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84: 모리세이(Morrissey) - You Are the Quarry
원망과 자기혐오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 예술과 노래는 내겐 동의어
“난 계속 그림을 그릴 거야.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계속 그릴 거야. 난 계속 그릴 거야. 이건, 결심이 아니야. 그냥 아는 거야. 난 그릴 거야.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 볼 수 있다면. 내 마음이 계속 노래를 부르면 난 계속해서 그릴 거야.”
소설 “풀이 눕는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여기서 등장인물 “풀”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자신의 “마음이 계속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래, 언제나 노래라는 말은 내게는 예술과 동의어로 느껴졌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너무 현학으로 느껴질 땐, 노래라는 단어를 예술 대신에 썼다. 노래는 그만큼 사람들을 쉽게 매혹시킨다. 그림이나 글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와 닿지만, 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도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림이나 글만큼 지식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평론 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평론이 음악 평론이겠다. 사람들은 음악에도 평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냥 들으면 좋은지 나쁜지 바로 아는 걸,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고 할 게 있겠는가 생각하는 거다. 반대로 영화 평론은 가장 인기가 많은 평론 분야다. 영화는 워낙 그 안을 이루고 있는 요소가 다양한 종합 예술이니까, 설명을 들어야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저 딱 접하면, 바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름다움이다. 이런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노래만큼 좋은 게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노래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그건 내가 노래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처럼 노래에 매혹된 사람들과 함께 감상을 공유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그 노래를 향해 답가를 부르는 것과 같다. 나는 글로써 아주 길고 긴 답가를 부른다. 멜로디가 빠진 자리를 더 많은 묘사로 채운다. 내 글로써, 나와 감상을 공유하는 사람 마음에 무엇인가 움직인다면,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또 다른 노래로 나올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것에 대해 감탄하며 떠드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런 즐거운 시간은 아무리 길어져도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노래에 관해 글을 쓴다.
저 위에 인용한 소설 구절에선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 볼 수 있다면” 계속 그림을 그리리라 말했다. 그러다가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면 어쩌랴. 더 이상 마음은 아름다운 걸 향해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으랴. 내겐 그런 시절이 많았다. 세상이 싫어서, 나 자신마저 싫어지던 때, 모든 게 싫어서 도무지 내 눈에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아름다움을 만들어냈을까. 나는 위로를 받아야 했다. 위로를 받아야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얻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아름다움을 죽을힘을 다해 쥐어짜내야 했다. 그러다가 만난 가수가 모리세이였다.
■ 괴팍한 성질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
모리세이 정규 7집 앨범 “You Are the Quarry”를 보면, 표지부터 심상치 않다. “당신이 사냥감이다”라는 제목하며, 토미건(Tommy Gun)을 들고 상대방을 위협하는 모습까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이 무슨 영화 “대부(The Godfather)”에 나오는 갱스터라도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 아저씨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수가 맞는지 의심부터 든다. 수록곡들의 제목도 험악하다. 미국은 세계가 아니다? 감히 세계 최강대국을 향해 이런 오만한 발언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자기가 예수를 용서했단다. 아이고, 그러고 미안하지도 않다고? 세상은 따분한 녀석들뿐이라고 세상을 잔뜩 씹어놓고선, 이런 자기 마음을 대체 누가 알 수 있겠냐며 불쌍한 척까지 한다. 그런데 웃긴 건 뭐냐면, 나는 이 가수가 참 좋다는 거다. 이런 괴팍한 성질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가수, 그가 바로 모리세이다. 이런 그의 업적 중심에 “You Are the Quarry”가 있다.
누가 가려운 곳 긁어주고, 답답한 속 뻥 뚫어주면 시원하다고, 살맛이 난다고 느낀다. 이런 살맛도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세이는 나의 가려운 곳 긁어주고, 답답한 속 뚫어주는 가수였다. 모리세이는 특히 가사를 잘 쓰기로 유명한 작사가로도 유명한데, 이런 배경을 몰라도, 그의 음색에서 이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내가 화내고 싶고, 내가 비웃고 싶은 대상에게, 대신 화내주고, 대신 비웃어주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의 분노와 냉소는 어딘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구석이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내 분노와 냉소도 이처럼 섬세하게 어루만질 수 있고, 부드럽게 녹여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모리세이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신나는 로큰롤 연주가 그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가 자신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앞서 언급한 수록곡들의 제목도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표출하면 싫을 법한 오만한 얘기들도, 그의 목소리를 거치면 받아들일 만한 오만함이 된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왠지 오만하게 살아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이런 쾌감을 느끼는 게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앞서 말했듯, 사람이라는 게, 살다 보면 그 어떤 것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의 우울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려버린 탓이다. 이런 나의 우울을 누가 긁어주고 풀어줘야 하는데, 세상에 우울한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울은 나를 고독하게 만든다. 이런 고독한 때에, 노래를 듣는 것 말고 달리 무엇으로 내 마음을 풀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와 닿지 않는데, 밝은 노래가 잘 들리기나 할까. 우울할 땐 역시, 이런 내 처지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진짜로 공감해주는 건 아니라도, 공감 비슷한 느낌이라도 받는 게 필요하다. 이런 걸 필요로 할 때, 모리세이 목소리는 언제나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울려주었다. 그래서 좀 몸에 나쁜 쾌감이지만, 기꺼이 모리세이의 노래에, 그 노래에 담긴 우아한 독설에 귀와 마음을 맡긴다. 그러고 나면, 좀 더 살 수 있을 거 같다.
■ 시작부터 독설을 퍼붓는 성깔
1번 트랙은 “America Is Not the World”다. 영국 가수 모리세이는 1997년에 정규 6집을 발표하고서 영국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생활을 7년 가까이 했는데, 2003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정규 7집 작업을 한다.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신이 살았던 미국을 향해 독설부터 퍼붓는다. 미국,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착각 좀 하지 마. 너는 위대하지 않아. 그런데 웃긴 건 뭐냐면, 이렇게 독설을 퍼부어놓고, 노래 끝날 때는 미국을 향해 갑자기,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고백을 퍼붓는다. 뭐 이런 이상한 아저씨가 다 있냐.
그런데 이런 모순적인 마음은 이 아저씨만 가진 게 아니다.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만 생각하지 말기를. 우리나라 모 정치인은 반미 활동에 열을 올리며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딸은 로스앤젤레스로 유학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상대 진영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면, 특히 내가 갖지 못하는 대상이 너무 크고 부담스러워 보이면, 그 대상을 질투하며 깎아내리기 마련이다. 저건 안 가지는 게 차라리 나았던 거라면서, 진심이 아닌 말을 하는 거다. 그런 얄팍한 거짓말로 질투하고 깎아내리는 게,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는 한 방법이니까. 좀 치사하더라도, 급할 땐 치사한 방법이라도 쓰게 된다. 모리세이는 어떻게든 미국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미국에 화가 나고 질투가 났던 거다. 그런 마음을 “America Is Not the World”라는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 어렸을 땐 백인만 봤다 하면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는지 언제였던가, 초등학교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절대 상대방에게 미국인이냐고 묻지 말라고. 그건 무례한 거라고. 그 사람은 영국 사람일수도 있고, 호주 사람일수도 있고, 프랑스 사람일수도 있고, 독일 사람일수도 있다고.
또 이런 일화도 생각나는데, 초등학생 때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거기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 관광객들에게 가서 노트를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청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정말 사인을 받아온 것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사인 받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선생님은 화를 내며 말리기에 이르렀다. 이게 무슨 국가망신이냐며. 사실 나도 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사인 받는 게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관광객에게 사인 받을까 생각했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당시 내 성격에 감히 그러질 못했다. 돌아보니, 그러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도 아닌 관광객에게 사인을 받는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당시 그 아이들은 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사인을 받고 싶어 했을까. 사인을 해달라고 청한 외국인은 역시 전부 백인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들 세계관에 백인이라면, 선진국 강대국에서 온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권력 있고 멋진 부자들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백인들에게 가서 사인 해달라고 했겠지. 그러니까 걔들은 관광객들에게 일종의 아부를 했던 셈이다. 초등학생들도 벌써 권력에 아부하는 방법을 배운 거다. 그러니 모리세이가 미국을 향해 그런 질투를 표출한 것도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I just wish you'd stay where you belong. (나는 그대가 원래 있던 곳에 있기를 바라네.)” 이렇게 노래한 건, 모리세이가 영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낸 구절이라 볼 수 있겠다. 미국은 원래 영국인들이 세운 나라니까, 영국에서 온 자신을 환대해야 마땅하거늘, 왜 그러지 않느냐 일갈하는 거다.
■ 원망도 영성이 될 수 있다
2번 트랙 “Irish Blood, English Heart”는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영국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배경을 노래한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박해했던 역사가 있었다. 그런 역사를 이끌어 온 군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을 기념하는 영국 왕실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모리세이의 비난과 함께, 펑크(Punk) 연주는 더욱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영국 국기를 찢어발길 듯 달려든다.
자기 나라를 향한 원망은 곧, 자신을 이런 못마땅한 나라들에 살게 한 하느님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3번 트랙 “I Have Forgiven Jesus”의 등장이다. 미국과 아일랜드, 영국, 이 세 나라는 모두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룬 사회다. 예수가 통치하는 나라들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믿으니까, 이 세 나라의 하느님은 곧 예수인 셈이다. 그런데, 모리세이는 이 세 나라 모두를 싫어한다. 예수 당신이 세운 나라들이 왜 이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려두느냐 원망한다. 이 노래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버려두신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원망을 담은 외침을 뱉으셨으니까. 구약성서 시편 44장에도 하느님을 향한 원망의 구절이 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희를 버리셨습니다. 저희를 치욕으로 덮으시고 저희 군대와 함께 출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당신 얼굴을 감추십니까? 어찌하여 저희의 가련함과 핍박을 잊으십니까?”
이렇게 보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게 꼭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사실 인간관계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친한 사이일수록 자주 싸우고, 자주 화해하기 마련이다.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화해할 일도 없다. 상대방을 원망한다는 건 어쩌면, 그만큼 친한 사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하니까. 예수를 원망하며, 감히 예수를 용서한다고 선언하는 모리세이.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진정 사람처럼 느끼기 때문에 예수님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겠다. 그는 참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기도 하시니까. 하느님은 사람과 사람으로서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으니까. 하느님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원망하는 것도 영성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감히 용서하는 것도 신앙이 될 수 있다.
“By Friday, life has killed me. By Friday, life has killed me.
금요일엔 삶이 나를 죽였어. 금요일엔 삶이 나를 죽였다고.”
이 노래에서 일주일을 차례대로 나열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항상 궁금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어디 치워버리고, 금요일만 두 번 읊조리는지. 그런데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고 나서,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깨달았다. 가톨릭 교리에서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날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금요일에 금육재(禁肉齋)를 행한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예수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모리세이도 가톨릭 신자로서, 금요일엔 예수님 수난에 동참한다는 걸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냉담자가 된 모리세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모리세이가 예수님께 진심으로 노래한다고 느껴진다.
■ 꼭 괴팍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야
여기까지 보면, 오만하고 괴팍한 구석만 있을 것 같은 모리세이지만, 앞서 설명했듯, 그의 매력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수성에서 온다. 어쩌면 그의 괴팍한 성질도, 이런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많은 걸 느끼는 사람은 고통도 많이 느낄 테니까. 반면, 고통에 민감한 사람은 기쁨에도 민감하다. 모리세이는 자신을 기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것들을 노래한다. 동시에 그런 아름다운 것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것들이 지금 자신을 떠나서 슬프다고, 그립다고 노래한다. 이런 슬프도록 아름다운 정서를 4번 트랙 “Come Back to Camden”과 9번 트랙 “Let Me Kiss You”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특히 “Come Back to Camden”은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영국으로 돌아와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슬픈 풍경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모리세이의 애수에 젖은 목소리가 운치 있는 피아노 연주에 실려 나오는데, 모리세이가 나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기분이 들어서 황홀하다.
감수성이 뛰어난 만큼 고통에 민감한지라, 그만큼 상처 많고 여린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는 노래들도 있다. 자신의 상처가 자기혐오를 키웠노라고 고백한다. 6번 트랙 “The World Is Full of Crashing Bores”에선 세상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면서도, 어쩌면 자신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을지 모른다며 두려워한다. 7번 트랙 “How Can Anybody Possibly Know How I Feel?”은 격렬한 연주와 함께 아무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She told me she loved me. Which means She must be insane. They said they respect me. Which means Their judgement is crazy. He said he wants to befriend me. Which means He can't possibly know me.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는데, 그 말뜻은 그녀가 분명 미쳤다는 거야. 걔네가 나를 존경한다는데, 그 말뜻은 걔네가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거야. 그가 나랑 친해지고 싶다는데, 그 말뜻은 그가 나를 모른다는 거야.”
앨범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12번 트랙 “You Know I Couldn't Last”에선, 자신이 오랜 가수 생활로 인해 얼마나 지쳤는지를 노래한다. 자신도 가수 생활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불평한다. 그렇다고 가수로서 인기를 많이 끌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 그렇게 좋은 일인 줄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결국 그렇게 얻은 돈과 인기가 나를 죽이러 온다며 한탄한다. 모리세이는 밴드 스미스(The Smiths)의 보컬로 재직할 적에 “Paint A Vulgar Picture”라는 노래를 쓴 적이 있다. 이 노래에선 장사꾼들이 죽은 가수를 두고 시체 팔이 하며, 전설을 욕망으로 더럽히며, 팬들의 사랑을 모독한다고 한탄했는데, 자기가 지금 딱 그 꼴이 나고 있다고 노래한 것이다.
■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힘은 사랑에서 온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기혐오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으니. 8번 트랙 “First of the Gang to Die”는 갱스터 소년의 죽음을 동경하듯, 그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11번 트랙 “I Like You”에선 쑥스럽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고백하겠다고 용기를 낸다. 이 앨범에서 모리세이가 자기혐오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장 감동적으로 표출되는 부분은 6번 트랙 “The World Is Full of Crashing Bores”다. 노래 중반까진 세상을 향한 원망과 자기혐오를 노래하지만, 노래 끝에선 그 모든 걸 부정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안아달라고 외친다.
“This world, I am afraid, Is designed for crashing bores. I am not one. I am not one. You don't understand. You don't understand. And yet you can take me in your arms and love me, love me, And love me.
난 두려워, 이 세상을 따분한 녀석들이 만들었을까봐.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은 모르겠지. 그래도 아직 당신은 나를 안아주고 사랑해줄 수 있어, 그럼 사랑해줄 수 있지.”
앞서 자기혐오로 가득 찬 마음을 나열하다가, 참지 못하고 폭발하듯 튀어나오는 구절들이라 더 강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자기혐오는 사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받고 싶다고 외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다.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힘은 사랑에서 온다.
지금 나는 예전처럼 그렇게 강한 자기혐오에 시달리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다. 그러나 모리세이의 노래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의 노래 덕분에 나의 우울과 자기혐오를 달랠 수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 아름다운 걸 발견할 수 없는 순간에도 내게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던 순간들을 떠오르게 해서, 여전히 그의 노래는 내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지금껏 살아보니, 세상이 그렇게 비정하고 사악한 곳은 아니더라. 세상은 나의 오만함과 괴팍한 성질을 충분히 다 받아줄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곳이더라. 그러니 당신도 세상 살기가 힘들 때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실컷 세상을 원망해도 좋다. 그러기 힘들 때는 모리세이가 노래하는 분노와 냉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름답기 힘들 때조차, 나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모리세이에게 감사한다.
트랙리스트
1. America Is Not the World
2. Irish Blood, English Heart
3. I Have Forgiven Jesus
4. Come Back to Camden
5. I'm Not Sorry
6. The World Is Full of Crashing Bores
7. How Can Anybody Possibly Know How I Feel?
8. First of the Gang to Die
9. Let Me Kiss You
10. All the Lazy Dykes
11. I Like You
12. You Know I Couldn't Last
* 이번엔 특별히 작가 본인이 직접 변역한 가사 모음이 있습니다. 전문 변역가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오역과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을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가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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