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45: 멘 아이 트러스트(Men I Trust) - Oncle Jazz
음악은 그리움을 닮아 흐린 듯 포근하게 다가온다
■ 그리움의 시대
2010년대 후반, 세계를 뒤덮은 단 한 가지 문화 키워드를 뽑으라면 “뉴트로(New-tro)”를 뽑을 수 있겠다. 지나간 시절을 요즘 감성에 맞게 재해석한다는 뜻이다. 넷플릭스(Netflix)에서는 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호러 SF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 3(Stranger Things Season 3)”가 현재까지도 인기리에 방영 중이고, 거장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2019년 개봉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는 1969년을 소재로 했다. 2018년 옆 나라의 닌텐도는 90년대를 휩쓴 가정용 게임기 “슈퍼 패미컴(スーパーファミコン)”을 손바닥 크기로 줄여 재출시하며 400만대 판매를 기록했다.
더군다나 LP 열풍은 이미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2000년대가 되면서 서서히 판매중단이 벌어지던 “카세트테이프”가 부활하고 있다.(링크) 2001년에 태어난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가 2019년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앨범을 CD와 LP뿐 아니라, 카세트테이프로도 낸 것을 보면, 카세트테이프가 새로운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올해, 블루투스 기능을 탑재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링크)까지 등장했다.
최근 세계 문화 흐름에 따라, 자신들의 음반을 CD, LP, 카세트테이프까지 내놓은 캐나다 밴드가 있다. 이들은 “멘 아이 트러스트(Men I Trust)”다. 이들은 “칠웨이브(Chillwave)”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팀으로 유명하다. 칠웨이브는 2010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떠오른 장르인데, 극도로 느린 곡 진행 혹은 평탄한 사운드를 내세우며, 중간에 일부러 음질을 일그러뜨린 사운드를 삽입해 로파이(Lo-fi) 느낌을 내며, 장르 이름처럼 말 그대로 청자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2010년대 들어서서 하이파이(Hi-fi)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데, 2010년대 들어서서 로파이를 내세운 음악이 유행하는 이런 세상의 모순이라니. 사람들은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게 싫은 걸까. 모든 것이 선명한 곳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고 느낀 걸까. 이제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예전보다 많아졌고, 이런 흐름에 따라 로파이 사운드가 유행하게 된 건 아닐까. 꿈을 꾸고 싶기에, 꿈을 꿀 때는 선명한 것보다는 흐린 것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사람들은 눈앞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언제나 그리워하는 건, 기억 속에 흐려지는 것들이다. 뉴트로, 로파이, 이 두 가지의 유행은 요즘 사람들이 그리움을 많이 앓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인문, 과학, 기술 등에서 많은 것을 이뤄냈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과거에 꿈꾸던 것만큼 아름다워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과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에, 그들은 과거의 흐려지는 모습 그대로 현재에 갖고 오는 것이다. 그것이 로파이 사운드의 매력이 아닐까.
■ 편안함의 24가지 색깔
사실 칠웨이브 음악을 떠올리면 그 분위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멘 아이 트러스트가 2019년 발표한 정규 3집 “Oncle Jazz”에선 자신들이 단순히 유행만 쫓는 밴드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들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흔한 칠웨이브 뮤지션들과는 다른 존재감을 과시했다. 칠웨이브 특유의 편안함은 그대로 들고 가되, 그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색깔을 뿜어내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24개 트랙 71분이라는 경악스러운 분량을 자랑하는 앨범이지만, 오히려 이마저도 짧게 느껴질 정도로 알찬 구성으로 청자를 맞이한다.
이들이 기획한 카세트테이프 음반이나 출연하는 뮤직비디오 등을 보면, 이들에겐 확실히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상이 돋보인다. 로파이 사운드와 뉴트로가 유행하는 요즘 흐름에, 이들만큼 탁월하게 선도하는 뮤지션이 또 있을까. 이들은 앨범의 시작부터 라디오에 대한 오마주를 배치한다. 라디오처럼 아나운서의 독백이 들리고, 명량하고 편안한 느낌의 시그널송이 울려 퍼진다. 이들은 마치 이 앨범을 하나의 라디오 방송처럼 꾸미고 싶었던 것 같다. 라디오 방송처럼 다양한 음악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사연이 있고, 사연에 따른 흐름이 있는 것처럼.
이 앨범의 곡들은 모두 개성이 넘치지만, 그 중에 귀에 잘 들어오는 트랙들을 몇 개 뽑아보자면, 디스코 리듬도 이토록 편안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4번 트랙 “Tailwhip”가 있고, 능글맞게 통통 튀는 베이스 기타 연주가 귀를 사로잡다가, 몽환적인 건반 소리에 눈 녹듯 스며드는 순간이 아름다운 7번 트랙 “Say Can You Hear”, 로파이 사운드가 곡의 분위기를 느리게 이끌고 가며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선사하는 10번 트랙 “Dorian”, 베이스 기타 슬랩 주법을 바탕으로 몽환적인 건반 소리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12번 트랙 “Slap Pie”, 일렉트릭기타 연주가 쫄깃쫄깃하게 울려 퍼지다 속삭이는 보컬과 결합하는 14번 트랙 “Seven”까지. 다양한 시도를 만날 수 있는 곡들로 가득하다. 중간 중간 보컬이 없는 순 연주곡을 끼워 넣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 것도 영리하다.
이 앨범이 71분이라는 긴 시간에도 질리지 않는 것은, 밴드가 다양한 시도를 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편안함을 최우선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편안함에도 여러 가지 색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편안함이란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이 편안함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도 편안함이 될 수 있고, 산책하는 길에 바라보는 맑고 푸른 하늘이 편안함이 될 수 있고, 퇴근길에 음악을 들으며 상념에 젖는 여유도 편안함이 될 수 있다. 이 앨범이 담아내는 편안함의 풍경은 24개의 트랙만큼 다양하다. 이토록 다양한 풍경을 전시하는데 편안함은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
■ 추억의 흐린 초상
앞서, 이 앨범을 라디오 같은 앨범이라고 말했다. 라디오가 어떤 매체인가. 책처럼 머리를 쓸 필요도 없고, TV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인터넷처럼 다양한 이미지가 전시되지도 않는다. 그저 소리로만 전달되는 매체며, 이 탓에 다른 매체에 비해 빈틈이 많이 느껴지고, 빈틈이 많이 느껴지는 만큼 내밀하고 편안한 매체다.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빈틈 사이로 서서히 추억의 초상들이 스며든다. 라디오는 빈틈이 많은 만큼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할 여지도 그만큼 크다. 라디오는 TV처럼 강요하지도 않고, 인터넷처럼 요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런 조용한 권유에 내 마음이 침잠하게 되는 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인 것만 같다.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고요한 풍경이 내 마음 속에 펼쳐지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고요한 풍경 속에 지난날 겪었던 애상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 애상들은 TV처럼 선명하지도 않고, 책처럼 상세하지도 않다. 그저 추억의 흐린 모습 그대로를 청자에게 들려주는 것 같다. 편안한 여유를 즐기려 무심코 틀었던 라디오에서, 왠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연을 접하는 것처럼, 이 앨범 속 몇몇 곡들은 그렇게 청자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편안하게 스며든다. 아팠던 기억들마저도 고요 속에 삼켜지는 것 같다.
6번 트랙 “Numb”는 로파이 사운드로 울려 퍼지는 건반과 묵묵히 걸어가는 베이스 기타의 조화가 아름다운 곡으로서, 그 위를 부유하듯 가볍게 읊조리는 보컬이 청자를 고요한 상념 속으로 초대한다. 비슷한 곡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음의 움직임이 살짝 더 통통 튀는 15번 트랙 “Show Me How”는 사랑 때문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도중에도 가끔씩 올라오는 불안을 껴안는 느낌이다. 18번 트랙 “Pierre”는 부드러운 기타 연주에 힘겨운 말을 뱉듯 읊조리는 보컬이, 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애수를 살며시 꺼내는 것 같다.
예전엔 괴로우면 적극적으로 괴로움을 내뱉는 곡들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엔 괴로움을 내뱉기보단 그저 혼자서 읊조리는 것 같은 고요한 곡들이 좀 더 끌린다. 그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음악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아, 그곳에서 현실에 없는 평화를 누리는 기분이다. “Oncle Jazz” 앨범은 요즘 내게 그런 기분을 가장 자주 선사해주는 앨범이다. 그런 의미에서 71분이라는 분량은 오히려 축복이다. 나는 유행이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세상 전체가 그리움을 앓고 있는 요즘인지라, 이런 유행이라면 환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좀 더 그리움을 많이 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 세상이 나와 같은 그리움을 앓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평화란 말인가. 그런 황홀한 평화 속에서 분명 “Oncle Jazz” 앨범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트랙리스트
1. Oncle Jazz
2. Norton Commander
3. Days Go By
4. Tailwhip
5. Found Me
6. Numb
7. Say Can You Hear
8. All Night
9. I Hope To Be Around
10. Dorian
11. Pines
12. Slap Pie
13. Fiero GT
14. Seven
15. Show Me How
16. Alright
17. You Deserve This
18. Pierre
19. Air
20. Porcelain
21. Poodle Of Mud
22. Something in water
23. Tailwhip Revisited
24. Poplar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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