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93: 검은잎들(Leaves Black) - 비행실
작아졌던 세상이 다시 커지더라도
■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비행기 타는 기분
비행기 모드. 요즘 나오는 휴대폰에 기본으로 내장된 기능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비행기 탈 일도 없는데, 휴대폰 사용하면서 비행기 모드 누르는 일이 많다. 왜 그럴까. 그 누구에게도 간섭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비행기 모드, 이것은 휴대폰이 비행기가 항공하는 데 방해되는 전파를 쏘지 않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능이다. 비행기 항공에 방해되는 전파란, 전화에 필요한 전파, 인터넷에 필요한 전파 등이다. 그래서 이 기능을 켜면, 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비행기 승객들은 비행기에 타고 휴대폰을 사용할 때, 이 기능을 반드시 켜야 한다. 그런데 나는 왜 비행기 탈 일도 없는 요즘, 비행기 모드를 자주 켜게 되었을까.
비행기 모드 켜면,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지만,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거는 일도 없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간섭할 수 없게 되는 만큼, 누군가도 나를 간섭하는 일이 없어진다. 내가 타인을 간섭하지 않는 만큼, 나도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비행기 모드 켜면, 그때 나는 자유를 느낀다. 버스 안에서 비행기 모드 켜고 음악을 들으면, 마치 창밖 풍경이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처럼 여유롭게 흐르는 걸 볼 수 있다. 버스가 곧 비행기가 된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비행기 타는 기분이다. 하늘을 날지 않아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내가 하늘을 날아가는 데 그 무엇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간다.
내가 누군가를 간섭하지 않는 한, 나는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내 생각과 그를 따라오는 감정들을 더듬는다. 그들을 부드럽게 껴안는다. 나를 짓누르던 온갖 분노와 슬픔과 아픈 기억들은 사실 자신의 몸을 부풀린 것이었고, 상냥하게 그들을 쓰다듬으니, 그들은 위협을 풀고, 점차 부풀렸던 몸집을 줄이며 작고 귀여운 모습이 되어간다. 내가 비행기 모드 켜면 꼭 비행기 타는 기분이 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창밖으로 내가 발을 딛던 세상이 작아지는 게 보인다. 내가 살던 세상이 저렇게 작은 세상이었나. 내가 저렇게 작은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큰 슬픔을 품고 있었나. 비행기 모드 켜고 음악을 들으면, 내 슬픔들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비행기 모드를 켜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비행기 모드 자주 켜는 요즘을 지내면서, 비행기 모드와 딱 어울리는 음악을 발견했다. 검은잎들 “비행실” 앨범이다.
■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게 무섭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게 무섭다. 최신 유행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무게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데, 자꾸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기존에 사랑을 주던 것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음악도 그러하다. 기존에 알던 음악들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새로운 음악을 덜컥 알게 되면 내가 기존에 사랑하던 음악들에게 소홀해질 것 아니겠는가. 이건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가수, 밴드 등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원래 좋아하던 그들이라도, 그들이 무슨 새로운 앨범 냈다고 그러면 좀 듣기가 꺼려진다. 그들이 냈던 기존 음악들도 내가 충분히 숨은 매력을 깨닫지 못했고,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은잎들 정규 2집 앨범 발매 소식이 이번 달 13일에 있었다. 나는 다른 가수 신보 소식에 망설였던 것처럼, 이 앨범에 관한 내 반응도 반가움보단 망설임이 앞섰다. 그런데 내가 이 앨범을 꼭 들어야지 생각하게 만든 이름이 있었다. 이 앨범에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조동익. 그가 내게 이 앨범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조동익과 검은잎들의 만남이라니, 이 독특하고도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은 조합에 궁금증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동익, 그는 누구인가. 김광석 앨범에 편곡자로 참여하여, 김광석 목소리를 아름다운 악기 연주로 든든하게 받쳐주던 사람이다. 김광석, 그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로 자리 잡는 데, 그의 목소리도 큰 몫을 했지만, 조동익의 편곡에 몫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조동익의 편곡 덕분에, 나는 김광석의 목소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더욱 풍요롭게 누릴 수 있었다. 장필순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경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조동익은 이병우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어떤날”의 멤버로서 또, 본인 이름이 걸린 앨범들도 발표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장르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다.
■ 실망이 감탄으로 바뀌는 기적
내 기대를 한껏 모은 검은잎들 신보 “비행실”을 들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내가 이 앨범을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실망이었다. 이 밴드는 어째 앨범을 낼 때마다 음악이 점점 심심해지는가. EP에서 정규 1집으로 갈 때 한 번 음악이 심심해지더니, 1집에서 2집으로 옮기면서 음악이 훨씬 심심해졌다.
로큰롤 밴드 음악이라기엔, 신나는 노래가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4번 트랙이 신나는데, 이것도 이전 앨범들이 보여준 역동성에 비하면 심심하다. 이번 앨범은 로큰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앨범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록 음악 안에 다양한 형태가 있다지만, 이런 걸 로큰롤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가사도 심심해졌다. 이전에 쏟아내던 독기와 원망들은 다 어디 갔는가. “날 안아줘. 차라리 안아서 죽여줘.” “세상은 참 아름답네. 빌어먹게 아름다워.” “주말에 들었던 복음은 왠지, 너무 거룩해서 와 닿지 않아.” 이렇게 악독한 가사들을 뱉던 밴드가 왜 이렇게 심심한 얘기들이나 하게 되었을까. 아, 그런데 이 밴드는 또 한 번, 실망한 내 마음을 더욱 깊은 감탄으로 바꿔놓았다.
앨범 전체에 대해선 실망했지만, 그래도 3번 트랙 “바람”에서 느낀 상냥함은 내 마음에 짙은 그리움으로 번져갔다. 그래서 나는 3번 트랙의 힘을 믿고, 다시 한 번 앨범 전체를 경청했다. 두 번째 들으니까, 그래도 내가 좋다고 느끼는 부분이 좀 늘어났고, 세 번째 들으면 또 달라질까 싶어서 또 들었더니, 이젠 내가 이 앨범에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처음 들었을 때 깨닫지 못했던, 이 앨범의 아름다움을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감탄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 앨범을 심심한 음악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지난 앨범에 비해 투입된 악기도 더 많아지고, 연주는 더욱 섬세해졌으며, 실험은 더욱 다양해졌다. 단지 그들은 이 모든 시도를 감추었을 뿐이다. 음악이란 참 신기하다. 로큰롤은 보통 네 명, 다섯 명 정도가 연주하는데 요란하게 들린다. 그런데 클래식은 100명 넘는 관현악단이 연주하는데 평온하게 들린다. 악기 수가 많아진다고 반드시 화려한 음악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악기 수가 많아도, 그 많은 악기들이 하나의 공기를 만든다면, 그 공기가 편안하고 상냥하다면, 그건 편안하고 상냥한 음악이 된다.
■ 듣는 이에게 간섭하지 않고도 감동을 주는 앨범
이 앨범을 비행기 모드와 딱 어울린다고 말한 건, 단순히 이 앨범 제목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이 앨범의 성격과 비행기 모드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듣는 이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듣는 이가 바라보는 풍경이 된다. 그래서 가사도 연주도, 어느 하나 모난 구석 없고, 튀지 않는다. 하지만 저 광활한 하늘에 서서히 노을이 번져갈 때, 그 풍경은 내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가. 노을이 번져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동이란, 나를 놀라게 하는 감동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고 번져가며 결국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하는 그런 감동이다. “비행실” 앨범은 그런 감동을 주는 앨범이다. 노을 번지는 풍경처럼, 스며드는 감동을 주는 앨범.
이 앨범의 매력을 깨닫자, 나는 오히려 이 밴드에게 경외를 느꼈다. 그토록 악독한 음악을 하던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그 변화에 감탄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내가 나무와 바람과 하늘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들을 떠올렸다. 사실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이란 그렇게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해가 저 멀리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태양이라는 게 얼마나 큰가. 지구보다 100배가 넘도록 큰 것이 태양이다. 그 거대한 구체가 지구에선 그토록 작게 보인다는 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신비로운 기적이다. 검은잎들의 음악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니, 해가 지고 다시 뜨는 풍경처럼 위대한 변화를 그들이 일으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연은 나를 간섭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자연을 간섭할 뿐이다. 자연은 그렇게 나를 간섭하지 않고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하나의 자연, 하나의 풍경과 같은 앨범이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음악을 듣는다는 느낌보단 그저 풍경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 든다. 이 앨범에서 흐르는 음악은 전혀 나를 간섭하지 않지만, 나는 이 앨범이 펼쳐놓는 풍경 속을 실컷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그때 너는 하늘을 봐, 세상의 품이 왠지 버거운 날에는. 정처 없이 떠가는 흰 구름, 그 무엇도 우리의 위협은 아니니. 푸른 하늘 아래 너는 조그만 슬픔이, 푸른 그 하늘 속에서 자유를 보네.”
1번 트랙 “마음”부터 이 앨범이 가진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 가사를 곱씹으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 마음이 하늘이 되고, 내 몸은 그 마음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되는 것 같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작아지듯, 내가 품고 있던 슬픔들도 “조그만 슬픔”이 되어간다.
■ 바람에게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는 쓸쓸한 마음
1번 트랙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하면, 이젠 “바람”을 타며 내 감정들을 더듬을 차례다. 하늘을 날고 있으니, 땅에서 발을 뗄 때는 왠지 자유를 느끼다가, 그 자유는 어느새 불안이 된다. 이 광활한 하늘에 왠지 나 혼자 있는 것 같다. 비행기 모드가 길어질수록, 자유보단 지루함이 더 커진다. 이 지루함은 곧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은 내 마음에 상처들을 건드린다. 외로움은 바람처럼 내 상처를 건드리고 나를 아프게 한다.
3번 트랙 “바람”에서 화자는 바람을 향해 이런 말을 건넨다. “참 따뜻하여라.” 바람이 따뜻하다고? 바람이 어떻게 따뜻할 수 있을까. 시원하다고 그러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따뜻하다니.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바람이 따뜻하다고 느낀 이유를 말해준다.
“늘 내 곁에 머물러줘, 가지 말고.”
바람을 향해 머물러 달라니, 가지 말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부탁인가. 한 편으론 이 구절을 통해, 화자가 얼마나 쓸쓸한 처지에 있는지 어렴풋 알게 된다. 얼마나 쓸쓸하면, 얼마나 절박하면, 지나가는 바람에게 머물러 달라고 부탁할까. 지나갈 수밖에 없는 바람에게 가지 말라고 부탁할까. 외롭고 쓸쓸한 내 처지에, 바람 말고 다른 누가 내 곁을 지켜줄까. 내 곁을 지키는 바람이라서 참 따뜻하다. 이 노래는 결코 자신이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노래가 내뿜는 쓸쓸함은 짙다. 그러나 이 쓸쓸함을 상쾌하게 날려 보내는 구절이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상처를 내는 마음들과 함께해줘. 상처를 입은 마음들과 함께해줘.”
바람이 어디를 가든, 나도 바람을 따라 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가 곧 바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니까 그저 내 쓸쓸함에 처박히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나도 쓸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몫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나는 바람이 되어 항공을 이어간다.
새도 가끔은 땅에 발을 딛듯, 나의 항공도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이륙을 했다면 반드시 착륙도 하게 될 것이다. 1번 트랙에선 작아지는 슬픔에 기쁜 설렘을 느끼지만, 5번 트랙에선 “갈수록 작아만 지는 게” 무섭다고 고백한다. 세상이 작아지는 걸 느끼면서, 나도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무서움을 느낄 때 즈음, 이 앨범은 착륙에 가까워지며 “산”을 마주한다. 착륙하게 되면, 나는 먹고살기 위해 “거짓말쟁이가 되어가는” 일상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이륙하면서 작아졌던 세상이 착륙하면서 다시 커지겠지만, 그렇다고 내 슬픔까지 다시 커져야 할까. 내가 이 앨범을 듣고 있을 때, 나는 하늘을 날아가며 내 슬픔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이 앨범을 끄면, 내 슬픔은 다시 커질까. 이 앨범을 들으면서 작아진 내 슬픔은 이미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러니까 착륙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새로운 걸 알게 되는 일이 점점 무서워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삶은 여전히 이어진다. 이 앨범과 함께 비행하며, 내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설레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본다.
트랙리스트
1. 마음
2. 남쪽 해변에서 온 편지
3. 바람
4. 비행실
5. 철교 위에서 본 나
6. 뛰는 심장
7. 어린아이
8. 흙인형
9.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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