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91: 이랑(Lang Lee) - 신의 놀이
슬픔과 고통은 신의 놀이
■ 내겐 무섭도록 감동적인 노래
그 어떤 요란한 외침도 없이, 그저 잔잔하고 건조하게 읊조리는 이랑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두려움에 떤다. 내겐 마릴린 맨슨 노래보다, 메이헴 노래보다, 슬립낫 노래보다, 이랑의 노래가 훨씬 무섭게 다가온다. 이랑의 노래는 무서울 만큼 감동적이다. 나는 그 감동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나에게 박힌 이랑의 첫인상이란 이랬다.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현장에서, 자신이 수상한 트로피를 곧장 관객들을 대상으로 경매에 부치는 모습. 이랑은 자신의 노래 “신의 놀이”를 통해,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일을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놀이는 놀이일 뿐, 생활이 될 수는 없었다. 놀이에 열중하느라, 생활이 궁해진 입장에선, 상금도 없는 트로피의 영광이란, 삶을 이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나도 신의 놀이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놀기만 하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그저 놀고 싶을 뿐인데, 신의 놀이를 즐기고 싶을 뿐인데, 신의 놀이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세상은 나를 “지겹게 먹고 싸고” “저주 받은 것처럼 늙어”가는 삶으로 떠미는가.
“신의 놀이”는 이랑의 2집 앨범이다. 1번 트랙에 같은 이름을 가진 곡이 실려 있다. 나는 이 앨범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충격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정도로 무서운 감동을 받아서, 감히 이랑의 다른 앨범을 들어볼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그 감동이 너무 무서워서 오히려, 손이 잘 가지 않았던 앨범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앨범을 처음 들은 지도 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랑의 1집도, 3집도 듣지 않고 있다. 이랑 2집 앨범에 대체 무엇이 있어서, 내가 이토록 무서운 감동을 느낀 건가.
예술이 있기 전에 삶이 있다. 글을 쓰기 전에 글로 묘사할 삶이 있고, 카메라로 찍기 전에 카메라에 담을 삶이 있다. 그래서 삶이 곧 예술이라고 말하는 거다. 삶이란 어쨌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이어갈 수 있는 건데, 먹고사는 문제를 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놀이인 예술이란, 삶 없이는 이어질 수 없다. 먹고살아야 놀이도 가능한 셈이다. 이랑의 2집 “신의 놀이”는 이런 주제를 끌고 간다. 그가 시상식 무대에서 펼친 경매란 참으로, 이 앨범에 딱 어울리는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삶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본다. 일이 아니라, 놀이가 삶의 본질이다. 이 삶은 즐기고 행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슬프게 고생만 하라고 주어진 게 아니다. 즐긴다는 건 뭐냐, 놀이다. 일을 즐길 수 있는가. 일을 즐길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의 목적이란, 우리의 일을 놀이로 승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일이 놀이가 될 수 있다면, 먹고사는 걱정마저도 즐길 수 있다면, 그런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그런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절망을 노래한다. 이 앨범을 들으며 이런 절망을 느꼈기에, 이 앨범이 나를 무섭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의 놀이와 먹고사는 문제가 양립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마크 테일러 저서 “침묵을 보다”에서 접한 이 구절이 떠오른다. 다음은 그 책에서 로런스 앨러웨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화가나 시인이 되겠다는 어리석은 인간의 충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고집 말고는 다른 어떤 행위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놀이를 즐기는 자들의 이런 고집은 언제나, 세상에 의해 꺾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신의 놀이를 즐기는 자들은 삶을 즐기지 못하고, 놀이인 이 삶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 있어도 꽃이랑 나무 생각만” 하는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나를 공상가라고 욕한다. 그런 어두운 곳에 있으면 먹고살 걱정을 해야지, 한가하게 꽃이랑 나무 그림이나 그릴 시간이 있느냐며 욕한다. 나는 그저 놀고 싶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왜 나를 이토록 미워할까.
■ 자기혐오 속에서 만난 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 단연 가장 무서운 노래 딱 하나만 뽑으라면 역시, 8번 트랙에 수록된 이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도, 이 앨범을 들으면서도, 이랑의 노래가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그 무서움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무서운 노래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는데, 이젠 그 실체를 좀 알 것 같다.
내 삶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아픔이라는 게,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처럼, 잔잔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간단히 털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거다. 그렇게 간단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걸, 그토록 오래 붙잡고 아파했던, 나 자신의 나약하고 미련한 모습을 마주하는 게 무서웠던 거다. 나는 이 앨범을 듣고, 혹여 내 삶을 그토록 간단하게 사랑하게 될까봐 무서웠던 거다.
이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좀 이상하다. 분명 가사 첫줄에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노래하지만, 이후로 이어지는 가사들은 온통,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고 격려해주는데, 여전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나약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루한 처지라니. 이 노래가 내게 무섭게 다가왔던 건, 여기서 노래하는 이런 나약한 모습과 내 모습이 겹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아도, 도무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련한 모습이라니.
한 편으론, 자신의 가장 깊은 슬픔을 이토록 건조한 목소리로 털어버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진지하고 엄숙한 순간들이 필요했는지 가늠하게 된다. 이랑의 목소리엔 분명 그런 호소력이 있다. 삶이란 결국 농담이며 놀이겠지만, 삶이 농담이고 놀이라는 걸 깨닫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내 슬픔을 마주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7번 트랙에서 노래하듯 “평범한 사람”이 되길 원했지만, 8번 트랙을 따라 노래하며, 평범한 사람조차 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발견하곤,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그렇게 작아지길 거듭하다가 문득, 내가 더 작아질 곳도 없다고 느낀 곳에서, 신을 만난다. 온 우주에서 가장 無에 가깝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무언가. 너무 無에 가까워서 그 어떤 관측 장비와 논리로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작디 작은 존재. 원자보다 더 작아서 오히려 세상 모든 곳에 스며들 수 있는 존재. 9번 트랙 “나는 왜 알아요”에서 묘사한 신의 모습을 그려보면 왠지, 류시화 저 인도 여행기 “지구별 여행자”에서 접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류시화가 인도 길거리에서 만난 한 구루는 류시화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그 책은 전한다.
“물질의 최소 단위는 다름 아닌 사랑이오. 사랑이 없으면 모든 물질이 결합력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최고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몰랐단 말이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취해 행복을 곱씹는 시간은 그리 오래갈 수 없다. 삶이란 늘 그런 것이다. 이제는 삶을 향한 지독한 농담을 늘어놓는 10번 트랙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흐를 차례다.
“Safe Sex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
자기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 이랑의 이런 고약한 농담에,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게 된다. 반출생주의로도 읽힐 수 있는 이토록 고약한 농담인데, 왜 이걸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올까. 단순히 이 가사를 노래하는 가락이 신난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런 농담이란, 그 누구보다 삶의 슬픔을 똑바로 응시하는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이라야 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것일 터. 그 누구보다 신의 놀이 심화과정에 충실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이런 고약한 농담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일 터. 이 앨범은 삶과 세상을 향한 이토록 고약한 농담으로 마무리한다. 농담이 아무리 고약해야 삶보다 고약할까. 그래서 이토록 고약할지라도, 어쨌든 농담이라서 웃을 수 있다. 내 삶도 이런 농담처럼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삶으로 신의 놀이를 하는 중이라면, 내 삶을 창조하는 건 나 자신일 터. 그렇다면 내 삶을 둘러싼 세상도 모두 내가 창조한 것이고, 이 지구가 사탄이 만든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 지구를 만든 사탄이 바로 나 자신일 터. 나 자신이 지금껏 사탄이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사탄으로서 이 지구 만들기를 그만두어야지. 이제부터라도 나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찬 하나님이 되어야지. 그래서 이 지구를 사랑으로 감싸고, 내 주변을 사랑으로 감싸고, 내 삶을 사랑으로 감싸야지.
■ 인생이란 원죄가 있어서 더욱 풍성하다
지구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실 적에는 사실, 먹고사는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땅이었다. 성경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땅에 누가 먹고사는 걱정을 불러왔는가.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원해서, 이 땅에 먹고사는 걱정을 불러온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자기 말만 잘 듣고 살면, 먹을 게 알아서 자란다고, 자기 말만 잘 듣고 살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을 거라고, 자기 말 잘 들으라고 그랬는데, 그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말씀만 잘 듣고 사는 거 싫다며 하나님 말씀 어기고,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들이 우리 인류의 조상이며, 이것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 둘이서 저지른 원죄다. 원죄는 기독교 주류 교리인데, 나는 이 원죄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면, 우리 조상이 지은 죄가 지금까지 자손들에게 대물림되는 연좌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인생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기질과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은유로써 이해한다.
그 본성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어떻게든,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를 거역하는 기질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부모님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부모를 거역하는 기질을 갖게 된다. 그게 사람의 본능이다. 다른 한 편으론 부모가 마련해준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며, 부모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모순 또한, 사람이 가진 본능일 터.
2번 트랙에 실린 노래 “가족을 찾아서”는 이런 인간의 원죄를 노래한다. 자기 삶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고 가족을 떠났지만, 나 또한 새로운 가족을 찾고 집을 마련하게 되는 인생의 모순. 새로운 가족이라는 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전통적인 형태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관계를 새로 찾길 갈구하는 마음. 이런 원죄가 있어서, 원죄가 만드는 모순이 있어서, 인생이란 어쩌면 더욱 풍성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어쩌면 아빠가 죽기 전에, 우리는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을까.” 8번 트랙에서, 그가 이렇게 노래를 했던 것도, 이런 아름다운 모순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주적인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두 번씩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일상이란 이름아래, 먹고 마시는 것이나, 잠을 자고 움직이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게 상처를 줬던 그 사건들엔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걸,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대로 우리는... 그대로 우리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던 게 아니다. 그 이유와 의도가 사랑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것뿐이다. 그 이유와 의도가 사랑이라고 인정하면 너무 아프니까, 서로 어긋난 사랑이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면, 다시는 사랑을 믿을 수 없을까봐, 그저 아무런 이유가 없고,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말할 뿐이다. 서로 사랑하느라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던 건데, 먹고사는 문제를 논하다가 싸우기만 하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데, 우린 서로 사랑해서 가족이 되고 식구가 된 건데, 왜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걸까. 사랑이 정말 구원이 맞는 걸까.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 그렇게 사랑을 혐오하다가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 앞에 다시 무릎을 꿇게 되고,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사랑에 서툴었을 뿐이라는 걸 아프게 깨닫는다. 그렇게 신의 놀이를 하며 아픔을 털어내고, 다시 사랑한다. 사랑이 구원이라는 걸 다시 믿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다시 사랑한다. 결국 우리에게 생명을 준 건 사랑이니까. 사랑 때문에 받은 상처마저 사랑하는 게, 사랑이 구원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아파도 가야지. 힘들어도 한 걸음 더 가야지. 아픔을 털어버리고, 그렇게 가야지. 사랑 없이는 생명도 없으니까. 우리 생명을 유지하려면, 사랑이 구원이어야 하니까.
■ 좋은 이야기엔 언제나 위기와 악당이 있다
이야기를 쓰며, 신의 놀이를 해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위기를 지나지 않고선, 절정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악당이 없으면 영웅도 없다는 걸. 위기도 악당도 없는 이야기가 얼마나 맛없는 이야기인지, 모든 좋은 이야기엔 위기와 악당이 있다는 걸. 이랑은 좋은 이야기에 대해, 앨범과 같은 이름을 가진 1번 트랙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성배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과 복수를 하려고 하는 사람. 결국에는 모두가 집을 떠나면서 시작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단순한 영웅은 사람들을 대신해 제물로 바쳐져 죽음을 맞고, 사람들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지요.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죠. 좋은 이야기는 향기를 품고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죠. 모든 이야기는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비극. 희극은 제물이 흘리는 피를 받는 입구가 넓은 모양의 접시.”
짧은 시 한 편을 읽더라도, 시 한 편이 마치, 고통의 토양과 슬픔의 비를 먹고 핀 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비디오 게임 생각을 해봐도 그러하다. 누가 게임을 할 때, 튜토리얼 단계에만 머무르길 바라는가. 튜토리얼이란 제작사가 플레이어에게 시키는 것만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건데, 튜토리얼이 게임의 진정한 재미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는 튜토리얼이 끝나고, 제작사의 안내도 끝나고, 플레이어 스스로 생각하고 실력을 단련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가 게임의 참 재미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말씀만 잘 들으면, 먹고살 걱정이 없었던 에덴동산은 신의 놀이 튜토리얼인 거고,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난 이후가 사실, 본격적인 신의 놀이라는 거다. 참으로 아담과 이브가 이 지구에 가져온 고통, 슬픔, 질병, 죽음이란, 신의 놀이 심화과정을 밟기에 필수요소였던 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날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근히, 그들이 심화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두신 거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 입장에서도 좀 걱정이 되긴 하셨던 거 같다. 아직 본 게임 들어갈 정도로 충분히 배우지도 않았는데, 너무 빨리 자기 말을 어겨버리니까.
우리가 고통, 슬픔, 질병, 죽음을 통해 겪는 심화과정이란, 이 삶이 신의 놀이라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어렵고 힘겨운 순간들이 많다. 그러나 결국엔 이것 또한 놀이에 불과하다. 이토록 슬프고 어렵고 힘들지만, 결국 이것도 놀이다. 예술가의 임무란 이런 거라 본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결국 그 모든 게, 노래이며 영화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인생이란 결국,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보듯, 즐길 수 있는 놀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처럼, 자신의 고통을 건조하게 읊조리는 이랑의 목소리처럼, 요가 선생님께서 이랑에게 전해주신 말씀처럼, 내 삶에 모든 슬픔과 고통들을 그저 털어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진정, 슬픔과 고통과 죽음이 공존하는 신의 놀이 심화과정을 기꺼이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맞이한 신의 놀이 심화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들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 모든 놀이 끝에, 참 즐겁고 아름다운 삶이었노라 말하고 싶다. 나는 오랫동안 내 삶을 내 죽음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만큼 이 앨범 듣는 일을 두려워했고, 여전히 두렵지만, 이젠 두려움을 마주하고, 내 삶을 더 사랑하겠다고 다짐해본다.
트랙리스트
1. 신의 놀이
2. 가족을 찾아서
3. 이야기속으로
4. 슬프게 화가 난다
5. 웃어, 유머에
6. 도쿄의 친구
7. 평범한 사람
8.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9. 나는 왜 알아요
10. 좋은 소식, 나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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