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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미선이(Misoni) - Drifting

인생명반 에세이 85: 미선이(Misoni) - Drifting

 

0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 난 화장실에 앉아 있어요

“다시 진달래 피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타고. 개 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 꽃이 지네, 올해도.”

 

봄만 되면, 나는 미선이 “Drifting” 앨범에 “진달래”를 찾곤 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이 여기저기 잔뜩 만개하더라도, 여전히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내가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내가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그런 봄에도 웃을 없는 당사자가 되면 “진달래”가 내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들곤 했다.

 

이 앨범은 지금은 “루시드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가수의 작품이다. 그가 록 밴드 “미선이”를 결성하여 1998년에 발표한 1집 앨범이다. 나는 이 앨범을 고등학생 시절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2007년 판 목록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목록에 있는 앨범들 중에서, 딱 한 번 듣고 속수무책으로 빠져든 앨범이 드문데, 이 앨범이 딱 그렇게 빠져든 앨범이었다. 루시드폴 모습에선 거의 볼 수 없는 거칠고 우울하고 날선 감성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저 거칠기만 한 건 아니고, 특유의 섬세함으로 거친 감성을 다듬는 면모가 돋보인다.

 

이 앨범에는 두 개의 삶이 존재한다. 사랑 속에서 태어나 혐오로 자라서 진달래로 피어난 삶. 혐오 속에서 태어나 사랑으로 자라서 연꽃으로 피어난 삶. 하지만 시간은 두 개의 삶 모두를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난 화장실에 앉아 있어요.”

 

이 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가사의 첫 줄이다. 이 첫 소절이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가사가 이어지는데, 이게 다 화장실에 앉아서 하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놀랍다. 변기에 앉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니. 우리의 생활을 이토록 적나라한 민낯으로 드러낸 가사가 또 있으랴.

 

“마음속의 울림은, 내 입속의 신음은, 항상 그대에겐 짐이었을 뿐. 곳곳을 둘러봐도, 성한 곳 하나 없고, 난 언제까지 썩어 갈 건지.”

 

변기에 앉아 펼치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생각은 점차, 뼛속까지 시린 환멸로 번져간다.

 

 

▲ “루시드폴”로서 무대에서 부른 1번 트랙 “Sam”

■ 개 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저 밑으로, 우리나라 떨어지네. 세상은 아직도 자꾸 미쳐가네, 떨어지네, 우릴 조여오네, 그들은.”

 

진달래는 황폐한 민둥산에서 잘 자라는 꽃으로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한국인의 국민성을 은유한다. 대한민국 제2의 국화(國花)라고 불릴 만큼, 한국에서 대중적인 꽃이었으나, 21세기 들어서 한국 땅 내에 개체수가 빠르게 줄고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습성이 있는데, 한국의 기후가 변하고 공해가 심해지면서, 소나무가 적어졌고 따라서 진달래도 줄어든 것.

 

척박한 곳에서도 잘 살아가던 한국인들. 그들의 터전이 풍요로워지자, 풍요는 곧 낭비가 되고, 낭비는 곧 공해가 되었다. 진달래가 피워내던 삶은 점차 사라지고 한국은 병들어간다. 저질 언론을 생산하는 데 종이를 낭비한 탓에, 국민들은 저질 언론에 병들어간다. 그 병명은 “치질”이다.

 

이 앨범에서 “Drifting”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동하는 관문이니까. 5번 트랙에서 죽음을 맞이한 삶은 6번 트랙에서 또 다른 삶으로 환생한다. 환생한 삶은 이전 삶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피부는 기억보다 예민하게 이전 삶의 죽음을 느낀다. 사랑보다 죽음을 먼저 깨달아버린 삶에는 혐오만이 가득하다.

 

혐오는 삶을 고립으로 이끌었고, 고립은 삶을 “섬”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 평화를” 갈구하다가 깨닫는다. 이토록 고립되어선 마음에 평화가 없겠구나. 고립에서 벗어나려 “Shalom” 세상을 향해 노래 부르며 인사한다.

 

그렇게 도달한 “시간”은 마치 연꽃처럼 피어난다. 연꽃은 흙탕물이 묻지 않는 꽃으로서, 불교에선 세상을 정화하는 상징으로 내세운다. 연꽃은 흙탕물에서도 잘 자라 꽃을 피우기에, 그 모습이 더러운 세상에서도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는 부처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시간이다. 이 앨범에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이는 2001년 본 앨범의 확장판 “Drifting Again”이 발매되었을 때, 3번 트랙 제목이 “진달래”에서 “진달래 타이머”로 굳이 변경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3번 트랙은 8번 트랙 “시간”과 수미상관 구조로 구성했음을 알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이젠 헤어졌으니 나를 이해해 줄까, 사랑 없이, 미움 없이. 나를 좋아했다면 나를 용서하겠지, 미련 없이, 의미 없이.”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기에, 이별이 관계를 시작점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모든 미움과 미련이 시간에 씻겨 내려갔다. 씻겨 내려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의미와 사랑마저도 시간에 씻겨 내려갔다. 관계가 시간이 흐르며 원을 그리다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관계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3번 트랙 “진달래”

■ 시간을 원을 그리며 돌고 돈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직선으로 뻗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은 창세 이후로 단 한 번도 직선으로 뻗어간 적이 없다. 모든 시간은 돌고 돈다. 시간은 곧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돌아야 시간이 간다면, 시간은 직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고 보는 게 맞다.

 

우주에 돌고 도는 행성이 지구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에 모든 행성은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돌고 돈다. 우주 전체가 돌고 돌아 원을 그리며 시간을 지어낸다. 시간에 직선이 없다면, 우주에 직선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직선이란 우리 관념일 뿐인 거다. 원이 그렇듯,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시간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건 없다. 이건 아무리 봐도 진리다. 영원한 건 없다는 말조차 영원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틀린 말 같다.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이 곧, 영원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영원은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증명하며 영원하다.

 

시간은 공처럼 둥글다. 둥근 공은 0이다. 0은 공(空)이다. 시간은 모든 걸 병들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은 0이다. 0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 이 앨범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나를 0으로 데려다준 덕분에, 내 슬픔이 0에 이른다. 0은 영(靈)이기도 하고, 영성(靈性)은 영생(永生)에 이른다.

 

영생이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 후에 탄생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곧 영생이다. 시간 속에서 탄생은 또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또 탄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깨닫고, 그 깨달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다.

 

이토록 우울하고 거친 감성을 담은 앨범이지만,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건, 시간이 나를 0으로 데려간다는 걸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가진 필연적인 공허함, 그 공허 속에 내 모든 걸 씻는다. 미움도, 미련도, 의미도, 사랑도, 모든 걸 이 앨범에 담긴 시간에 씻는다.

 


트랙리스트

1. Sam
2. 송시
3. 진달래
4. 치질
5. Drifting
6. 섬
7. Shalom
8. 시간
9. 두번째 세상
10. Drifting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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