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83: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 Californication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다
■ 오랫동안 들었지만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없었던 앨범
인생명반을 2017년 7월 말에 시작하여, 올해로 7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에세이만 82개가 쌓였고, 이게 벌써 83번째 인생명반 에세이다. 글을 들여다보면 친해진 지 15년 넘은 앨범도 있고, 친해진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앨범을 갖고 글을 쓴 것도 있다. 이번에 소개할 앨범은 전자에 더 가깝다. 정말 오래 들었던 앨범인데, 이상하게 글이 나오지 않았던 앨범이다. 이 앨범을 다루고 싶다는 생각은 인생명반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 앨범이 내게 너무 소중한 탓에, 이 앨범에 대한 글은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욕심이 내게 부담을 준 탓에, 여기까지 미뤄진 거 같다. 인생명반 에세이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글을 시작하는 데 별 부담이 없었는데, 글이 점점 쌓이면서 과거 글을 보면, 내 글 솜씨가 못마땅하고, 그래서 글의 주제로 나온 해당 앨범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같은 주제로 글을 한 번 더 쓰는 것도 이상할 거 같고.
이젠 이 앨범에 대해 글을 쓸 때라는 결론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별 이유 없다. 그냥 벌써 7년이나 흘렀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미루다간, 평생 이 앨범을 인생명반 에세이에서 소개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거 같아서 그런 거다. 다른 말로 하자면, 등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이 앨범에 대한 글을 쓰려고, 이 앨범에 대한 배경을 조사해보니, 과연 이 앨범은 이렇게 소개하는 게 맞는 앨범인 거 같다. 다행이다.
이 앨범을 한참 듣던 때는 열여덟 살 때였는데, 그 시절은 인생의 모든 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앨범에서 음울하고 진지한 음색을 내뿜는 “Scar Tissue”나 “Otherside”, “Californication” 같은 트랙들을 특히 많이 들었다. 이 세 트랙이 모두 전반에 몰려 있어서, 후반에 배치된 트랙들은 집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저 세 트랙만으로도 내게 이 앨범은 사랑할 가치가 충분했다.
이 앨범 가사들을 번역하면서 느낀 건, 전반과 후반이 완전 다른 앨범인 것처럼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가사를 몰라도 음악만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긴 했지만, 가사를 보니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전반과 후반의 차이가 이 앨범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우울하고 진지한 얘기로 가득한 전반에 비해, 후반은 온통 유쾌하고 더러운 농담들뿐이다. 후반의 농담들은 전반의 진지하고 우울한 얘기들도 전부 농담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농담? 그래, 농담은 좋은 거야.
■ 예술은 농담이다
예술과 가장 가까운 단어가 뭘까? 누군가는 그것이 종교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그것이 철학이라고 말했다. 나는 말한다. 예술은 농담이라고. 물론, 예술이 종교와 한 몸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종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종교와 예술이 분리된 시대가 왔다. 예술에도 당연히 철학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농담에도 철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 목사님 설교에도, 신부님 강론에도, 스님의 설법에도 농담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술을 농담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술은 농담이다. 농담은 뭘까?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농담이라는 단어의 지평을 좀 넓혀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흔히 농담이란 사람들을 폭소하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폭소만이 웃음은 아니라고. 행복한 상상에 젖어 잔잔하게 짓는 표정도 웃음이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짓는 표정도 웃음이고, 위로를 받아 다행이라고 느낄 때 짓는 표정도 웃음이다. 이밖에 웃음에는 여러 다양한 형태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웃음이란, 영어로 표현하자면 Laugh보다는 Smile에 가까울 것이다. Laugh는 Smile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Smile은 Laugh가 없어도 된다. 웃음을 표현하는 단어도 여러 가지. 폭소, 미소, 냉소, 고소, 조소, 등등. 이렇듯 웃음 안에 담긴 감정도 여러 가지다. 그렇다면, 사람을 폭소하게 만드는 것만 농담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나를 가장 웃게 만드는 말이 뭘까. 사랑해? 아니, 이 말은 참 좋은 말이지만, 너무 커서 가끔 부담스럽더라. 이거랑 비슷하게 보편적이면서도, 좀 더 섬세한 말은 없을까. 괜찮아? 그래, 이게 나를 가장 웃게 만드는 말인 거 같다. 괜찮아.
슬퍼? 괜찮아. 우울해? 괜찮아. 화나? 괜찮아. 가난해? 괜찮아. 질투나? 괜찮아.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어? 괜찮아. 자살충동이 너를 괴롭혀? 괜찮아. 부모님이랑 사이가 나빠? 괜찮아. 소중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니? 괜찮아. 세상이 싫고 부조리를 견딜 수가 없니? 괜찮아.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 자신이 더럽게 느껴져? 괜찮아. 이렇듯, 예술은 세상 모든 걸 향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작품이 진지하고 우울한 얘기를 하더라도, 그건 모두, 결국엔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농담이다.
내가 자살충동과 자기혐오에 한참 시달리던 열여덟 살, 내 곁엔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이런 내 속이 문드러지는 걸 편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음악과 책에만 매달리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음악과 책에 매달려 살다 보니, 사람에게 편하게 의지하는 방법도 배우게 되고, 내 주변에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렇게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가끔 괜찮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내 안에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언제라도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에 따라서 이 앨범을 감상하니, 한 때 소홀히 들었던 후반 트랙들도 내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앨범은 거대한 농담이다. 표지부터 농담이지 않은가. 수영장엔 하늘이 있고, 하늘엔 물이 있는 게. 이 앨범 전체가 내게 농담을 건네며,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다.
■ 존 프루시안테, 괜찮아
이 앨범 전체가 존 프루시안테(John Frusciante)를 향해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존 프루시안테, 그는 누구인가. 레드 핫 칠리 페퍼스(RHCP) 밴드에서 초대 기타리스트를 지낸 힐렐 슬로박(Hillel Slovak)의 뒤를 이어, RHCP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그가 참여한 “Blood Sugar Sex Magik”은 1991년 발표되어, 평단과 시장 모두를 경악케 할 만큼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곧, 밴드를 대표하는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존에게 부담이 되었고, 그를 당혹케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밴드를 7년 가까이 떠나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밴드로 돌아와 작업한 앨범이 1999년에 발표한 “Californication”이다.
존은 밴드를 떠나있는 동안 헤로인 중독에 시달리며 힘든 시기를 겪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어버렸을까. 기타리스트로서 밴드의 명예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을 잊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 부담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걸까. 그렇게 커다란 돈과 인기를 얻어도, 마음이 허무해서 그랬던 걸까. 마약 말고는 그 허무함을 잊게 해줄 다른 것이 없었던 걸까.
힘든 시기를 겪던 존에게, 밴드 멤버들이 다시 손을 내밀었고, 존은 그들과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이렇듯, 이 앨범은 존이 돌아와, 다시 존과 함께 만들게 된 앨범이니 만큼, 앨범 전체가 존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있다. 힘들어? 괜찮아. 부담 돼? 괜찮아. 헤로인에 중독됐니? 괜찮아. 우리 다시 즐겁게 음악하자. 잘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하자.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런 의미에서 3번 트랙 “Scar Tissue”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이곡은 현재까지도 밴드를 대표하는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얼핏 들으면 고독에 관한 노래지만, 여기서 말하는 흉터(Scar Tissue)란, 수많은 마약 주사로 너덜너덜해진 존 프루시안테의 팔을 의미한다. 세상은 네가 마약 중독자라고 너를 멸시하고, 그래서 너는 참 고독하겠지만, 세상에 너만 고독한 게 아니야. 저 날아가는 새를 봐. 혼자서 날아가는 새. 새가 바라보는 풍경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하지만 새가 고독하게 날아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지. 고독은 이토록 아름다운 거야. 우리, 같이 고독하자. 같이 고독을 노래하자. 여기서 내가 썼던 시 한 편이 생각난다. 내 시집 “심해어”에 수록한 “집단 고독”이라는 시다.
“음악 속에서 당신들은 / 집단 고독을 앓고 / 당신들의 앓는 소리는 / 나의 앓는 소리와 공명한다 / / 다같이 고독해서 빛나는 우리 / 음악의 아름다움은 이토록 고독하다 / 고독해서 더욱 아름다운 우리의 소리”
4번 트랙 “Otherside”는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한 밴드의 전 기타리스트 힐렐을 추모하는 노래다. 이 또한 힐렐처럼 마약 중독으로 고생하는 존에게 건네는 노래이기도 하다. 밴드는 존에게 당부한다. 우린 너를 힐렐처럼 보낼 수 없다고. 네가 그렇게 떠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가지 말라고. 우리 언제까지나 이렇게 같이 고독을 노래하자고. 그렇게 밴드가 존에게 건네는 위로는 음악이 되어, 우리 모두의 귀에 닿는 위로가 된다.
6번 트랙 “Californication”은 미국의 상업주의 연예계가 전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노래한다. 이 또한 지난 앨범의 큰 성공으로 부담을 느낀 존의 처지에 공감하려는 노래처럼 보인다. 우리도 너처럼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돈과 인기가 너무 커서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우리도 연예계가 너무 싫지만, 여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런 모순이 싫다고. 그래도 노래하자. 노래하며 함께 힘내서 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노래뿐이라면, 마땅히 우리가 가진 모순을 노래해야겠지.
존에게 건네는 위로로 시작했던 이 앨범은 점점 폭소를 자아내는 미친 농담으로 번져간다. 연애 얘기, 원나잇 얘기, 섹스 얘기는 기본이고, 실컷 놀다가 죽어버리자는 얘기에, 심지어 생리혈 얘기까지 한다!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다워
앨범이 자아내던 폭소와 광란은 극에 달하여 14번 트랙 “Right on Time”에서 폭발한다. 그렇게 앨범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15번 트랙 “Road Trippin'”에 닿는다. 광란과 폭소도 좋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인 자연, 자연 속에서 겸허해지는 마음을 누리며 고요 속에 침잠하고, 고요가 자아내는 잔잔한 웃음에 젖어드는 시간. 이런 웃음을 혼자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동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밴드가 빅서(Big Sur) 산맥을 여행하면서 만난, 고요한 축복을 노래한다. 다시 1번 트랙부터 들어본다. “Around the World”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녀보니, 세상이 참 아름답더라!
삶이든 세상이든 언제나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다 괜찮다. 예술이란, 노래란 그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엔 마약도 있고 자살도 있고 섹스도 있고, 그것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 마음이 괜찮다면, 세상도 괜찮아. 내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워. 세상에 못마땅한 것들이 있어도,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그저 농담이나 하면서 대충 흘려보내자. 내가 쓴 이 글도, 읽는 당신에게 웃음이 되길 바라며.
트랙리스트
1. Around the World
2. Parallel Universe
3. Scar Tissue
4. Otherside
5. Get on Top
6. Californication
7. Easily
8. Porcelain
9. Emit Remmus
10. I Like Dirt
11. This Velvet Glove
12. Savior
13. Purple Stain
14. Right on Time
15. Road Trippin'
* 이번엔 특별히 작가 본인이 직접 변역한 가사 모음이 있습니다. 전문 변역가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오역과 의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을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가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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