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87: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 Station to Station
신나고 짜릿하고 애절하게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
■ 그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던 걸까
“죽음에 대한 선동, 죽음의 공포라는 선동을 받고 오히려 죽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절대적 순간의 향락으로. 이는 사실 나치적인 담론입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일찌감치 자료도 다 나오지 않을 때부터 명민하게 지적했습니다. 나치의 본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고 자신의 죽음과 멸망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이지요. 아주 지당한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치가 목표로 했던 것,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사실 잘 모르지 않나요? 그건 자살입니다. 게다가 자신과 세계를 일격에 동시에 죽이는 것. 종말의 절대적 향락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인용한 책 제목과는 달리, 여기서 소개할 앨범은 전체가 기도로 가득 차 있다. 데이비드 보위 1976년 작, 10집 앨범 “Station to Station”에 관한 이야기다. 보위는 이 제목이 “십자가의 길(Station of the Cross)”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것을 앨범 제목으로 삼은 건, 여기 1번 트랙에 같은 제목의 노래가 실렸음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 앨범 전체가 십자가의 길이라고 밝히는 것과 같다. 십자가의 길, 이건 천주교에서 행하는 기도를 말하는데, 성당에서 정한 총 열네 개의 장소를 순회하며 기도하는 의식이다. “14처”라고 불리는 이 열네 개의 장소는 성당 내부에 작게 마련되어 있기도 하고, 등산로에 일정 거리를 배분하여 마련되어 있기도 하며, 그 길이와 형태는 다양하다. 즉 “Station to Station”은 십자가의 길에 마련된 각 처를 순회하는 모습을 묘사한 문장인 셈이다. 보위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 무엇을 기도했던 걸까.
보위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아보기 전에, 위에서 인용한 책이 왜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고 말했는지 들여다보자. 여기서 저자는 나치와 옴진리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세뇌하고 획일화시켜, 세계 공멸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여기서 저자는 세계 공멸을 위해 기도하는 그 손을 자르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그렇다면, 보위는 세계 공멸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을까. 그전에 나는 세계 공멸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을까.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 이런 느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내 안에 많이 쌓일 때,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전혀 들어주지 않는 이런 세상 따위 빨리 멸망하라고 빌게 된다. 빈다는 건 곧, 기도다. 나도 모르게, 나는 세계 공멸에 관한 기도를 했던 거다. 그것도 내 인생에 셀 수 없이 많이 해버렸다. “유쾌한 우주인의 인류멸망”이라는 노래가 틱톡, 릴스, 유튜브 숏츠 등, 여기저기 타고서 크게 유행한 걸 보면, 나만 이런 기도를 셀 수 없이 많이 했던 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소망은 초라해진다. 세계 공멸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나 혼자라도 죽겠다고. 그런데 왠지, 나 혼자 죽으려니 억울해서 못 죽겠다.
앞서 소개한 책의 저자도 같은 말을 한다. 파시즘과 사이비 종교를 이끄는 그들은 혼자 죽는 게 억울하기 때문에 공멸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세상은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분명하기에, 이런 세상에서 이어가는 삶이란 어차피 비참할 뿐이기에, 이렇게 된 이상 그 어떤 사악한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최대한 권력을 모아서, 세상을 공멸로 이끌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 세계 공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접하는 유명 연예인, 대기업 사장, 정치인 등을 보며, 저들이 가진 돈과 권력 반의 반 정도만 가져도, 평생 마약 따위 손대지 않고, 다른 그 어떤 범법도 저지르지 않고 건전하게 잘 살아갈 자신이 있다고, 감히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이 나라 북쪽에 붙은 저 괴뢰국의 지도자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찬다. 판다들이 많이 사는 이웃나라의 독재자도 그렇고, 지금도 전쟁을 멈출 줄 모르는 저 추운 나라의 독재자도 그렇고, 도대체 저들은 그토록 많은 걸 가졌으면서, 도대체 왜 저러고 사는 거냐며,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냐고 비난한다.
그런데, 그들이라고 우리 같은 생각을 안 했을까. 우리처럼 딱 저 정도만 가져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까? 그런데 그 ‘딱 저 정도’라는 걸 막상 가져보니, 마음이 달라졌던 거다. 그래서 ‘딱 저 정도’의 기준을 조금 더 넓힌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딱 저 정도’면 되겠지. 그런데 ‘딱 저 정도’를 또 가져보니, 또 기준이 넓어진다. 그렇게 조금 조금 넓어지고 넓어지면서 저런 괴물들이 되어버린 거다. 어느 순간 그들은 깨달았을 거다. 이런 세상 따위 그저 멸망시키는 게 낫겠다고. 나 혼자 죽는 거 억울하니, 다 같이 죽자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들이라고 유별나게 저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거다. 이웃나라 독재자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모습들이다. 안타깝게도, 보위 또한 저들처럼 공멸의 꿈을 꿨다. 게다가 자신이 가졌던 공멸의 꿈을 앨범으로 만들어 발표까지 했다! 그 앨범이 바로 여기서 소개할 “Station to Station”이다.
씬 화이트 듀크(The Thin White Duke), 이 앨범에서 보위가 내세운 페르소나의 이름이다. 그를 보면 보위가 이전에 대중 앞에 선보였던 페르소나들과는 꽤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유별나다는 뜻이 아니다. 이전보다 훨씬 평범해서, 오히려 튀는 느낌이다. 보위의 이전 페르소나들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는지 딱 알 것이다. 보위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페르소나들, 이를 테면,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알라딘 새인(Aladdin Sane), 핼로윈 잭(Halloween Jack) 등과 많이 다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과 닮았지만 사람은 아닌 모습을 하고 있어 독특한 느낌을 주는 페르소나들이었다. 이를 테면, 자연적으로 결코 나올 수 없는 새빨간 머리를 갖고 있다거나, 눈이 세 개라거나, 얼굴에 커다란 번개가 그려져 있다거나, 안대를 끼고 있다거나, 이런 식이다. 실제 설정도 외계인이거나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씬 화이트 듀크, 그는 원래 보위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권력자처럼 말끔한 인상을 주는 정장 차림에, 단정한 올백 머리를 하고 있는 것만 보인다. 정말 현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권력자의 모습, 딱 그런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음험한 야망을 품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보위는 이를 두고 이렇게 묘사했다.
“지극히 아리아 혈통의 파시스트, 진심 없이 낭만적이지만 새로운 낭만을 엄청 내뿜는 사람.
A very Aryan, fascist type; a would-be romantic with absolutely no emotion at all but who spouted a lot of neo-romance.”
보위는 분명 “Station to Station” 속 자신의 페르소나를 “파시스트”라고 묘사했다. 히틀러 같은 아리아 혈통을 가진 파시스트라고 말이다. 뭐, 여기까진 그저 페르소나의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보위가 여러 장소에서, 히틀러를 칭찬하는 망언을 내뱉어서 논란이 되었다는 거다. 이쯤 되면, 보위가 페르소나와 진짜 자신을 헷갈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는 1975년에 카메론 크로우 기자와 히틀러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히틀러를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불렀으며, 히틀러의 연설장은 “로큰롤 콘서트”라고 말한 게 전해진다. 특히 논란의 정점이 되었던 건 이 발언이었는데, 어떤 발언이었는지 살펴보자. 1976년 2월에 보위가 했던 인터뷰를 인용했다.
“제 생각에 저는 히틀러 역할을 끝내주게 잘했을 것 같아요. 훌륭한 독재자가 되었을 겁니다. 아주 기이하고 좀 정신 나간 독재자요.”
■ 씬 화이트 듀크,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는 괴물
여기서 우리는 이게 보위의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고 성마르게 그를 두둔하거나, 보위가 잠시 미쳐서 그랬던 거라고 그의 발언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이 시절 보위는 코카인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고, 식사라곤 오직 피망만 먹었을 정도로 몸도 정신도 망가져가던 시기이긴 했다. 오죽하면 “Station to Station” 투어를 돌면서 몸무게가 50kg 밑으로 떨어졌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파시스트들의 본심이 자살이라고 한다면, 이 시절 보위도 사실은 자살을 원했다고 볼 수 있겠다. 피망과 코카인만 먹으며 생활하던 그의 모습에서 이미 죽음을 향한 원의가 보인다. 그에게 죽음이 임박하면서 분명, 자기가 파시스트가 되어 세계를 공멸로 이끌리라는 음험한 야망까지 품었을 것이다. 씬 화이트 듀크, 그는 보위의 이런 음험한 야망이 탄생시킨 페르소나였던 것이다.
보위는 어째서 이런 끔찍한 페르소나를 만들게 되었을까. 그에겐 이부형(異父兄) 테리(Terry)가 있었는데, 테리가 조현병을 얻어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건은 아직 마음이 덜 여문 보위에겐 큰 상처였다. 이는 보위를 오래 괴롭힌 악몽이 되었다. 보위의 이런 성장 배경이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 이를 테면 사람들을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만드는 전쟁, 폭력, 범죄 소식들에 예민한 사람이 되도록, 그를 이끌었다. 그는 UK 앨범 차트 1위 앨범을 세 개나 보유할 정도로 인기 가수가 되었지만, 그가 앓는 불안과 공포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위 안에 파시스트, 보위 안의 괴물, 씬 화이트 듀크는 보위를 서서히 잠식해갔다.
이렇게 보면, 보위 안에 자라나는 파시스트의 이야기가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보위는 이토록 돈과 인기를 막대하게 얻어도, 여전히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닫고, 세상에 화가 잔뜩 났을 것이다. 보위는 분명, 자기가 직접 파시스트가 되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었을 거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공포를 제거해버리고 싶었을 거다. 이렇게 적고 보니, 뭔가 친숙하지 않은가. 우리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불안과 공포를 그 어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없었겠는가. 앞서 이웃나라 독재자들의 모습은 우리 안에도 있다고 말한 것처럼, 보위가 마음속에 키우던 씬 화이트 듀크, 그는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보위를 함부로 비난하겠는가.
그러나 앨범 제목을 십자가의 길에서 따온 “Station to Station”으로 지은 것을 보면, 그가 마냥 자기 내면에 자라나는 파시스트를 내버려뒀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앨범은 마냥 씬 화이트 듀크의 이야기가 아니라, 파시스트가 되려는 의지와 음험한 야망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이 두 의지 사이에서 싸움을 다룬 앨범이다. 그러나 듣다 보면, 싸움치곤 너무 밝고 신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1번 트랙에서 이런 가사와 함께, 연주가 가장 신나는 쪽으로 고조되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자기 죄를 반성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The European cannon is here.
유럽의 대포가 여기 있어.”
대포를 보며 잔뜩 신나서 춤을 추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다. 유럽의 대포, 그것은 히틀러가 품었던 유럽을 공멸로 이끌 야망을 의미한다. 이런 음험한 상징을 보며, 기뻐하는 씬 화이트 듀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럽의 대포”가 이끄는 공멸은 그에게 있어 “절대적 순간의 향락”이 될 것이다.
■ 신나고 짜릿한 십자가의 길
그렇다면, 그는 정녕 세계 공멸을 위해 기도했던 걸까. 1번 트랙에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만 들으면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만, 이 노래가 처음엔 무척 엄숙한 분위기로 시작한다는 걸 보자. 그는 자신의 죄에 관해 고해성사를 받듯 이렇게 읊조린다.
“The return of the Thin White Duke, throwing darts in lovers' eyes.
씬 화이트 듀크가 귀환하면, 그는 연인들의 눈에 다트를 던지지.”
앞서 보위가 씬 화이트 듀크를 묘사하며, 그가 “진심 없이 낭만적”이라고 표현한 데 주목하자. 그는 사실 그 누구도 사랑할 마음이 없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자기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군중이라고 불러야 마땅했고, 그들을 모아 나라 하나를 세워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그들을 자기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건 오직, 자기 권력을 위해서였다. 그렇다.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수단은 섹스였다. 그는 색욕을 자극하는 자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파시스트로 거듭날 힘을 모았다. 자신이 가진 매력은 곧 마력(魔力)이었다.
“Here are we, one magical movement from Kether to Malkuth. There are you, you drive like a demon from station to station. The return of the Thin White Duke, making sure white stains.
케더에서 말쿠스까지 이어지는 마법의 움직임에, 여기 우리가 왔어. 악마가 이끄는 각 처와 처 사이, 여기 네가 있어. 씬 화이트 듀크가 귀환하면 그는 하얀 얼룩을 확인하지.”
그는 이것에 대한 참회를 하며, 십자가의 길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케더(Kether)와 말쿠스(Malkuth)는 오컬트 의식에 사용되는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를 의미하며, 하얀 얼룩(White stains)은 20세기 유명 오컬티스트, 알리스터 크롤리(Aleister Crowley)의 저서를 말한다.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마력들에 관해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 노래는 기차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자신이 지은 죄의 역사가 너무 길어서, 기차를 타고 십자가의 길을 돌아야 할 수준이라는 거다. 그런데 참회하는 분위기는 곧 끝나고, 노래는 빨라지는 드럼 연주와 함께 점점 신나게 달아오른다. 마치, 자신이 죄 지은 순간들을 회상하며, 그런 죄악의 순간들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느끼듯 말이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필연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 인간의 죄가 있어야 기독교가 존속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 없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으면, 십자가의 길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이런 죄악 없이는 걸어갈 수 없는 길이라는 거다. 진심으로 참회하려는 마음은 점차 줄어들고, 죄를 지으며 느꼈던 신나고 짜릿한 기분만 고조되어 간다. 하지만 여기서 언뜻 드러나는 그의 다른 진심이 보인다. 그는 자기 죄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Oh, what will I be believing and who will connect me with love?
오, 무엇이 나를 믿음으로 이끌어줄 것이며, 누가 나를 사랑으로 연결시켜줄까?”
그러나 그는 사랑을 너무 오래 연기해온 탓에, 무엇이 진짜 사랑이고, 무엇이 코카인의 부작용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과 연결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권력이 주는 쾌락에만 취해간다. 이어지는 노래 “Golden Years”와 “Stay”는 그런 쾌락을 격렬한 펑크(Funk) 연주에 실어 표현했다. “TVC15”에서는 텔레비전 귀신이 된 씬 화이트 듀크의 모습을 표현한다. 그는 텔레비전 귀신이 되어, 사람들을 텔레비전 속으로 빨아들이고, 그들이 바깥세상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어버린다. 요즘엔 왠지 이런 귀신이 스마트폰, 유튜브 등에도 있는 거 같다.
■ 우리에겐 죄 지을 자유가 필요하다
여기서 보위가 자기 죄를 후회하고 있다는 인상은 전혀 받을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죄악마저 흥겨운 선율로 그려내고 있다.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마저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자유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지우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과오마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거기에 자유가 있다. 더 나은 길, 더 밝은 길을 향해가는 길은 그렇게 이어진다. 자신의 과오를 사랑하려고, 내 삶에 그 어떤 것도 죄악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삶에 죄악이 있었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 죄악의 순간들마저 사랑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음란, 간통, 마약, 폭력, 살인, 자살까지, 이 모든 죄악을 마음에 허용하자. 그리하여 이 모든 죄악보다 더 나은 길이 있음을 깨닫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가자. 이 모든 죄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 길로 가지 않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죄악이 허용되어 있음에도, 죄악의 길로 가지 않는 것이다. 죄악보다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걸, 내 진심이 인정했기 때문에, 나는 더 밝은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김기석 목사의 저서 “고백의 언어들”에선 죄를 금지시키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매혹시킨다는 논지를 펼치며 이런 말을 한다.
“이건 제 경험인데요. 저는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누나가 다섯 명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바깥 마당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있고, 토방 위로 나무 마루가 있고, 그 뒤로 방들이 배치된 구조였습니다. 어느 날 마루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밖에 나갔던 누나가 들어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돌아서더니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들여다보지 마.’ 그러고는 들어갔습니다. 저는 누나가 방으로 들어가든 나오든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지 마’ 하는 말을 들은 순간 왠지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문이 대부분 창호문이었는데, 그냥 뚫으면 소리가 나서 범행을 들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저도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서 비비적거려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그 틈으로 무엇을 봤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렷이 기억되는 것은 ‘들여다보지 마’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제 속에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키울 때 지나칠 정도로 몰아치거나 많은 금지명령을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금지가 매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죄 지을 자유가 필요하다. 법이 금지하기 때문에, 종교가 금지하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가 금지하기 때문에 죄악을 행하지 않는 게 아니다. 법이나 종교도, 도덕이나 윤리도, 그 어떤 것도 내가 죄악을 행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내가 죄악을 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사실, 태초엔 그 어떤 것도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진리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악을 행하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이 아직 나약하고 부족하여, 죄악을 다시 저지르긴 해도, 나는 다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빛을 향하는 길로 돌아갈 수 있다. 죄악보다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걸, 진심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죄 지을 자유가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에겐 죄에서 벗어날 자유 또한 필요하다.
우리에게 죄 지을 자유만 있고, 죄에서 벗어날 자유가 없다면, 그건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 안타까운 현상이 있다면, 죄 지을 자유만 강조하고, 죄에서 벗어날 자유는 오히려 폄하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종교는 죄에서 벗어날 자유만 강조하고, 죄 지을 자유는 폄하한다. 우리에겐 죄 지을 자유와 죄에서 벗어날 자유,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자유가 내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비로소 그것이 온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온전하지 않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죄 지을 능력만 있으면 그건 자유가 아니다. 반대로, 죄 지을 능력이 없는데, 죄에서 벗어날 능력만 있는 것도 자유가 아니다. 죄 지을 능력과 함께, 죄에서 벗어날 능력도 같이 있어야 자유로운 거다.
■ 보위가 저지른 가장 큰 죄
무엇이 죄악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문화에 따라 다르고, 종교에 따라 다르고,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죄악의 기준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통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아무것도 죄악이 아니라고 믿는 것 또한, 건강한 삶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자기 영혼이 병들어 간다는 걸 부인하고 외면하는 것과 같다.
보위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무엇이었을까. 문란한 성 생활? 코카인 중독? 히틀러를 칭찬했던 것? 아니, 이 모든 것 이전에 훨씬 큰 죄가 있었다. 그것은 보위가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에 얽매였던 것이다. 그가 돈과 권력에 얽매이지 않았더라면, 섹스와 마약이 주는 쾌락에 탐닉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가 되길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종교와 문화를 통합할 단 하나의 정확한 죄악의 기준을 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나는 여기서 감히 단 한 가지 기준을 선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얽매이고 편협해지는 것. 그렇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한 교리라도, 거기에 얽매여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본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죄를 피하겠다고 도덕률에 얽매여, 타인의 삶을 함부로 심판하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보위는 자신의 문란한 성 생활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위는 자신이 코카인 중독에 빠진 것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위는 심지어 자신이 히틀러를 칭찬하는 것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위는 자신이 돈과 권력에 얽매여 있다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뼛속 깊이 죄라는 걸 인정했다. 돈과 권력을 많이 갖는 것,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로는 전혀 죄가 아니다. 오히려 돈과 권력을 선한 데 이용한다면, 그보다 큰 선행이 또 있을까! 하지만 돈과 권력에 얽매인다면, 그건 분명 죄가 된다. 그래서 보위는 죄에서 결연히 벗어나고자 했다. “Station to Station” 앨범은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결연히 다짐했던 흔적이다. 그는 공멸을 위해 기도하는 손을 과감히 자르고, 진실한 사랑에 연결되도록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In this age of grand delusion, You walked into my life out of my dreams.
이 거대한 망상의 시대에, 당신은 제 꿈 바깥에서 제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3번 트랙에 실린 “Word on a Wing”의 첫 구절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보위가 얼마나 참회하며,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에 연결되고 싶었는지, 그 간절한 바람을 들을 수 있다. 위 구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사랑 없는 삶에는 오직 망상처럼 허무하게 흩어질 쾌락들뿐이다. 그리하여 망상은 더 큰 쾌락을 부르고, 쾌락은 더 큰 망상을 부르다가, 파시스트가 되어 세계 공멸을 가져오겠다는 꿈까지 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이런 끔찍한 망상을 멈출 수 있고,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삶에 생명을 줄 수 있다. 나는 보위 앨범을 스무 장 넘게 들었는데, 이토록 애절한 목소리는 다른 어떤 앨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 죄에 대해서도 진실했던 만큼, 참회도 진실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다. “Lord, I kneel and offer you(주님, 제가 무릎 꿇고 빌게요)”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And I don't stand in my own light(저 혼자 가진 빛으로는 설 수조차 없어요)”라고 말하는 부분까지 한껏 애절하게 목소리를 고조시키다가, “Lord(주여)”라는 말을 힘없이 떨구는 장면은 들을 때마다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열혈 흑인 민권운동가로 유명한 가수, 니나 시몬(Nina Simone)을 향한 오마주로 “Wild Is the Wind”를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6번에 수록한 걸 보자. 그가 마음 한 구석에선 파시스트의 꿈을 키우고 있었더라도, 사랑과 연결되어 죄악에서 벗어나려는 진심도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얼핏 들으면, 그저 연인에게 건네는 노래처럼 들리지만, 이는 하느님께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로 풀이할 수도 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에로스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성서 중 “아가서”를 읽다 보면, 그 두 사랑이 딱히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 우리 각자 안에 심어진 십자가의 길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죄 지은 내 모습을 사랑하라니, 그런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을 사랑하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랑이란 너와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거다. 그래서 그는 평생 믿어본 적 없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해달라고. 나 자신의 가장 끔찍한 모습마저 사랑해줄 존재가 저 하늘에 있음을 믿게 해달라고. 당신은 진정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조차 사랑하느냐고. 보위는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이어갔고 마침내, 하느님과 연결되었다. 그는 하느님과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이 설령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도, 어쨌든 그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걸었던 십자가의 길로써,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과 연결되었다.
보위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믿을 수 없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그 사랑은 믿고 싶었으리라. 병을 낫게 하고,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고, 물 위를 걷고,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님의 그 모든 기적을 믿을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그 사랑 하나 만큼은 절실히 믿고 싶었으리라. 섹스와 마약과 권력이 주는 쾌락에서 벗어나려면,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궁극의 환희가 필요했을 것이다. 보위는 그것이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 사랑으로 나아갔다. 보위가 기독교인이 된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보위는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마침내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죄악을 자기 마음에 허용한 채로, 그 모든 죄악의 순간들마저 사랑으로 감싸줄 존재가 저 하늘에 살아 있다는 걸 믿으며, 더 나은 길, 더 밝은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보위는 “Station to Station” 앨범 이후로도, 40년 가까이 평생 슈퍼스타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길을 걷고 나서 분명 달라졌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돈과 권력이 없어지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그것들에 깊이 얽매인 상태였는데, 이후로는 자신의 돈과 권력이 당장 모두 없어져도 괜찮을 것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갔다. 그가 코카인 중독을 극복했다는 게 그 증거다. 그에게 코카인 중독이란 그의 영혼에 새겨진 상흔이었다. 그는 죄의 상흔을 극복하고 자유를 얻었다. 그 자유는 분명, 사랑이 보위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이었다. 그에겐 죄 지을 자유도 있었고, 죄에서 벗어날 자유도 있었기에, 비록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었을지라도, 결국 그는 모든 아픔을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데이비드 보위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건, 우리도 그처럼 자유롭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 자유로운가. 당신은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자유롭길 바란다. 나는 당신이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보위에겐 보위만의 십자가의 길이 있었듯, 당신에겐 당신만의 십자가의 길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당신 삶에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그 길을 보위처럼, 신나고 짜릿하고 애절하게 걸어가길 바란다.
트랙리스트
1. Station to Station
2. Golden Years
3. Word on a Wing
4. TVC15
5. Stay
6. Wild Is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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