 던져. 아직도 돌고 있어. 아직도 돌고 있어.”

 

이센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가사를 들으면, 그냥 래퍼가 좀 철학적인 얘기하네.” 이렇게 생각하고 끝나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센스가 이미 대한민국에서 최정상 래퍼이며, 마약 사건 하나로 순식간에 추락해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이 앨범이 나왔다는 걸 알면, 과연 저 가사가 그냥 철학이라는 말로 퉁치고 넘겨버릴 수 있는 가사로 느껴질까? 저 가사를 뱉는 조소 섞인 이센스의 플로우는 또 어떠한가. 저 가사는 그저 사상이나 태도가 아닌, 이센스 그 자체인 셈이다. 이센스의 랩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이센스의 REAL을 증명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전부가 눈에 띄는 놈 못 잡아먹어서 안달. 그러면서 평범하단 소린 또 듣기 싫단다. 그래서 찾아다닌다는 게 고작 유행? 제일 촌스러운 짓들 보고 엄지 드네. 이 바닥 저 바닥 대장들 반 이상이 copycat. Copycat들 카피해서 얻어낸 그 자리 제대로 밀어보려는 게 내 일이고 취미고. 나더러 너는 뭐가 잘났냐고? 넌 이미 졌어. 그 꼴들에 질리는 중.”

 

2번 트랙 “A-G-E”의 이런 가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역시, 랩으로 정상에 한 번 올라선 사람이 이런 말을 뱉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도 아니고 커리어도 제대로 안 풀리는 사람이 이런 말을 뱉으면, 그저 열등감에 지껄이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반박을 무수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센스는 넌 이미 졌어.”라고 선언한다. 왜냐면, 그는 최정상에 가 봤으니까. 아무도 그 앞에서 토를 달 수 없으니까. 여기서 뿜어지는 이센스의 거만한 플로우는 듣는 이를 압도한다.

 

 

▲ 이센스

  

자기 자랑 대신 자신의 가장 내밀한 면을 꺼내다

 

무엇보다 이 앨범이 가장 주목 받는 이유는, 돈 자랑과 랩 스킬 과시에 눈이 먼 2015년 당시 한국 힙합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센스는 이 앨범 3번 트랙 “Writer's Block”부터 자신의 치부를 조심스레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작사가라고 자랑해도 모자랄 지경에, 가사가 잘 안 써진다고 푸념하는 노래를 내놓다니. 이미 최정상에 올라선 래퍼의 여유일까? 아니, 이게 여유가 아니라는 건, 가사를 유심히 들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1번 트랙에서 보여준 조소 섞인 플로우나, 2번 트랙에서 보여준 거만한 플로우와는 달리, 이번 트랙에선 꽤 차분해진 플로우를 보여주는데, 이 또한 이런 고백이 단순한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진솔한 고백임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

 

4번 트랙 “Next Level”은 이센스의 여유로운 플로우가 흐르는 가운데, 비트가 긴박한 기운을 내뿜으며 대비를 이룬다. 이 노래를 얼핏 들으면, 자신이 성공하는 과정을 차례대로 단순하게 그려내는 것 같지만, 더욱 긴박해진 비트와 함께 절정에서 전달하는 가사는, 그의 이런 길이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가라사대 계약 후 와해. 그러고 타일 뮤직 계약 후 부푼 맘으로 상경. 남의 집에 붙어살며 꿈에 가까워진다 싶었지. 근데 몇 주 만에 계약금 50 쓰고 쪼들리기 시작하네? 회사 빠그라지고, 난 방세 밀려 노가다. 노 저을 준비는 됐는데 물이 안 들어오잖아? 한 달에 열흘 용역, 보름 작업, 5일 술판. 똥쫀심에 현실은 개털인 내 음악.”

 

자신이 노가다를 했었다는 것도 모자라, 노가다를 얼마나 많이 했고,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게으름도 피웠음을 고백하는 모습은, 솔직한 걸 넘어서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다. 남들에게 멋진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 래퍼인데, 왜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까지 할까. 사실 이런 처량한 고백은 패기 넘치게 학교 관두고 한 달 만에 폐인 됐지.”라고 말하는 첫 구절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구질구질한 고백들을 거쳐,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비보이 뮤지컬, 한 달 공연에 월급 삼백. 근데 그게 터진 거지. 홍대의 매 주말엔 우리 이름. 첫 단독 공연, 관객 1200. 와우!”로 끝나며 해피엔딩이 됐지만, 다음 5번 트랙 삐끗의 비트가 흐르기 시작하며 불길한 기운은 다시 다가온다.

 

 

▲  5번 트랙 “삐끗”

삐끗은 돈, 명예, 섹스까지 모두 얻은 이센스가 이걸로도 뭔가 모자라다는 듯 불평하는 내용이다. 그토록 최정상을 갈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와보니 이곳은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기 바쁘고, 온갖 더러운 행태들이 난무한다.

 

한탕 쳐. 전부 다 주사위 게임이야. 한 만큼은 돌아온다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 몇 군데만 봐도 설명 안 되잖아.”

 

1번 트랙에서 말했듯이 모든 게 주사위 게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상황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노력보다 운이 중요한 그 주사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센스는 자신이 얻은 돈, 명예, 섹스가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느리고 끈적끈적하게 부유하는 비트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계속 허무해져가는 이센스의 마음을 대변한다.

 

계약서가 필요해. 계약금 대충 돈 1000. 방세내고 나면 거지. 술자리도 못 껴. 예술은 개뿔 차비도 없으면 뭔 의미냐. 의미가 있다면 그게 대체 뭔데, 의미가? 소름 돋게 헛물켜는 말만 하는 놈들, 여자 꼬실때나 침 튀기면서 얘기하는 곤조, 고집, 아주 좆지랄들하고 있네, 생존이 1순위야 오로지. 이 말 했더니 대부분 다 돈은 중요치 않은 거라 했지. 난 놀라며 그 말에 꽂혔지만 알고 보니 십중팔구 다 살만한 집에서 나고 자라 미국 Ghetto 흉내 낸 방구석 래퍼.”

 

여기선 자신만큼 치열하게 가난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해 위선 떨며 얘기하는 모습에 치를 떠는 이센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최정상에 올라서고 보니, 이런 위선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조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번 트랙 “10.18.14.”는 이센스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했던 선배 래퍼의 위선을 비꼬는 내용으로, 5번 트랙이 전하는 메시지의 연장이자, 이 바닥의 위선을 향해 날리는 조소를 극대화시킨 트랙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근본을 찾다

 

이센스의 고백은 더욱 내밀한 곳으로 침투한다. 앨범과 동명곡인 7번 트랙 “The Anecdote”진술이라는 건조한 뜻과는 다르게, 깊은 애수를 담은 곡이다. 국민학교 시절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곡이다. 무겁고 어두운 비트에도 꽤 담담하게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에 자신과 가족에게 벌어진 상황을 랩으로 진술하지만, 그건 벌스에서만 그렇고, 훅에서는 눌러왔던 애수가 조금씩 새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다. 다시 벌스가 시작되며 담담한 진술로 애수를 다시 누르지만, 다시 시작되는 훅에서 애수가 다시 새어나온다. 이런 이센스의 모습에서 그의 애수가 꽤 오래된 버릇 같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8번 트랙 “Back In Time” 뮤직비디오.

난 아들. 아빠의 아들. 그날이 아니었다면 내 삶은 지금하고 달랐을까. 성격도 지금 나 같을까. 난 아들. 자랑스럽게 내 길을 걸어왔네. 내 길을 걸어가네. 내 길을 걸어가네.”

 

이렇게 글만 보면, 자기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그 성찰을 거쳐 자랑스러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훅을 읊조리는 이센스의 플로우와 함께 들으면, 터져 나오려는 애수를 억지로 누르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벌스에선 결이 좀 다르지만, 훅에서는 비트가 이센스의 플로우와 달라붙듯 흘러간다. 마음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애수를 대변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고, 힙합의 힘이며, 이센스가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는 방법인 것이다.

 

7번 트랙의 이런 내밀한 고백은, 5번 트랙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6번 트랙에서 실컷 조소하던 이센스의 뒤틀린 마음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분명 불쾌한 경험일 테지만,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성찰하려면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센스가 힙합의 길을 걷게 된 근본적 이유는 결국, 그렇게 아픈 기억을 들춰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8번 트랙 “Back In Time”은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밝고 희망적인 트랙일 것이다. 여기선 그런 아픈 기억이 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힘을 고향에서 얻었노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나아가고 보니, 세상은 여전히 조소할 것으로 가득했다. 이센스는 9번 트랙 “Tick Tock”에서 다시 세상을 향해 날선 비판을 가한다. 이 글 초반에 언급한 김심야(Kim Ximya)”가 이 곡에 참여한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김심야의 냉소적인 플로우는 이센스의 조소와 꽤 잘 어울리며 실컷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김심야와 함께 실컷 조소하던 이센스는 조금 지쳤는지, 10번 트랙 “Unknown Verses”에서 다시 자신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자신만의 가장 깊은 어둠에서 그는 다시 성찰하고 의심하며 REAL을 찾아 방황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여기까지 온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은 진정으로 어디로 가려 하는가.

 

 

REAL을 찾아 방황을 멈추지 않는 영혼

 

다시 쇼미더머니 얘기를 해보자. 이센스가 쇼미더머니 출연을 거부한 것도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REAL을 찾아 헤매고, FAKE를 향해 조소를 날릴 수밖에 없는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방송을 통해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FAKE가 더 섞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방송이 아닌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알리는 것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방송 때문에 자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FAKE처럼 보인다면, 자신의 삶이 많이 알려진들 그걸 REAL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 더 어려운 길이지만, 쇼미더머니에 안 나가는 걸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높고 험한 길이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에서 언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는 어려운 길을 택한 만큼,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REAL임을 탁월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7번 트랙 “The Anecdote”

그의 신보인 정규 2집 “이방인”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The Anecdote” 앨범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방인”은 분명 “The Anecdote”보다도 훨씬 여유롭고 풍족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앨범이다. 음악도 분명 “The Anecdote” 못지않게 잘 뽑혔다. “The Anecdote”의 제작 비화를 들어보니, 경악할 정도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앨범이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이 명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의 이센스가 그 정도로 치열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치열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리라. 어쩌면 조악하고 급박하게 만들었기에, 그 치열함이 훨씬 날것의 REAL로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 앨범의 표지가 손수건인 것은 이 앨범이 전하는 메시지를 정면으로 관통한다. 손수건에 묻은 땀과 눈물만큼 진실한 것은 없을 테니. 그의 구질구질한 고백들마저도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건, 그가 REAL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토록 치열하기 때문이리라. 힙합의 언어가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책상의 연구에서 얻어낸 언어가 아닌, 경험의 치열함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날것 그대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REAL이 되고 싶은 아티스트, 그가 바로 이센스이며, 그것이 그가 한국 힙합 원톱 래퍼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힙합의 근본은 Skill도 아니고 Swag도 아니고 Flex도 아닌 REAL이니까.

 


트랙리스트

 

1. 주사위

2. A-G-E

3. Writer's Block

4. Next Level

5. 삐끗

6. 10.18.14.

7. The Anecdote

8. Back In Time

9. Tick Tock (feat. Kim Ximya)

10. Unknown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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