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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부활(Boohwal) - 서정

인생명반 에세이 80: 부활(Boohwal) - 서정
 

나의 추억, 나의 그리움, 나의 서정

 

■ 리듬게임과 사촌형의 추억

리듬게임 한 때 참 좋아했다. 요즘도 가끔 한다. 리듬게임과 나의 첫 만남은 2001년, 내 초등학생 시절 여름방학이었을 거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방학만 되면 대구에 살던 나는 서울에 사는 큰 이모 댁으로 놀러가는 루틴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래서 큰 이모 댁으로 놀러갔을 때였다. 사실 나는 큰 이모보다는 그의 아들 즉, 사촌형이랑 노는 게 좋았는데, 나와 여섯 살 차이인 그 형은 언제나 내게 컴퓨터로 새로운 게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내 눈을 돌아가게 만든 건 “비트매니아”였다.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막대기들, 그 막대기가 어느 지점에 떨어지는 데 맞춰서, 이래저래 버튼을 누르면, 그것이 곧 음악이 되는 게 신기했다. 나는 사촌형의 현란한 솜씨에, 게임이 너무 어려워 보인다고 감히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3년, 비트매니아와 완전 똑같이 생긴 게임 “오투잼”이 나왔다. 혼자서 하는 비트매니아와 달리, 이건 온라인 게임이라는 차이점이 있었고, 수록곡은 당연히 달랐지만, 어쨌든 사촌형이 하던 게임과 똑같은 게임이 출시했고, 그게 내 또래 사이에서도 꽤 유행하는 걸 보면서,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투잼 유행과 더불어, 거리 문방구에는 “EZ2DJ(이지투디제이)”가 깔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오락실을 자주 다녔더라면, 금방 알 수도 있던 게임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오락실이라는 곳을 좀 무서워했던 거 같다. 거기 가면 삥 뜯길까 싶어서. 아무튼 그렇게 이지투디제이와 나의 만남이 이뤄졌고, 그것은 신세계였다. 오투잼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이지투디제이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픽도 훨씬 깔끔하고 다채로웠으며, 무엇보다 음악과 함께 뒤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래픽뿐 아니라, 리듬게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자체도, 오투잼보다 기억에 남는 곡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2005년, 다시 한 번 내 눈을 돌아가게 만든 리듬게임이 출시했으니, 바로 “DJMAX(디제이맥스)”였다. 그래픽도 그렇고, 배경으로 멋진 애니매이션까지 나오는 게 이지투디제이 못지않게 좋았다. 이 게임이 이지투디제이 제작진들이 따로 나와 차린 회사에서 제작한 게임이라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몇 년이 더 흐른 후의 얘기였다. 디제이맥스, 이 게임이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밴드와 내가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데뷔 20주년을 맞이해, 부활이 새 앨범을 냈다고 홍보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곡을 디제이맥스에 제공한 것이었다.

 
 

▲ 2번 트랙 “추억이면(異面)” 뮤직비디오. 여기서 주연을 맡은 조승우 배우는 같은 앨범 11번 트랙에서 보컬을 맡았다.

■ 부활과의 첫 만남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좀 의아했다. 20년이나 된 록 밴드인데, 내가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게. 디제이맥스를 통해서 들었던 곡은 정규 10집에 수록된 두 곡이었다. “추억이면(異面)”과 “슬픔을 이기는 기도”. 20년 내공까진 모르겠으나, 확실히 음악이 좋긴 했다. 이걸 통해, 나는 밴드 부활에 관한 궁금증이 생겼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이승철이 보컬로 있었던 팀이며, 2002년 성시경이 광고에 나와 부른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는 노래가 이들의 노래였다는 거, 그리고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이 구절로 유명한 노래도 이들의 노래였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것이 부활 음악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길까지 이어지진 못했고, 딱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내가 부활 음악세계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고등학생 생활이 끝나갈 무렵 2010년 12월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이 자라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부활이라는 이름을 가진 록 밴드에게 깊이 빠지게 된 건, 단순한 우연으로 넘겨버릴 수가 없다. 5년 동안 예수님을 등지고 무종교인으로 지낸 세월도 있었지만, 이젠 교회를 옮겨 가톨릭에서 세례 받는 날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이런 때, 인생명반 부활 편을 작성하는 모습도, 왠지 하느님께서 내게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활 리더, 김태원. 그는 자신의 음악을 알리겠다는 다짐으로, 2009년 KBS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외모와 토크 실력은 단숨에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음악을 알리겠다는 다짐이 통했는지, 해당 프로그램에서 배경음악으로 “생각이나”를 쓰면서, 시청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현재는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2010년에는 그의 오랜 음악 경력을 알아본 MBC 측에서 그를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멘토로 섭외하였고, 그의 입에서 시나 다름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시청자들은 “남자의 자격”에서 만난 그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에 또 한 번 그에게 매료된다. 그러던 중 KBS 측에서 2010년 12월, 그의 25년 음악 인생을 다룬 4부작 드라마 “락 락 락”을 방영하게 된다. 이 드라마가 나를 김태원과 부활 음악세계에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인생명반 에세이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들은 잘 알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얼마나 록 음악에 심취했는지. 그런데, KBS에서 록 음악인을 다룬 드라마를 방영한다니, 이 얼마나 경악할 일인가. 록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김태원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었다. 드라마 “락 락 락”을 통해 본 그의 인생은 내가 그때까지 존경하던 해외 록스타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론 빛나고 때론 타락하고 때론 다시 일어서는 모습들이 딱 그랬다. 사실 나는 부활의 대표곡들이 전부 부드러운 서정을 내세운 발라드뿐이라, 부활을 록 밴드로서 인정하길 주저했는데, 그 드라마를 보고 정규 1집과 2집을 접해보니, 확실히 이들이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록 밴드로 불린 게 당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2집을 특히 좋아했다.

 
 

▲ 3번 트랙 “슬픔을 이기는 기도” 뮤직비디오

■ 부활은 역시 서정, 부활은 역시 정동하

그러나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바뀌었다. 요즘엔 록은 진정 이래야 한다느니, 록은 과격해야 제 맛이라느니, 그런 생각이 별로 없어서 말이다. 내가 듣는 음악이 록이든 아니든, 그게 나한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때가 온 거다. 요즘엔 좀처럼 록 음악을 향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돌아보면, 자기가 듣는 음악으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지금 이런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부활 앨범은, 내게 부활의 첫인상을 만들어준 앨범 “서정”이다. 2집과 비교하면, 정말 내가 전에 갖고 있던 부활에 관한 편견과 딱 맞는 앨범이다. “슬픔을 이기는 기도”가 내가 생각하는 록의 신나는 광란에 그나마 가까운 곡이고, 나머지는 부드러운 서정을 앞세운 발라드 트랙들로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이 앨범을 들어보면, 김태원은 음악 생활 20년만에 자신의 장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05년 부활 결성 20년에 맞춰 정규 10집으로 나온 앨범 “서정”은 김태원 서정의 절정을 담은 앨범이 되었다.
 
무엇보다 10집에서 새로 대중을 향해 얼굴을 비춘 보컬 정동하, 그가 이 앨범에서 얼마나 빛나는지. 신인임에도 부활의 20년 세월을 받아내는 그의 내공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그가 가진 특유의 두텁고도 부드러운 음색은 부활의 서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부활의 서정에 새로운 색을 부여했다는 말이 더 옳겠다. 부활의 역대 보컬들을 보면, 그 이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정동하를 비롯하여, 1집과 2집, 그리고 8집의 이승철. 5집의 박완규. 이승철과 박완규라는 두 거장 보컬을 발굴한 밴드임에도 내겐 ‘부활의 보컬은 역시 정동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정동하, 그가 바로 내게 있어, 부활의 첫인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2011년 참석한 부활 콘서트 때도, 그 때 재직하던 보컬이 정동하였고. 실제로 부활 보컬로서 가장 오래 재직한 인물도 정동하였다.
 
앨범 “서정”은 1번 트랙 “시간”부터 밴드의 20년 세월을 돌아본다. 20년을 맞이하여,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도, 새로 영입한 보컬 정동하의 목소리가 이제 밴드는 다시 태어났다는 걸 은유한다. 부드러운 멜로디와 함께 서서히 밀려오는 웅장한 느낌이 청자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트랙이다. 이런 음악을 조율하는 정동하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아니, 부드럽기 때문에 강하다. 이런 부드러움은 2번 트랙 “추억이면(異面)”에서 더욱 부각된다. 김태원이 만든 노래에서 으레 드러나는 지난 사랑을 향한 그리움과 비 내리는 풍경의 조화, 이것이 정동하의 목소리를 통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3번 트랙 “슬픔을 이기는 기도”는 박완규 “Lonely Night”을 연상시킨다. 신디사이저 음이 부활 노래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곡으로서, 댄스 음악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댄스 음악에 들어간 정동하의 보컬은 춤을 추는 도중에도 그리운 사람을 잊지 못하는 서정을 드러낸다.
 
4번 트랙 “Yellow”에선 신나는 댄스가 숨죽이듯 잦아들고, 통기타 소리가 비장한 기운을 내뿜는다. 비장하리만치 지독한 그리움 사이로, 마음의 긴장을 녹이려는 듯 정동하의 목소리가 섬세하게 청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정말 정동하 보컬이 가진 가능성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가늠도 못하도록 만든다. 얼핏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의 부드러운 음색은 여기까지 오면 유연함과 여유까지 느껴진다. 그밖에 7번 트랙 “Imagine”도 정동하 보컬이 돋보이는 곡으로서, 그냥 넘어가기에 아까운 곡이다. 앨범 전체를 감싸는 부드러운 서정을 이어가면서도, 앨범에서 가장 벅찬 감정을 노래하는데, 정동하 보컬이 얼마나 벅찬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지 느끼기에, 이 곡만큼 좋은 게 없다. 베이시스트 서재혁 작사 작곡, 10번 트랙 “노을”도 부활 팬들 사이에서 숨은 명곡으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곡이다.

  
 

▲ 10번 트랙 “회상III (In Eternity) (Feat. 조PD)”

■ 실험, 부활의 서정과 만나다

이토록 부활 “서정” 앨범에는 정동하의 목소리와 함께 보석처럼 빛나는 트랙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이 앨범을 두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트랙은 따로 있었으니. 8번 트랙 “회상III (In Eternity)”다. “조PD”의 랩이 중심이 된 이 곡은 부활 음악 역사에서 드물게, 랩을 도입한 실험적인 트랙이다. 7집에서도 랩을 도입한 적은 있었지만, 이건 좀 더 본격적으로 랩에 다가간 느낌이다. 그냥 잠깐 랩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노래의 주도권을 조PD에게 주다시피 했을 정도다. 사실 부활은 대중이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굉장히 여러 실험을 했던 밴드다. 김태원도 여러 록 밴드들을 접하면서 음악을 시작한 만큼, 실험정신이 록 밴드가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라는 건 충분히 인지했던 터. 문제는 그의 실험이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는 거다. 그나마 2집에서 “회상 II”를 8분이 넘는 길이로 만들고, 이에 더해 “천국에서”는 10분도 넘는 길이로 만들어서, 여러 실험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준 게 가장 성공적이었다.
 
부활 특유의 부드러운 서정을 앞세운 본 앨범에서도, 김태원의 실험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좀 더 부활의 서정에 맞는 방식으로 능숙하게 적용된 느낌이다. 5번 트랙 “4.1.9 코끼리 탈출하다”는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곡 “Gabriel's Oboe”를 록 음악으로 편곡한 것을 시작으로, 전혀 다른 세 곡을 한 곡으로 합친 것 같은 독특한 구성이 인상적인 연주곡이고, 11번 트랙 “작은 너에게”는 5집에서 박완규가 부른 곡을 다시 만든 건데, 보컬에 조승우 배우를 데려와서 앨범에 다채로운 색깔을 더했다. 하지만 역시 본 앨범에서 드러난 실험의 절정은 10번 트랙 “회상III (In Eternity)”다. 이전 앨범들에서 드러난 부활의 실험은 김태원 본인의 음악적 역량을 뽐내려는 듯, 대중에겐 한껏 난해한 느낌만 주는 것이 많았는데, 이번 실험은 랩이라는 시도가 돋보이면서도, 부활의 서정과 최적의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한 느낌이다.
 
“회상III (In Eternity)”는 1987년 부활 2집에 수록된 “회상 III”를 원곡으로 삼은 곡으로서, 밴드의 20년 역사를 되돌아보듯, 조PD의 랩도 과거회상이라는 주제로 이어간다. 이 곡은 부활 밴드가 1집의 성공 이후에 겪은 여러 시련들을 함축해서 표현한 곡인데, 이때 이 노래를 만든 김태원은 1집의 성공 이면에, 이승철과 밴드의 주도권 다툼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던 중이었다. 이런 시련 때문에 마음에 공허함을 물리칠 수 없어서 대마초까지 손에 대는데, 이 시절에 대마초에 취한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 노래에서 “울음 참지 못해 밖으로 나가 버리”“소녀”가 바로, 당시 김태원의 애인이며, 현 김태원의 아내이다.

 
 

▲ 부활 2005년 당시 멤버들. 좌측부터, 채제민(드럼), 서재혁(베이스), 김태원(기타), 정동하(보컬)

■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 그리운 추억들

“소녀”는 자신의 애인이 그토록 힘든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는 걸 차마 슬퍼서 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린 거다. 이런 풍경을 담은 노래가 “회상 III”인데, 정규 10집 “서정”에서 흐르는 “회상III (In Eternity)”는 그런 비참하고 슬픈 느낌보다는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맞이한 현재, 과거를 회상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하는 감정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안도하면서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억을 향한 그리움, 그런 그리움만큼은 차마 놓지 못하는 심정도 느껴진다. 이 노래에서 조PD 랩 중에 가장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을 여기 나누고 싶다.
 
“한 방과 대박이란 세태에 물들어. 이리저리 뛰어 봐도 나중엔 부끄럽게도, 운명 앞에 고개 숙여 무릎 꿇어.”
 
사람이라면 으레 겪는 인생 역정들과 거기에서 만들어진 굴곡들. 이런 것들을 조PD의 랩으로 탁월하게 표현된 것을 듣고 있으면, 내 과거마저 돌아보게 된다. 이제 나도 서른이 넘었다.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추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30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다. ‘이젠 나도 어른’이라는 말도 부끄러울 정도다. 어른이 된 걸 넘어서, 어른인 게 당연해진 나이. 나는 여전히 어른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만, 이런 어색한 느낌을 갖는 게 창피해야 마땅한 나이. 내 인생에도 받아내기 벅찬 인생의 굴곡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 굴곡을 겪는 중이다. 이런 인생 역정들 견디도록 내게 힘을 준 건 무엇이었을까.
 
“회상III (In Eternity)”는 “밖으로 나가 버리”면서도 그를 향한 사랑만큼은 무대에 남기고 간, 당시 애인을 향해 편지를 보낸다. 그땐 참 고마웠다고. 당신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나 지금 여기에 있다고. 그런 당신의 순수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의 당신과 내 젊음이 그립다고. 내게도 이런 사랑이 있었다. 이 사랑과 똑같지 않을지라도, 내 인생을 지탱해준 마음들이 있었다. 특히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사촌형과 컴퓨터로 즐겁게 게임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나를 향해 머물던 사촌형의 다정한 마음. 그를 감싸는 엄마와 이모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길. 이런 추억들을 뒤로 한 채, 정신없이 인생의 길을 달리던 날들, 그 안에서 만난 인연들. 신앙, 친구, 술자리, 연애. 만나고 헤어지더라도, 여전히 내 안에 남은 그들의 온기.
 
이 노래에 참여한 래퍼가 조PD라는 것 또한 내 추억을 깊게 건드린다. 그가 누구였던가. 2004년 “인순이”가 참여한 “친구여”라는 노래로 대한민국의 마음을 울린 사나이였다. 이 노래가 유행할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그 땐 이 노래의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도 괜히, 신나는 힙합 리듬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 같은 걸 느끼곤 했는데, 이제 이 노래를 다시 들어보면, 아련하던 그리움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다. 내게 있어 조PD와 “친구여”라는 노래는 추억의 이름이거늘 “친구여” 가사는 지금 내 현실이 되었다.

 

 

▲ 12번 트랙 “희망에게 (For My Father)”

■ 기적이란 이름을 약속하세요

앨범의 마지막 12번 트랙 “희망에게 (For My Father)”를 들어본다. 요즘 나는 살면서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오래 나를 괴롭히던 우울증, 자살충동, 자기혐오, 이것들이 살면서 이토록 말끔하게 지워진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2023년은 정말 내게 우울증이 말끔히 사라진 개운한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반면, 내 인생 최대의 회의를 겪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 독립출판으로 내 작품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이 꿈에 관해 회의가 어느 때보다도 심해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찾아온 “희망에게 (For My Father)”는 내게 특별하다.
 
“모든 걸 나 포기할 즈음 그대가 저기 오네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일어나지요. 어느 땐 힘에 겨워도 약해진 내가 나아질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그를 사랑해도 되나요. 모든 걸 포기할 즈음, 소리 없이 지금 다가와 날 안아주네요. 기적이란 이름을 약속하세요. 일어설 테니 떠나가지 말아요.”
 
“희망에게”라는 제목 뒤에 괄호로 “For My Father”라는 말이 붙은 걸 주목하자. 여기서 “Father”라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사를 보면 그냥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건 게으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사에 “기적”“영원”이라는 단어들이 들어간 걸로 봐선, 하느님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곡을 만든 김태원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보면, 이런 인상은 더욱 강해진다.
 
내가 내 꿈에 관한 회의를 겪고 있을 때면, 내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가 내게 먼저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이런 심한 회의 속에서도 어렴풋이 다시 희망을 느낄 수 있는 건 모두 그분 덕분이다. 그분이 나의 희망이며, 그분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이 기적이다. 이 노래를 만들 당시, 김태원에게도 20주년을 맞이한 밴드의 역사에 기뻐하면서도, 앞으로 밴드가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한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그때 그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건, 모든 희망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었으리라. 그분 덕분에 부활은 그 자신의 이름처럼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이전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 감동을 주는 노래를 만들고 선보일 수 있었다. 나도 부활하고 싶다.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싶다. 오늘도 내게 희망을 주시는 희망의 근원이신 그분께, 조용히 마음으로 감사를 드려본다.

 


트랙리스트

1. 시간
2. 추억이면(異面)
3. 슬픔을 이기는 기도
4. Yellow
5. 4.1.9 코끼리 탈출하다 (Inst.)
6. 거미의 줄
7. Imagine
8. 회상 Ⅲ (In Eternity) (Feat. 조PD)
9. Second 8.1.1 (Inst.)
10. 노을
11. 작은 너에게 (Feat. 조승우)
12. 희망에게 (For My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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