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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브로콜리너마저(Broccoli, you too?) - 속물들

인생명반 에세이 82: 브로콜리너마저(Broccoli, you too?) - 속물들

 

착하게 사는 건 힘들고, 나쁘게 사는 건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 인류 공통의 종교

“내가 개신교 신자라고 하면 신부님과 다른 종교니까 대화를 해야 하지만,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같은 편이니까 대화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나한테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떨어져서 그냥 ‘교인’이라고 한다면 같은 종교인이라서 스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어쩌다가 ‘교인’이라는 말도 떨어지고 ‘사람’만 남으면 내가 가는 마지막 길이다.”

 

이현주 목사의 위 발언을 곱씹으면서 들었던 앨범이 있다. 바로 브로콜리너마저 정규 3집 앨범 “속물들”이다. 온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종교가 있다면, 그 이름은 “속물들”이 아닐까. ‘사람’에게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속물’이 아닐까.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당신 자신을 속물이 아니라고 얼마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속물이라는 단어는 사람에게 그다지 긍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브로콜리너마저, 이들이 노래하는 속물이란, 어째서 이토록 예쁘고 겸손하게 들리는가.

 

사람은 모두 속물인가. 그렇다. 사람이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속물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교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게,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주식 투자한 거 상한가 오르게 해주세요. 이런 것들뿐이지 않은가. 성당도 마찬가지. 부모들은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신부님께 헌금 바치면서 미사를 봉헌한다. 수능 이틀 남기고, 사찰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서 불상 앞에서 기도한다는 뉴스는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인터넷에 실컷 떠도는 영성이니 마음공부니, 그런 것들도 모두 하는 얘기가 돈 많이 벌고 인기 많아지는 방법으로 귀결된다.

 

옛날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이 경멸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는데, 이게 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세뇌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이런 풍경을 향해 날선 생각들을 멈추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요즘엔 이런 풍경들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때문일까. 예전에도 그런 생각은 했지만, 내 안에 그런 속물이 있다는 게 싫다는 식으로 한탄하고 그랬다면, 지금은 내가 속물이라도 괜찮다고 느낀다. 특히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내가 그들과 같은 속물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속물들이라는 인류 공통 종교의 일원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 1번 트랙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2021년 앨범 “이른 열대야”에 수록된 “시와” 보컬 버전 뮤직비디오

■ 겸손하다는 말도 우리에겐 과분할지도

“속물들”이라는 노골적인 제목, 음악 안에서라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듯이, 앨범 표지는 밴드의 로고를 박아 넣은 금화들이 가득하다. 이런 패기 넘치는 외양과 다르게, 이 앨범의 시작은 소박하고 겸손하다. 1번 트랙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를 들어보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닐 뿐이죠.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겠네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겸손한 마음이 느껴진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미화도 부정도 없이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게, 겸손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건,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망설임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망설임이 자신을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도록, 거친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 않도록 붙잡아주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계속 듣다 보면, 겸손을 넘어 소심한 마음이 느껴진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여러 판단에 시달리며 지쳐버린 누군가의 소심한 항변 같다. 나는 누구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이런 판단을 스스로 놓고 싶어서 놓는 게 아니라, 세상에 지쳐서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원해서 놓은 것이든, 어쩔 수 없이 놓아버린 것이든, 힘들게 붙잡고 있던 걸 놓는다는 건 어떻게든 편안한 위로를 주기 마련이다.

 

2번 트랙 “속물들”은 분위기를 뒤집어서 광란의 로큰롤 연주를 선보인다. 그래! 나 속물이다 어쩔래? 그런데 그건 너희도 다 똑같잖아.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듣고 있으면 참 신난다. 이런 노래로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들 질투해봐야, 우린 어차피 저렇게 될 수 없을 거란 거,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노래할 때만이라도 당당하게 질투해보자고 말하는 거 같다. 내가 아직도 이들과 함께 속물적인 질투를 같이 내뱉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정말, 인류 공통의 종교인 “속물들”의 일원이 되어, 인류 전체와 질투로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다. 속물로 살아가는 것도 꽤 신나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노래로 질투에 주목하면, 질투는 어느새 알아서 물러난다. 마치 강도가 경찰의 주목을 받으면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처럼.

 

5번 트랙 “혼자 살아요”는 이런 속물들의 광란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기만 잘났다는 듯이 남을 함부로 가르치려드는 사람을 향해 항변하는 노래다. 그런데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사람 면전에다 하는 말 같진 않고, 소박한 기타 연주에 읊조리듯 내뱉는 보컬이 꼭 혼잣말 같다. 앞에선 사람 좋은 척 웃지만, 뒤에선 재수 없다며 혼잣말로 구시렁대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는 누구 면전에다 그런 일갈을 할 만큼 대단한 영웅이 아니다. 난 그저 소심한 속물일 뿐인 걸. 이렇게 혼자서 구시렁대는 수밖에. 이렇게 구시렁대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어. 여담으로, 노래 중간에 “으흠!” 소리가 삐져나오는 게 들을 때마다 웃기다. 혼자 구시렁대는 것 같은 분위기에 후추를 치는 것 같아서.

 

 

▲ 2번 트랙 “속물들” 뮤직비디오

 

▲ 3번 트랙 “서른 (Vocal 이아름)” 뮤직비디오

■ 어쩌면 정말 어른이 되는 순간

3번 트랙 “서른”을 듣고 있으면 왠지, 브로콜리너마저 정규 2집 수록곡 “졸업”이 생각난다. “서른”이 되어 성숙해진 내가 “졸업”을 노래하던 어린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2집 수록곡 “졸업”에서 브로콜리너마저는 이렇게 노래했었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나는 졸업을 하면서, 떠나가는 친구들의 행복을 빌었는데, 그들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문득 내가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어렴풋이 느낀 서글픈 예감이 떠올랐다. 그들의 행복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엔 세상은 너무 미쳐버렸기에, 더욱 간절하게 더욱 반복해서 강조하며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었던 거다. 나는 분명,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며 나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그런 굳은 다짐으로 많은 “가능성”을 떠나보내던 20대가 끝나고, 나는 이제 서른을 맞이했다. 행복을 믿지 않았는데,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이 미친 세상에 쉽게 녹아들어갔고, 도무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미친 세상에서 조금씩 행복을 느끼고 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미친 게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 걸 돌아본다. 세상이 내게 선사할 “서러운 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해도, 나는 이제 그 속에서 웃을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작은 행복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이걸 배우는 데 왜 이토록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을까. 더 빨리 배울 수는 없었을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건 참 유감이네.”

 

내가 비록, 내가 경멸하던 이 미친 세상에 녹아들긴 했지만, 그래도 최악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그 다짐을 4번 트랙 “괜찮지 않은 일”에서 들어볼 수 있다.

 

“혹시 내가 웃더라도, 이건 너를 용서하는 게 아냐.”

 

내가 세상에서 당한 모든 일들을 괜찮다고 생각하며 애써 참고 삼키는 건, 세상을 용서하려고 그런 게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 되는 건 더 싫으니까. 나쁜 사람 되는 것만 피하자고 살아도, 여전히 힘들다는 듯, 퉁명스레 마지막 한마디를 뱉는다. 이렇게.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은 일. 나만 삼키면 없어지는 일. 나를 삼키고 없어지는 일. 나만 괜찮지 않은 일.”

 

 

▲ 5번 트랙 “혼자 살아요” 뮤직비디오

■ 속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이런 미친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7번 트랙 “행복”에서 들어볼 수 있다.

 

“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나는 잘 잊어버리거든요. 행복해지려구요.”

 

내가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신을 배려하겠다고 내가 착한 사람 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이젠 당신을 잊을 수는 있을 거 같다. 당신의 잘못을 잊겠다는 건, 당신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런 것뿐이다. 이젠 행복해져야지. 과거에 얽매여서 행복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가 된 당신을 잊겠다. 행복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찾아오니까. 나의 행복은 고요하게 울리는 건반 연주처럼 소박하게 미래를 그린다. 그렇게 소박하게 그린 미래가 도달한 곳은 내 옆에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무리 안락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쳐도, 결국 깨닫게 되는 건 이 모든 게 소용없다는 것뿐이다. 이건 무슨 종교의 경전이나 고전 서적 같은 걸 읽을 필요도 없이, 살다 보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가장 소박한 진리다. 그래서 이런 소박한 진리에 도달한 우리에게 최선이란, 내 옆에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향해 “남은 아침까지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것뿐이다. 발버둥 끝에 얹을 수 있는 행복이란 결국 이런 것뿐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큰 행복도 없다. 그러니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랴.

 

나 자신을 악당이라고 칭하며, 세상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살던 때가 생각난다. 착하게 살아봐야 소용없는 세상. 내 마음대로 실컷 나쁘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살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보니, 나쁘게 사는 것도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하는 걸까.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는 세상인데. 그래, 세상을 위해서 착하게 살지 말고, 나 자신을 위해서 착하게 살자. 나 자신을 위해서 최악을 피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구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그저 나 자신을 위해 착하게 살자. 그럼 착한 사람이라는 말 듣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걸 면할 수 있을 거 같다.

 

브로콜리너마저가 2008년에 발표한 정규 1집 제목은 “보편적인 노래”였다. 그렇게 11년이 흘러 2019년에 발표한 정규 3집 제목을 “속물들”로 지은 건 어쩌면 필연이었으리라. 인류 모두가 가장 보편적으로 가진 속성이란 속물이니까. 하지만 속물들에게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고 “행복”이 있다. 아름다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면,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속물로 살아도 당당하다. 속물에겐 속물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있으니까.

 

 

▲ 8번 트랙  “아름다운 사람”

최근에 나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성당이라도 안 다니면, 지난날 내가 나쁘게 살겠다고 우당탕탕 망쳐놓은 내 인생을 바로잡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도 없이 자신의 삶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도 참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무종교인들은 종교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인류 공통의 종교인 “속물들”의 일원이다. 그리고 나도 가톨릭 신자이기 전에 “속물들”의 일원이다. 인류 모두와 같은 “속물들”의 일원으로서,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곁에 아름다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나의 기도는 “보편적인 노래”가 되어간다.

 


트랙리스트

1.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2. 속물들
3. 서른 (Vocal 이아름)
4. 괜찮지 않은 일
5. 혼자 살아요
6. 가능성
7. 행복
8.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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