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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넉살X까데호(Nucksal X Cadejo) - 당신께

인생명반 에세이 77: 넉살X까데호(Nucksal X Cadejo) - 당신께

 

신은 믿을 수 없어도, 시는 믿을 수 있기를

 

■ 시집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팔고 싶어서

올해 5월, 내 시집을 홍보할 기회를 얻으려고, 모 유명 스트리머를 만난 적이 있다. 나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 스트리머와 친분이 있어서, 내게 그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내 앞에 앉은 그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스트리머라서, 시집 홍보를 떠나서 기쁜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나와 마주한 자리가 좀 어색했는지, 서로 인사를 나누고도 표정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온갖 칭찬을 쏟아 부었다.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잘생겼다느니, 카메라가 외모를 다 못 담는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당신의 방송을 보면서 참 많이 웃었다고, 당신이 내게 준 웃음으로 힘든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으니, 당신이 내 영웅이라는 말도 했다. 그는 내 칭찬 세례에 웃음을 보였지만, 그마저도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마저 물리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분위기가 풀어져서 이야기가 술술 나와야 한다는 게 내 계산이었는데, 아직도 분위기가 어색하니 나는 잠깐 움츠러들었다. 그는 내가 방송에서 보던 모습과 실제 모습이 꽤 달랐다. 방송보다 실제로 낯을 많이 가리고 신중한 성격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최근에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때 내가 그를 보기엔 그랬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 시집을 그에게 홍보한다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려나 싶었다. 그래도, 어떻게 마련한 자리인데, 내 시집 얘기를 하긴 해야 했다.

 

나는 내 시집이 어째서 당신의 채널에서 홍보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즘 시장에 나오는 시들을 보면, 너무 극단적이다. 한 쪽은 시의 언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참신한 언어나 비유 대한 고민이 드러나지 않는, 일상적인 언어들만이 나열되어 있고. 다른 한 쪽은 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읽으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그 정서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한 은유들만 가득 찼다고. 내 시집 “심해어”가 이런 극단적인 시장에 다리를 놓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는 포부를 밝혔다. 내 시집은 시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이 떠올리는 근엄하고 상냥한 인상을 탈피하고 있다고. 나는 이 시집 안에 실린 시들이 실컷 희화화되길 바라고, 릴스, 틱톡 등에서 쉽게 소비되길 바란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기 위해선 동영상 플랫폼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스트리머는 이런 내 설명을 듣는 동시에 계속, 내가 그에게 건넨 시집을 여러모로 훑어보고 있었다. 내가 시집에 대해 할 말을 마치자,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내 시집을 들추어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깐 봤는데, 말씀하시는 게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거 같아요.”

 

조심스러운 말투였지만, 나는 그것이 분명 내 시집을 향한 칭찬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했던 그의 말이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니.

 

“이렇게 작가님을 만나서 직접 시집을 전해 받는 것보다, 서점에서 이 시집을 우연히 만났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거 같아요.”

 

그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 시집 들추어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시집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내게 건넨 말이 좀 이상했다. 칭찬은 맞는 거 같은데, 그 칭찬엔 어딘가 슬프고 안타까운 느낌이 있었다. 그때 내가 확실히 깨달았던 건, 이런 칭찬은 결코 예의 챙기느라 빈말로 던질 수 없는 말이었다는 거다.

 

 

▲ 넉살, 까데호

■ 시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 시를 배우다

우리 사이에 잠시 또 침묵이 흘렀고, 그는 내 앞에서 좀 더 편하게 풀어진 표정을 보였다. 그는 내게 우선 사과를 전했다.

 

“일단, 저는 이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요. 아마 다른 스트리머들에게 부탁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계속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최선을 다해 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그는 내 시집이 정말 좋다는 말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기 주변에 영화 평론 유튜브 채널 운영하는 사람들 얘기를 해주었다. 영화 평론하는 사람들 중에 본인과 친한 사람 정말 많고, 몇 번이고 협업을 시도했지만, 시도할 때마다 자신이 그런 협업을 진행하기엔 역랑이 부족하다는 것만 깨달을 뿐이었고, 기획 과정에서 벌써 틀어지는 일들뿐이라, 실제 협업 결과물로 이어진 건 없다고 말했다. 이건 본인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스트리머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평론 같은 대중에게 생소한 분야를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스트리머가 없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내 시가 아무리 참신하고 재밌더라도, 본인부터 일단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협업을 진행할지 감을 잡기 힘들뿐더러, 자기 주변 스트리머 중에서도, 시집을 가지고 콘텐츠를 진행할 역량을 지닌 사람이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대중에게도 시란 어려운 분야이기에, 어떻게든 협업 결과물이 나와도, 대중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내게 전했다. 그 다음에 그가 했던 말이 나를 다시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저는 시집에 굳이 이렇게 상업성을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스트리머 누구랑 협업을 해서 잘 됐다고 쳐요. 그런데 저는 시라는 게, 독자와 운명처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는데, 우연히 집어 읽게 된 그 시집에서 어떤 시가 운명처럼 다가오는 거. 이런 게 낭만이거든요. 이런 낭만에 상업성을 묻히게 되면, 그 낭만이 퇴색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부끄러웠다. 시를 쓰지도 않고, 시도 잘 모른다는 사람조차, 시인에게 이런 말을 건넬 수 있는데, 나는 어떻게든 시집 하나 더 팔려고, 시장이 어쩌고저쩌고 요즘 추세 얘기나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는 여기까지 온 거, 조금만 더 고집을 피우고 싶었다. 나는 시집도 상업성이 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에게 전했다. 요즘 시라는 분야는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상업성을 묻혀서라도 대중에게 시를 더 가깝게 만들고 싶다는 사명감이 내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난감한 듯 웃으며 얘기했다.

 

“그렇죠. 모든 예술은 상업성이 있어야죠. 하지만 시는 낭만이잖아요. 굳이 시까지 그렇게 되어야 하느냐는 거죠. 시는 운명처럼 독자와 만나야, 가장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이어서 그는 자신이 최근에 진행했던 협업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과 비교해 구독자도 네 배나 더 많은 채널과 협업을 했는데, 협업 영상 조회수는 오히려 최악으로 나왔다고. 이만큼 협업이라는 게 힘든 거라고. 유명한 누구랑 협업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게 아니라고. 협업을 진행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시너지가 있어야 하고, 그 시너지가 대중에게 전해져야 하는데, 그 시너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게 참 어렵다고. 물론, 콘텐츠 흥행이라는 게, 정답이 꼭 있는 게 아니라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잘 될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는 다시, 시에 상업성을 굳이 묻혀야겠느냐는 말을 강조했다. 이쯤 되니, 내가 더 이상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만남 시간이 좀 남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요즘 당신은 열정을 갖고 있느냐고. 그는 잔뜩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열정 같은 거 가질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최근에 겪고 있는 온갖 힘든 일들을 얘기하며 자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전했다. 내 시집 안에 들어있는 과격하고 비참한 언어들이 당신의 마음에 위로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내 말을 듣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고선, 이 말을 조심스레 뱉었다.

 

“감사합니다.”

 

 

▲ 1번 트랙 “펜을 들어” 라이브 영상

■ 내가 처음 시를 쓰던 때

그 스트리머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시에 관해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시란 무엇이며, 나에게 시란 어떤 의미였는지. 나를 돌아보면, 돈이나 벌겠다고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내 시집을 시장에서 돋보이게 하지 못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왜 그랬을까. 이런 사색하는 시간과 함께 내게 다가온 앨범이 하나 있었으니, 작년 한국 힙합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넉살”과 “까데호”의 합작 앨범 “당신께”가 그 주인공이다.

 

“당신께” 앨범은 화제성을 떠나서, 내 마음에 개인적으로 깊게 와 닿은 작품이었다. 이 앨범을 만든 음악인들과 무명작가에 불과한 나는 예술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앨범에 들어있는 연주와 가사에 집중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내가 갖는 위상과는 관계없이, 이 음악을 만든 사람들과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교감하는 기분이 든다. 이 앨범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사람이란 이토록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어도, 언제나 진심에 굶주리는 존재구나. 이토록 유명해졌는데도, 그토록 사람들로부터 갈구하며 찾아다니던 진심이란, 오히려 멀어져버릴 수 있는 거구나.

 

이 앨범은 “시”를 중심에 놓고, 모든 곡의 가사를 전개한다. 이 앨범에서 정의하는 시란 무엇일까. 넉살과 까데호에게 시는 무슨 의미였을까. 그들이 말하는 시, 그들이 시를 향해 가졌던 의미, 그것들이 내 마음에 어떤 울림으로 다가왔을까. 1번 트랙 “펜을 들어”를 들으며 느낀 감상은 이랬다. 그들에게 시란 진심이었다. 여기서 시는 진심과 동의어다. 진심으로 이뤄진 언어, 그것이 시다. 진심을 진심처럼 전하고 싶어서 조심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듯, 까데호의 연주는 본 앨범에서 가장 느리고 진지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런 연주와 함께 넉살이 뱉는 가사는 이러하다.

 

“말들은 너의 기분 나의 기분에 따라 해석이 별의별에. 말이 많은 사람은 죄를 짓기 쉽다던데, 나의 죄를 뺀 최고를 어떻게 드릴까.

 

단 한 번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진심을 쉽게, 내 죄를 뺀 최고를 당신께.”

 

진심이라는 게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내가 뱉은 말이 진심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 진심을 느낀 그에게 더욱 아픈 상처가 되기도 하니까. 시는 그래서 죄를 뺀 진심이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건 무엇이든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내 진심에서 아무리 죄를 빼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탄생한 시조차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사람마다 시에 대한 해석이 별의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만 생각하며 죄를 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런 언어를 시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시를 쓰겠다면, 부족하더라도 죄를 빼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자. 시는 죄가 빠진 상태로 나올 수도 있지만, 죄를 빼는 과정 자체를 시로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시는 가장 비참하고 격렬한 언어가 된다. 죄를 뺀 언어이든, 죄를 빼는 과정의 언어이든, 죄를 빼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 그런 최고를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마음, 시는 이런 마음에서 출발한다.

 

2번 트랙 “생일”은 제목을 처음 접할 때 으레 떠올리는 축하와 환희가 가득 찬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감성을 노래한다. 연주는 살짝 더 빨라졌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더 심각하고 긴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트랙에서 표현하는 삶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음악에서 생을 건졌다가, 이젠 반대.”

 

내게 시였던 음악이 내게 생명을 주었지만, 음악이 삶이 되자마자 음악은 내 목을 조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다음 트랙에서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다.

 

 

▲ 3번 트랙 “알지도 못하면서 (with 박재범)”

■ 몇 개의 시로 나는 이제 부르주아

3번 트랙 “알지도 못하면서”는 “박재범(Jay Park)”과 함께 만든 트랙이다. 여기서 넉살은 자신에겐 음악 그 자체였던 힙합, 그 힙합의 원류인 펑크(Funk)를 찾아간다. 자신의 음악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자기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 찾는 과정에서, 펑크 밴드 까데호와 넉살의 협업은 어쩌면 운명이었을 거다.

 

“몇 개의 시로 나는 이제 부르주아. 몇 개의 시로 어디든 날 불러줘. 멱살잡이 돈에서 날 풀어줘.”

 

처음부터 청자의 귀에 박는 언어유희가 인상적이다. “부르주아”에서 “불러줘”, “불러줘”에서 “풀어줘”로 이어지는 흐름이 흥미롭다. 이런 언어유희로 시와 돈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냈다.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돈이 아니라 시라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거다. 그런데 어째서 돈은 내 멱살을 잡게 되었을까. 어째서 시가 부르는 곳으로 갔다가, 돈이 잡은 내 멱살을 풀어달라고 간청하게 되었을까. 가난해서?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내게 돈이 없는데 돈이 어떻게 내 멱살을 잡을 수 있을까. 내게 돈이 있으니까 돈이 내 멱살을 잡을 수 있는 거다. 돈이 많아질수록 돈이 내 멱살을 잡는 일도 많아진다.

 

“비기(Notorious B.I.G.)”는 “Mo Money Mo Problems(더 많은 돈이 더 많은 문제)”라는 말을 남겼다. 자본주의는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고 사람들을 세뇌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돈은 하늘에서 그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은 누군가 노동을 한 결과물이다. 불로소득으로 번 돈이라도, 돈 그 자체가 이미 노동의 산물이기에, 돈을 갖는 것은 누군가의 몫을 갖는 거다. 누군가의 몫을 많이 가지는 게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을 많이 갖는다는 건, 오히려 책임져야 할 몫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많은 돈을 유지하기 위해선 마땅히 많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진정 풍요롭게 만드는 건 돈이 아니라 시다. 시가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만든다.

 

이 곡의 격렬한 펑크 연주는 “멱살잡이 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치열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이런 치열한 연주와 함께 박재범의 랩은 곡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TV에서 몇 번 봤다고, 난 네 친구가 아니야. 기본적인 예의 좀 갖춰줘. 나도 똑같은 사람이야. 너도 기분 나쁘듯이 나도 똑같이 기분 나쁠 수 있잖아. 허락 없이 상품 다루듯이 막 사진 찍어댔잖아. 난 기도 매일 밤 Oh, lord. 오지랖쟁이들 피하게 해주세요.”

 

박재범은 시대에 정면으로 반항한다. 방송도 예술도 노동도 모든 게 상품으로 환원되는 이 시대. 음악을 삶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은 상품이 되기를 택했지만, 막상 음악이 삶이 되어버리니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이끌어준 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도 말했듯, 시는 즉 진심이다. 박재범은 자신의 삶을 이런 꼴로 만들어버린 세상을 향해 외친다. 진심도 없이 내게 관심 갖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마. 내게도 당신의 진심을 줘. 나도 몇 개의 시로 부르주아가 되고 싶어. 나는 상품이 아니야!

 

 

▲ 4번 트랙 “굿모닝 서울” 라이브 영상

■ 시가 삶이 되니, 삶에서 시가 달아나버리는 모순

넉살에게 시는 음악이었다. 음악을 삶으로 만들기 위해, 넉살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4번 트랙 “굿모닝 서울”은 음악을 삶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을 담았다. 여기서 까데호는 음악을 삶으로 만들어가는 설렘과, 설렘 사이에 스며드는 환멸을 표현한다. 시를 삶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도시 풍경 속에 서서히 녹아들고, 삶이 된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꿈을 이룬 도시의 풍경은 오히려 삭막하고 답답하다. 꿈은 없고 온통 현실뿐이다. 이런 현실은 나를 더 이상 꿈꾸게 만들지 못하고, 꿈이 없으니 진심도 없다. 진심으로 살고 싶어서 서울로 향했는데, 서울에 왔더니 시는 달아나버렸다.

 

“석탄 혹은 다이아몬드, 선택하라면 난 불이 붙는 검은 돌. 차가움보다 뜨거움을 목에 걸고 싶어.

 

곡이 팔릴 때쯤, 실체 없는 유명세에 놀라.”

 

석탄은 열정, 다이아몬드는 돈이라고 볼 수 있다. 돈이 내 열정을 만든 줄 알았는데, 막상 돈이 내 손에 들어오니, 열정은 달아나버리는 현상이 벌어진 거다. 이걸 깨달은 넉살이 말한다. 이젠 돈이 아니라 열정을 갖고 싶다고.

 

충분히 유명해지고 충분히 돈이 많아졌지만, 이런 유명세와 돈을 만든 건, 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도무지 내가 쓴 시, 내 진심에 관심이 없다. 내 진심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만 내 곁에 모인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만 주변에 많아진다. 그러니 이건 “실체 없는 유명세”인 거다. 이런 실체 없는 유명세에 놀라고, 놀란 마음은 도시와 함께 빠르게 식어간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숨이 들이켜, 내 폐 속엔 도시의 먼지. 그건 살기 위해 땅을 박찬 당신의 열기. 자신이 먹기 위해 아님,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뿜어내는 매연은 그저 해로운가.”

 

시가 달아나버린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이 도시에 이렇게 많은데, 시가 내 삶에 꼭 필요한 걸까. 사람들은 시가 없어도 저렇게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데, 저들을 해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 없는 삶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실체 없는 유명세”에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고민이 나를 방황으로 이끈다. 대체 시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진심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방황은 나를 “숲”으로 이끈다. 여기서 숲은 상쾌하고 여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길 잃은 사람들이 원치 않게 당도한 공간이다. 숲에는 길이 없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방향조차 모호하다.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6번 트랙에서 까데호가 연주하는 숲이란 2번 트랙 “생일”에서 표현한 삶과 같다. 누군가는 삶을 축복이라 부르지만 내게는 삶이 저주였던 것처럼, 누군가는 숲을 평화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숲이 방황인 것이다. 넉살은 방황 끝에 문득 깨닫는다.

 

“우습게도 방황은 삶이고 난 바람이었어. 그냥 제대로 살아보는 게 내 바람이었어.”

 

“강이채”의 바이올린 연주는 넉살의 방황을 깨달음으로 이끈다. 넉살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그의 바이올린은 가장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방황이 곧 삶이 되고, 숲이 곧 집이 되는 순간이다. 내가 시를 쓸 수 있다면 도시든 숲이든 어디든 내 집이고, 어디든 내 놀이터다. 시가 삶이 되자, 시는 삶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달아나버린 시를 쫓아가, 숲으로 향하는 과정 또한 시가 된다. 제대로 사는 것과 방황하는 것 모두 내 바람이었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 방황했던 거다. 방황으로 빚은 나의 삶이 곧 나의 시였다. 삶은 모순의 연속이다. 모순을 위해 오늘도 나는 기꺼이 방황한다. 모순은 시의 가장 중요한 재료니까. 방황이 삶이고, 모순이 시라는 걸 깨닫자, 세상 모든 것이 “죽”처럼 편안하게 잘 넘어가는 느낌이다.

 

 

▲ 6번 트랙 “숲(with 강이채)”

■ 당신이 있어 내 진심은 의미가 있다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찾지. 굴러 떨어지면서 동시에 착지. 두 개인 듯 하나. 인생은 착시. 눈물만 보이네. 허나 미소도 있지. 내 젊은 날의 위치, 길을 잃은 길치, 목이 타 마른 기침. 거울 속에 비친 가난한 리릭시스트. 말해줘 빨리 버려 버리게, 그냥 돈이나 벌어 버리게.”

 

8번 트랙 “당신께”를 시작하는 넉살의 언어유희가 놀랍다. 세상을 식은 죽 먹는 것처럼 다루고 있지 않은가. 깨달음에 이른 넉살에게 두려운 건 없다. 시 안에선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찾”는 것도 가능하고, “굴러 떨어지면서 동시에 착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를 만드는 건 모순이니까, 시와 함께라면 두려운 게 없다. 넉살에게 시란 힘이며 용기다.

 

까데호는 넉살의 언어유희와 함께 질주한다. 이들의 질주는 점차 폭주로 번져간다. 시를 가진 그들에게 두려운 건 없으니, 아무도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그들의 폭주는 시가 여기에 이를 때 최고조에 이른다.

 

“당신께 세상은 쇼미더머니. 당신께 세상은 소유와 명예. 당신께 세상은 돈. 당신께 세상은 속된 독. 당신께 세상은 엄마. 당신께 세상은 아들. 당신께 세상은 닿지 않는 하늘, 작은 구멍 바늘.”

 

그들의 폭주는 곧 비상(飛上)한다.

 

“하지만 오늘은 세상 위를!”

 

무엇이 넉살과 까데호를 날아오르게 했을까. 시가 그들을 날아오르게 했다. 시는 날아오르게 하는 힘이다. 이 곡이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트랙 이름이 “시”라는 건, 그들을 날아오르게 만드는 힘이 시라는 걸 드러낸다. 시는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시와 함께라면, 나는 언제든 세상 위로 날아갈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세상이란 마치 장난감 같다. 하늘에서 바라본 세상이란 그 전체가 놀이터 같다. 우리가 “세상 위”로 날아가기 위해선 세상이 필요하다. 시는 삶이 필요하고, 삶은 시가 필요하다. 이런 모순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다. 앞서 5번 트랙에서 했던 연주를, 9번 트랙에서 또 다시 들려주며 앨범을 마치는 건, 그들에게 시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려는 뜻일 터. 그래서 5번 트랙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거다. “인생이 시가 아니라면 거짓말이야”

 

내가 시를 왜 쓰는지, 이젠 알겠다. 그런데 시의 힘으로 하늘을 날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를 왜 쓰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는 걸까. 나를 위해? 그것도 맞겠지. 하지만 시는 세상이 있어야 쓸 수 있다. 세상을 살면서, 시로 돈을 벌고 싶은 욕심이 생길 테고, 이루지 못한 욕심은 나를 방황하게 만들 테지만, 이룬 욕심조차 나를 방황하게 만들 테지만, 그런 방황들도 모두 시가 될 것이다.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시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놓지 않을 거다. 나는 시를 쓰기 위해 방황할 거다. 그렇다면, 나는 왜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세상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당신께” 쓰는 시다.

 

진심, 모순, 하늘. 시를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 세 단어를 입에 넣고 굴려본다. 윤동주 시 “별 헤는 밤”을 떠올린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등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처럼, 진심, 모순, 하늘, 이 세 단어를 입에 넣고 굴려본다. 최승자 시 “내 청춘의 영원한”을 떠올린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이 세 단어로 청춘의 트라이앵글을 만든 것처럼, 진심, 모순, 하늘, 이 세 단어를 입에 넣고 굴려본다. 시가 참 맛있다. 시가 맛있으니, 세상도 맛있고, 삶도 맛있다.

 

 

▲ 8번 트랙 “당신께” 라이브 영상

■ 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신

시는 사람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신이 아닐까. 넉살은 “당신께”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신께선 주지 않네, 삶을.” 이런 불평은 마치, 내 삶은 내가 창조하는 거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시는 삶을 창조하는 힘이다. 시가 있기에 삶은 의미를 갖는다. 진심이 있으니까 삶은 의미를 갖는다. 의미 없는 삶이라는 게, 더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그런데 살아갈 가치라는 건 누가 정하는 걸까. 세상이 내게 가치를 주는 걸까. 그런데 세상은 누가 만든 걸까. 내 삶이 끝나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까. 내가 없는 세상이 내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있으니 세상도 의미가 있는 거다. 시를 쓰는 사람은 삶과 세상을 창조한다.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는 신이다. 시가 그리는 진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신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시를 쓰기 때문이다. 참 재미있는 게, 세상에 시를 쓰는 사람이, 시를 따라 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당신도 시를 쓰고, 당신도 진심으로 살아간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당신께 쓰는 시다. 당신은 신이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고, 내가 당신을 만들었다.

 

시는 원래 신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詩)의 한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글자는 말씀 언(言) 자와 절 사(寺) 자가 결합한 형태를 갖고 있다. 절은 불교니까, 신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나는 진리가 곧 신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신을 믿지 않더라도, 진리는 믿는다. 기독교는 진리를 신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불교는 신을 진리라고 표현한 거다. 경전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경전 구절에 운율을 붙인 것이 시의 시작이었다. 시란 본래 쉬운 길을 위해 만든 건데, 이제는 사람들이 시를 어렵게 생각한다니, 이것도 시가 만든 세상의 모순이겠지.

 

불교만 얘기하면 편파적이니, 기독교 얘기도 해야겠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시는 어쩌면, 신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신을 친근하게 부르기 위해 만든 이름이 아닐까. 신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만 빼면, 시가 되니까. 신이라는 말을 느리게 발음하면, 시인이 되니까. 시는 우리를 신과 가깝게 만드는 힘이다. 신은 우리 삶에 의미를 주고 행복을 준다. 시가 담당한 역할도 신과 다르지 않다. 시를 믿을 때, 삶의 의미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시를 믿을 때, 행복은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신이 너무 거룩한 존재라서 믿을 수 없다면, 시를 믿자. 우리 모두, 시를 따라 진심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 모두, 신은 믿을 수 없더라도, 시는 믿을 수 있기를.

 


트랙리스트

1. 펜을 들어
2. 생일
3. 알지도 못하면서 (with 박재범)
4. 굿모닝 서울
5. 인생이 시가 아니라면 거짓말이야
6. 숲 (with 강이채)
7. 죽
8. 당신께
9.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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