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65: 백예린(Yerin Baek) - 선물
노래가 선물이 되는 순간
■ 취향은 언제나 진심이다.
“늘 우리가 듣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나처럼 울고 싶은지. 왜 자꾸만 후회되는지. 나의 잘못했던 일과 너의 따뜻한 마음만 더 생각나. 그대여 나와 같다면, 내 마음과 똑같다면, 그냥 나에게 오면 돼. 널 위해 비워둔 내 맘 그 자리로.”
박상태 원곡, 김장훈, 김연우가 불러서 화제가 된 노래 “나와 같다면”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떠나간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취향을 떠올리곤 한다. 위에 가사는 그런 우리들의 풍경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저 노래 한 곡 들었을 뿐인데,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온갖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런 경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취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취향은 언제나 진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기에, 취향을 공유하는 것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내 삶에도 여러 인연이 있었는데, 그 인연들 중에는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이제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이런 생각에 이를 때면 왠지 외롭고 서글퍼진다.
사람은 떠나도 취향은 남는다. 나를 떠나간 사람들, 그럼에도 만나고 싶어도 당장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영화를 보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책을 읽어본다. 그 사람의 취향을 따라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곤 한다. 그래서 더욱 슬퍼지기도 하고, 더욱 그리워지기도 하고, 더욱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버린 슬픔과 그리움에 지쳐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지쳐 쓰려져 있다 보면 슬퍼할 겨를도, 그리워할 겨를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나는 늘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런 식으로 달래곤 했다. 물리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려나, 아무튼.
내가 항상 사람을 만날 때, 취향이 확고한 사람을 선호하는 건 이런 이유인 것 같다. 취향이 희미한 사람은 도무지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취향은 언제나 진심이라고 적었다. 취향이 희미한 사람은 진심도 희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그렇진 않을지라도, 취향이 희미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진심을 남에게 전할까, 이런 걱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취향이 나와 잘 맞으면 물론 좋겠지만, 꼭 나와 취향이 잘 맞을 필요도 없다. 자신의 취향을 요리조리 풍부하고 치밀하게 설명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자신이 어떤 걸 사랑하고 있는지 탁월하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 진심을 전하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진심을 전하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진심이라는 건, 그 마음이 일어나는 당사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지, 상대방에겐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 실체가 없는 진심이라는 걸 전하려면 역시 기술이 필요하다. 진심이라는 단어만 쓰고서, 울고 소리치고 한다고 내 진심이 모두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그게 쉬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단순히 마음만으로는, 진심이라는 그 단어만으로는 전혀 내 진심이 상대방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 느꼈다. 이럴 때, 진심을 전하는 기술이란 얼마나 중요할까!
예술은 진심을 전하는 기술이다. 픽션을 창작하더라도, 현실에선 표출하기 힘든 진심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픽션이 사용될 때, 그 픽션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진심이 담긴 예술은 많다. 그러나 진심을 느낄 수 있는 예술은 몇 되지 않는다. 예술로 자신의 진심을 타인에게, 세상을 향해 전하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진심이 느껴지는 예술, 이건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찬사이지만, 이런 상투적인 찬사가 어울리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난 사실 어떤 작품에 대한 찬사를 작성할 때, 진심이 느껴진다느니 그런 말은 웬만해서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할 음반은 정말 진심이라는 단어를 빼놓고선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음반이라서, 상투적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게 될 것 같다.
음반 이름부터가 “선물”이지 않은가. 진심이 담긴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선물, 말만 들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벌써부터 누군가의 애정이 전해져올 것 같은 그런 단어라서. 이 음반의 제목이 속에 담고 있는 노래들과 잘 어울려서. 그만큼 이 음반은 진심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백예린, 이제는 한국 가요계에서 노래 잘하는 걸로는 따로 증명이 필요 없는, 이름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존재다. 그런 그녀가 올해 9월 우리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 음반 하나 사려고 돈을 쓰는 건 나인데, 왜 오히려 이 가수한테서 내가 선물을 받는다고 느끼는 걸까? 물론 가수 본인도 음반 제작하느라 돈을 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더라도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저 이 사람에게서 받는 게 노래뿐인데, 이게 어떻게 나한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노래를 생각하면, 나는 가끔 꽃을 떠올린다. 꽃이 어떻게 선물이 될 수가 있지? 먹지도 못하는데. 먹으려면 먹을 순 있겠지만, 꽃만 먹는다고 배가 불러오는 것도 아닌데. 그냥 보기에 좋을 뿐이고, 그냥 좋은 향기를 내뿜을 뿐이다. 게다가 꽃다발은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한 달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다. 내 배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옷처럼 나를 따스하게 덮어주지도 못하는, 그렇다고 생명이 오래가지도 못하는 이런 게, 어떻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 꽃이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노래도 선물이 될 수 있을 터. 제목을 “선물”이라 짓는다고, 이것이 내게도 곧 선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음반을 가수 백예린이 내게 준 선물로서 받아들였다. 이 음반 속 어떤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이것을 선물로서 받아들이게 했을까.
■ 인디라서 가능한 지극히 사적인 리메이크 앨범
내가 백예린을 알고 팬을 자처하게 된 지는 사실 오래되었다. 2016년 “Bye bye my blue”를 발표하고 활동하던 때부터 좋아했으니 말이다. 해당 노래가 들어간 “키노 앨범”을 소장하고 있는 건 물론이고, 신보가 발매되면 무조건 들었다. 백예린의 음반은 몇 년 전부터 계속 한 번쯤은 꼭 다루고 싶었으나 왠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그런데 “선물”을 듣고 있으려니, 그 안에 담긴 그녀의 진심을 느끼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글을 안 쓰고선 못 버티겠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백예린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행보를 걸어왔다고 평할 수 있다. 우선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대형 기획사의 품을 떠나서, 인디 레이블에 소속된 것도 그렇거니와, 그곳에서 발매한 앨범들이 모두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예린 정규 1집 “Every letter I sent you.”가 더블 CD 사양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내 눈을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다. 누가 자신의 정규 1집을 더블 CD 사양으로 내는가. 더블 CD 사양으로 앨범을 내는 것부터가 요즘 시대에 힘든 일인데, 그걸 정규 1집으로 낸다는 게, 확실히 인디 레이블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모험적인 행보임에 틀림없었다. 국내에선 생소한 장르인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지향하는 더 발룬티어스(The Volunteers)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 나온 “선물”이라는 EP 음반도 마찬가지. 이것 역시, 인디 레이블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사적인 취향이 잔뜩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음악을 하는 첫 번째 목적이 돈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돈을 더 많이 벌려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널렸을 텐데, 굳이 이런 모험적 행보를 이어나가는 건, 음악에 진심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특히 이번에 소개할 음반 수록곡들을 살펴보면, 이 확신은 더욱 강해진다. 이 앨범의 수록곡들은 백예린 본인의 선택과 더불어 프로듀서의 추천이 곁들여져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흔히 알려진 리메이크 앨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는 김광석 “다시부르기 2”와 윤도현밴드 “한국 Rock 다시 부르기” 그리고 아이유 “꽃갈피”가 있을 텐데, 이들을 보면 각자 지닌 지향성이 명확하다. 김광석의 작품은 한국 포크를 재조명하는 의미가 강했고, 윤도현밴드의 작품은 제목 그대로 한국적인 록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담았다. 아이유의 경우, 지나간 세월을 현시대 음악으로 재해석한다는 목적이 뚜렷했다. 그런데, 이번에 백예린이 리메이크 앨범이라고 내놓은 “선물”은 뭐가 없다. 여기 실린 곡들의 원곡들을 각자 비교해 봐도, 어떤 공통분모로 묶어야 할지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장르도 제각각, 곡이 나온 시기도 제각각, 원곡을 발표한 뮤지션들의 활동 분야도 인디에서 메이저까지 제각각이다. 백예린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묶일 수 없었던 이름들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이 앨범은 백예린 본인의 지극히 사적인 취향을 전시하는 작품이라는 얘기가 된다.
■ 취향과 개성으로 빚어낸 앨범의 미덕
이 앨범이 갖는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중구난방 곡들을 한 데 모아놓으니, 오히려 백예린이라는 이름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앨범은 앨범으로서의 미덕을 충실히 시행하고 있다. 전혀 묶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음악들이, 백예린이라는 이름 아래, “선물”이라는 이름 아래, 이토록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앨범에서 원곡과 다른 편곡으로, 특별히 나의 이목을 끈 곡이 세 곡 있는데, 그것은 “그럴때마다”와 “Antifreeze” 그리고 “한계”다. 이 세 곡은 백예린의 음색과 창법에 맞춰 원곡과 큰 차이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원곡과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백예린 본인이 이 노래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가늠하게 만든다. 이 노래들을 너무 좋아해서, 자기 목소리에 더욱 어울리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성들인 편곡이 느껴진다. 물론 편곡에 백예린이 모두 관여하진 않았겠지만, 이 노래들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바뀐 편곡에 맞춰 자신의 목소리를 정성껏 조율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앨범의 시작을 담당하는 1번 트랙 “그럴때마다”는 시작부터 백예린의 존재감을 청자에게 깊게 각인시킨다. 처음에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등장하고, 피아노가 바로 뒤에 따라 나온다. “토이(Toy)”의 원곡은 여러 악기와 여러 보컬을 배치해, 다채롭고 역동적인 사운드로 사랑의 활기를 표현했다면, 이 곡은 악기라고는 피아노 단 하나만 놓고서, 백예린의 목소리에 깃든 진중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원곡에서 주로 느껴지는 정서가 즐거움이라면, 백예린의 곡에서 주로 느껴지는 정서는 편안함이다.
곧이어 2번 트랙을 차지한 “Antifreeze”에서는 1번 트랙에 비해 풍성해진 사운드를 느껴볼 수 있다. “검정치마”의 원곡과 백예린의 곡 모두에게서 가장 잘 드러나는 가사는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는 문장이다. 그런데 원곡과 백예린의 곡에서 느껴지는 이 문장의 느낌은 지극히 다르다. 원곡은 “춤”보다 “싸움”이 돋보이는 느낌이었다면, 백예린은 “싸움”보다는 “춤”이 돋보인다. 이들이 표현하는 춤의 모양도 각자 달라 보인다. 원곡에서 표현하는 춤이란 찬바람에 떨리는 가슴을 떨쳐내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면, 백예린이 표현하는 춤이란 사랑의 확신에 가득 차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즐거운 춤이다. 원곡이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느낌으로 노래한다면, 백예린은 겨울이 이미 지나고 있는 것처럼 노래한다.
앨범의 절정을 담당하는 5번 트랙 “한계”는 “넬(Nell)”의 원곡과 백예린의 곡 모두, 록 밴드 사운드와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결합이라는 결정적인 공통점을 공유하지만, 이 요소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감성에 차이를 두었다. 특히 곡이 절정을 향해가는 “이제 그만 둘래요. 빼곡히 들어선 의미라 했지만, 나에겐 공허하기만 한, 일방성의 무의미함. 방랑과 방황의 차이.” 이 부분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이 두 곡이 악기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그 차이점을 가장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원곡은 악기와 보컬이 같이 가는 느낌이 강했다면, 백예린의 곡은 보컬이 악기를 이끌고 가는 듯, 보컬이 훨씬 돋보이면서도 악기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느낌이 강하다. 원곡은 몰아치는 사운드로 떠나기 직전 체념에 닿는 과정을 표현했다면, 백예린의 곡은 절제가 돋보이는 사운드로, 떠난 직후 체념을 지나온 슬픔을 표현한 것 같다.
이토록 한 곡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 이유는 뭘까? 백예린은 자신이 이 곡들에게 가진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원곡이 가진 감성을 어설프게 따라하면 안 된다는 걸 가장 먼저 깨달았던 것 같다. 어설프게 원곡을 따라할 바에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곡을 재해석해보자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백예린에게 맞춰서 새롭게 해석된 곡은 온전히 백예린의 목소리로 표현되어, 백예린의 진심을 더욱 잘 전할 수 있게 변신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 곡들에 담긴 백예린의 애정이 진심이고, 이 곡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감성이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
■ 그녀의 음악은 언제나 선물이었다.
이 앨범의 트랙 배치를 보면, 이 앨범이 서사적 구조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 이 사랑의 시작과 끝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면서도, 음악적 기승전결까지 갖추고 있다. 1번 트랙에서 사랑의 설렘을 표현하고, 2번 트랙에서 커져가는 사랑을 표현하다가, 3번 트랙 “돌아가자”(이영훈 원곡)에서는 언뜻 드러나는 이별의 은유와 그 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드는 그리움으로 복합적인 감성을 부드럽게 녹여낸다. 4번 트랙 “왜? 날”(장기호 원곡)에서는 사랑의 편안함을 표현하면서 청자에게 휴식을 전한다. 5번 트랙에선 4번의 휴식과 대비되는 절정을 향해 천천히 흘러가며, 청자를 순식간에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 6번 트랙 “산책”(소히Sorri 원곡)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내세우며, 지난 트랙에서 선보였던 이별의 감정을 이어가는 한 편, 좀 더 편안해진 음색으로 청자의 마음속 아픔을 보듬어준다. 그렇게 1번 트랙을 다시 틀면 사랑이 “반복된 하루 사는 일”처럼 다시 설렘으로 돌아온다. 이 앨범 같은 하루를 살아간다면 아무리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이 앨범이 왜 선물이 되는가에 대해 얘기해보자. 꽃은 시들어도, 그 꽃과 함께 했던 순간은 그 향기와 함께 추억으로 간직된다. 그렇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추억이다. 그래서 꽃은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훌륭한 예술은 감상하는 그 자체로 좋은 추억이 된다. 백예린의 진심과 정성으로 빚어낸 재해석들을 이 앨범을 통해 듣고 있노라면, 이 앨범을 듣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노래들과 함께 만들어갈 추억들을 괜히 기대하게 된다. 좋은 예술, 좋은 노래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다. 자신이 어떤 예술을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는 확고한 취향이란, 그래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 백예린은 이 앨범을 통해서, 자신이 이 곡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얼마나 그들을 자기 삶에 깊게 녹여냈는지 최선을 다해 표현했다.
역시, 취향과 진심이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궁극의 가치라는 결론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다. 세상 모든 걸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지만, 타인의 진심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위에 진심을 전하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이 음반 속 노래들은 진심이 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진심을 전하는 탁월한 기술까지 갖추고 있어, 이 음반이 가진 가치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이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을 뿐. 이런 노래가 있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뿐. 그야말로 이건 선물이다. 선물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앨범은 자신의 취향에 백예린을 두지 않는 사람들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백예린이라는 이름에 오랫동안 열광해온 팬들은 확실히 이 앨범을 선물로 받아들일 것이다. 백예린의 “선물”을 들으며, 다시 한 번 사람의 진심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삶의 의미를 집이니 음식이니 여러 물질로 표현하지만, 역시 우리를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나를 향한 누군가의 진심일 것이다. 그 진심이 없다면, 그것이 나를 위해 오지 않는다면, 좋은 집이고, 맛있는 음식이고, 다 재미없을 것이다. 나와 진심을 공유하고,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 좋은 집도, 맛있는 음식도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녀의 음악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녀의 음악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물이었다. 그녀가 이때까지 발표했던 음반들의 제목을 보면 딱 그런 게 느껴진다. 그녀는 첫 정규앨범에서 자신의 노래가 모두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했고, 두 번째 앨범에서는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자기네들에게 들려달라고 말했으며, 자신이 활동하는 밴드의 이름은 자원봉사자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선물들은 언제나 노래하는 본인의 솔직함이 드러나는 형태로 다가왔다. 그녀가 자기 노래에 솔직해지는 만큼, 그녀의 노래를 듣는 우리도 그녀를 향해 솔직해질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추구하는 게, 자신의 진심을 타인에게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걸, 그녀는 깨달은 것 같다. 확고한 취향이 확고한 진심을 만드는 법이니까. 그녀가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올해 2021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아직도 “코시국”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찬바람마저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그녀의 “선물” 속에 담긴 진심이 있어, 올해 겨울도, 내년 겨울까지도 안심하고 따스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노래에 담긴 진심이 우리들을 “얼어붙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희망이 피어난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이 말처럼 어떤 절망도 춤을 추며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선물을 들고 찾아와준 가수 백예린에게 몇 년 간 지켜봐왔던 팬으로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트랙리스트
1. 그럴때마다
2. Antifreeze
3. 돌아가자
4. 왜? 날
5. 한계
6.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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