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90: 멘 아이 트러스트(Men I Trust) - Untourable Album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이 나를 향해 부르는 세레나데
■ 추억은 언제나 현실보다 아련하다
아련하다. 이 말의 뜻을 아는가. 이 말의 뜻은 선명하지 않고 흐리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아련하게 사용한다. 사람들이 무언가 아련하다고 말할 땐, 그것이 추억에 관한 이야기일 때가 많다. 추억. 이렇게 부르면 기억과는 다른 것 같다. 기억과 추억, 이 두 가지는 뭐가 그렇게 다른 걸까. 추억은 아무래도 기억보다 깊은 느낌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보다 내게 깊이 스며든 과거. 그걸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른다. 사실 추억이라는 말도, 기억을 추적한다는 뜻으로서, 기억과는 확실히 다른 말이지만, 우리는 추억이라는 말을 기억보다 더 깊은 기억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한다.
추억은 언제나 현실보다 아련하다. 그런데 그 아련한 형상이 내 현실을 차지할 때가 있다. 그럴 땐 현실이 추억처럼 아련하게 변해간다. 선명하던 현실이 아련한 추억을 닮아 가면, 거기서 왠지 나 자신이 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깊은 것, 호수, 강, 바다, 깊은 것이라고 말하니 왠지 물이 떠오른다. 내 마음은 물이 된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내 의식은 태양이 되어, 내 마음 표면에 빛을 맺히게 한다. 내 마음에 윤슬이 빛난다.
나는 평소에 호수 구경하러 떠나는 걸 즐긴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곧 내 마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 마음과 풍경이 일치되는 순간을 즐긴다. 노을이 내려오고, 호수 위에 맺히는 윤슬을 바라보면, 내 마음도 그를 따라 같이 빛난다. 아련한 내 마음과 선명한 현실이 일치를 이룬다. 그렇게 현실은 아련해지고, 내 마음은 선명해진다. 현실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은 현실이 되는 순간. 현실이 추억이 되어가는 순간이다.
우리는 언제나 뭔가 확실한 걸 원한다. 확실히 보장된 미래가 있어야 우리는 편해질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나 미래가 확실히 보장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미래라는 건 언제나 지금 이 순간보다 아련하다. 가장 선명한 건 지금 이 순간인데, 우리는 언제나 미래가 선명하고 확실해지길 바랄 뿐이다. 확실한 미래를 쫓다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현실이 흐려진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서, 아련한 것을 사랑하면 어떨까. 무엇이든 가까운 건 선명하고 멀어지는 건 아련하다. 멀고 아련한 걸 사랑하면, 멀고 아련한 것이 곧 내가 된다. 내 안에 있는 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나는 멀고 아련한 걸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멀고 아련한 존재가 되어간다.
과거는 미래만큼 멀고 아련하다. 우리가 추억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아련하다는 말을 같이 떠올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뭘까. 과거는 우리가 경험했던 것이고, 미래는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는 차이다. 그런데, 같은 과거라도 그 과거를 내 몸으로 겪어본 적이 없다면, 그게 미래와 뭐가 다른 걸까. 어쩌면 미래가 과거보다 더 선명한 것 아닐까. 과거는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니까.
■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을 사랑할 때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을 노래하는 밴드가 있다. 멘 아이 트러스트, 캐나다 밴드로서 2019년 정규 3집 “Oncle Jazz” 앨범을 발표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들은 2021년 정규 4집 “Untourable Album”을 발표하며 화제를 이어갔다. “Oncle Jazz” 앨범은 24트랙 71분이라는 다른 앨범 두 배 되는 분량을 자랑했지만, “Untourable Album”은 13트랙 37분이라는 지난 앨범 분량의 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Untourable Album”에서 드러난 감성은 결코 지난 앨범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고 더 무거워졌다. 더 깊고 더 무거워서 지난 앨범에 비해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는 인상마저 받게 되지만, 이 앨범에 한 번이라도 깊이 빠지면, 지난 앨범보다 더욱 자주, 앨범 전체를 감상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 지난 앨범은 앨범 전체를 들어도 좋지만, 그래도 분량이 많아서 좋은 노래만 몇 개 뽑아서 듣게 되는 때가 많았는데, 이번에 소개할 “Untourable Album”은 어느 트랙을 빼고 듣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앨범 전체를 들을 때 매력이 훨씬 깊이 다가온다.
이들은 지난 앨범에서도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을 노래했다. 그런데 지난 앨범은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을 향해 노래하는 느낌이라면, “Untourable Album”에선 이제 자신들이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 그 자체가 된 느낌이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멀어지고 아련한 것들을 향한 세레나데를 실컷 부르던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따라 멀어지고 아련해졌다. 그렇게 이 밴드를 듣는 사람들도 같이, 자기 자신이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한다.
7번 트랙 “Serenade Of Water”라는 곡은 제목부터, 이 앨범 전체가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는지 잘 드러낸다. 세레나데. 이것은 본래 저녁에 부르는 사랑 고백 노래를 뜻하는데,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어스름이 하늘을 모두 덮어버린 저녁이 아닌, 이제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초저녁이 떠오른다. 해는 사람의 눈높이를 향해 내려오고, 연못에는 윤슬이 더욱 찬란히 빛나는 저녁의 시작. 해가 우리에게 멀어지며 햇빛은 아련해진다. 노을은 낮과 저녁의 경계라는 모호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앨범은 노을처럼 모든 모호한 것들을 껴안는다. 분명한 건 없기에, 모든 건 흐리게 보이고 아련하게 보인다.
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들은 과거로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련하게 멀어지는 과거를 노래하는 것이 이들의 미래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과거를 짓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보자. 우리는 미래를 만들며 살아가는 걸까, 과거를 만들며 살아가는 걸까. 미래는 우리 안에 남지 않는다. 우리 안에 남는 건 오직 과거뿐이다.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이 보이지만, 이미 다가온 미래는 미래가 아니다. 다가온 미래는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두 과거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로 만들어진 존재들인가. 우리가 과거로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과거가 곧 우리들인가.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시간이 흐를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걸 믿을 필요도 없이 그저 알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물속에 잠기는 느낌이다. 내가 마치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람도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 이 앨범 13번 트랙 제목이기도 하다. “Beluga(벨루가)”
■ 물과 함께 흐르는 시간
우리는 흔히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가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다가올 미래도 곧 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있다. 과거와 미래는 허상이라고 보면 허상일 것이고,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존재한다. 중요한 건, 과거든 미래든,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을 오래 바라보며 사랑하면, 내가 과거 그 자체가 되고, 내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물이 흐른다는 건 곧 시간이 흐른다는 증거다. 물은 땅에서 흐르지 않을 때도, 하늘을 향해 증발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물은 곧 시간이다. 이 앨범 6번 트랙 제목이 “Before Dawn”이고 8번 트랙 제목이 “5AM Waltz”라는 걸 보자. 그리고 그 사이에 낀 7번 트랙 제목을 다시 보자. 물이 흘러 시간이 되고 시간은 추억을 만든다. 우리 몸에도 물이 있다. 우리 몸에 흐르는 물, 피. 피가 흐르듯 추억이 흐른다. 추억이 우리 몸에 피를 이루면, 그렇게 우리는 추억의 힘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미래도 곧 과거고, 과거는 모두, 지금 이 순간 우리 몸속에 있으므로, 과거도 미래도 오직 지금 이 순간 현존할 뿐이다. 추억이 멀어지고 아련해진다고 느끼지만,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것들은 이미 내 몸을 이루고 있었다. 추억이 멀어지고 아련해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멀어지고 아련해진다. 나와 추억은 한 몸을 이룬다. 내가 사라진 그곳엔 추억만 남고, 추억은 세상이고 내가 곧 세상이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남는다. 세상이 곧 나니까.
물은 새를 닮았다. 물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물과 새가 닮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아니, 물도 하늘을 난다. 태양이 물을 부르면, 물도 하늘을 난다. 구름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물이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의 몸에도 피가 흐른다.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면, 땅에 붙은 세상과 멀어질 것 같지만, 어쩌면 새는 땅에 붙어있지 않아서 외로운 존재일 것이다. 2번 트랙 “Oh Dove”를 들으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느낌과 함께 왠지 모를 외로운 감정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본다. 물처럼 흘러가는 풍경들. 하늘은 구름과 노을이 섞여 보라색이 되어 간다. 보라색 하늘을 바라보며, 내 추억도 보라색으로 물든다. 키 큰 나무들 사이에 덤불들이 보인다.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존재. 덤불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낮아진다. 낮아지고 더 낮아지다가, 나는 깊어진다. 내가 깊어지니 내가 추억에 젖어 축축해지는 기분이다. 보라색 하늘에 조금씩 비가 내린다. 비는 세상을 적시고 내 마음도 적신다. 비는 눈물, 눈물은 슬픔. 비가 땅을 부드럽게 적시듯, 슬픔이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5번 트랙 “Tree Among Shrubs”를 듣고 있으면, 슬픔도 꽤 괜찮은 감정이라는 생각에 젖어든다. 왠지 슬픈데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다. 물 위에 빛나는 윤슬처럼.
트랙리스트
1. Organon
2. Oh Dove
3. Sugar
4. Sorbitol
5. Tree Among Shrubs
6. Before Dawn
7. Serenade Of Water
8. 5AM Waltz
9. Always Lone
10. Ante Meridiem
11. Lifelong Song
12. Shoulders
13. Belu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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