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95: 어떤날(Oneday) - 어떤날 I 1960 · 1965
그날도 오늘이고, 어떤 날도 오늘이다
■ 드림팀도 처음에는 소박했다
드림팀. 스포츠 경기에서 각 팀에 흩어진 훌륭한 선수들만 모아, 최고의 팀을 구성했을 때 쓰는 말이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한 팀이 될 수 없는 조합인데, 꿈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팀이 나타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포츠에만 드림팀이 있는 건 아니다. 여기 한국 대중음악 역사 안에도 드림팀이 있었다. 조동익, 이병우. 단 두 명이지만, 그 두 명의 이름이 저 두 명이라면, 드림팀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조동익, 그는 김광석, 안치환, 장필순 등, 여러 명가수의 여러 명반을 제작한 프로듀서가 되었다. 이병우, 그는 김지운, 이준익, 봉준호 등, 여러 명감독과 함께 영화 음악을 만들며, 한국 영화계 거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 둘이서 만나 팀을 만들었을 땐, 자신들도 이렇게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소망 정도야 있었겠지만, 자신들도 자기 운명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듯, 이들은 자신들의 팀 이름을 이토록 소박하게 지었다. 그 이름, 어떤날. 어떤날,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어떤날.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처럼, 그렇게 아련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먼 풍경을 노래하듯, 그렇게 잔잔하고 고요하게 읊조릴 뿐이다. 그들이 노래하는 아련한 풍경은 그들의 1집 앨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어떤 날, 그 아련한 풍경이 오늘날 우리에겐 이토록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1986년에 발표한 그들의 1집 앨범에 관한 이야기다.
■ 땅에 있는 모든 것의 고향은 하늘
땅에서 이루는 삶이란 온통 고단할 뿐이다. 땅이 일으키는 온갖 먼지에 잔뜩 찌든 이 삶을 보고 있으면, 하늘을 동경하게 된다. 저 하늘을 바라보면 푸른빛이 나를 유혹한다. 땅을 벗어나면 자유가 있을 거라고 속삭인다. 저 하늘에 내 희망, 내 미래가 있을 거 같다. 그렇게 슬프도록 푸른 하늘은 바람을 타고 플루트 연주에 닿는다. 1번 트랙 “하늘”은 그렇게 시작한다.
하늘을 한참 바라보니, 햇빛이 땅으로 내려오는 걸 느낀다. 그래, 내가 하늘을 동경하며 위를 바라볼 때, 태양은 땅을 동경하며 아래로 내려오는구나. 그렇게 태양은 햇볕이 되고, 빛은 땅을 사랑하여, 이 땅에 생명을 짓는다. 오래된 것. 오래된 것들을 바라보면, 왠지 땅에 있는 모든 것의 고향이 하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된 것들의 낡은 모습이란, 그들이 곧 땅에서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런 위태로움에도 여유를 지키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서 조용한 감탄이 꽃처럼 피어난다. 그렇게 나의 오래된 친구들은 내 마음의 토양을 이루고 꽃을 피운다.
3번 트랙 “그날”은 이 앨범에서 가장 격렬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가진 곡이다. 꿈을 향한 다짐. 꿈을 이루게 될 그날. 그날을 향한 마음. 언젠가는 꿈에 닿으리라, 그렇게 꿈을 현실로 가져오리라 다짐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힘차다. 내 마음은 새가 되어 내가 그리는 꿈을 향해, 내가 바라는 자유를 향해, 힘찬 날갯짓으로 나아간다.
힘찬 날갯짓으로 나아가 도달한 그곳. 그곳에 도착하니,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는 감동은 잠깐에 불과했고,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 내 마음을 채우는 건 후회뿐이다. 나의 꿈을 이루겠노라, 얼마나 강한 마음을 먹었던가. 그러나 나의 강한 마음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으니, 그것은 꿈이라는 예쁜 이름 뒤에 가린 욕망이었다.
■ 두 침묵 사이로 스며드는 빛
내 욕망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한 후회가 내 침묵을 채운다. 나는 내가 상처를 준 그와 마주앉아 오래 침묵한다. 후회와 후회가 만나, 화해와 화합을 이룬다. 후회로 채운 우리의 침묵, 두 침묵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빛은 우리를 고요한 평화로 이끈다.
“지금 내게도 할 말이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우리의 많은 이야기들을 말로 하기도 그렇잖아요.”
두 사람의 침묵, 침묵에 실린 숨소리는 바람이 되어, 하모니카 연주가 되고 플루트 연주가 된다. 오랜 침묵 끝에 깨닫는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선 그토록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이제 그대와 나는 사랑하고, 언제나 우리 곁엔 작은 공간과 시간들.”
우리가 사랑하고 평화롭게 지내려면, 작은 공간과 작은 시간이면 충분하다.
본 앨범은 4번 트랙에서 7번 트랙까지 네 트랙이 이어지는 구간이 참 황홀하다. 얼핏 들으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움직임으로 일관하는 음악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내는 섬세함에 길들여지면, 내 마음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어떤날은 오늘을 노래한다. 5번 트랙 “오늘은”이 흐른다. 어떤 날이 노래하는 오늘. 꿈이 노래하는 현실. 그날이 아니라 오늘이다. 어떤 날은 그날이 아니라 오늘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과 평화가 모두 오늘 존재한다. 오늘이란 이토록 여유롭고 고요하다.
“오늘은 햇빛이 많이 내렸네, 따뜻한 한숨을 쉴 수 있는. 어두운 서랍 속 많은 친구를 만나고 있던 날이야. 오늘은 햇빛이 많이 내렸네, 나른한 하품 할 수 있는. 먼지 낀 책장에 오랜 친구들을 만나고 있던 날이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특별한 게 아니다. 그저 따뜻한 한숨을 쉴 수 있고, 나른한 하품을 할 수 있는 여유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조그만 미소를 내 얼굴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날도, 어떤 날도, 이런 평화롭고 여유로운 오늘 안에 이미 존재한다.
■ 지루한 겨울 끝에 내리는 봄비
오늘 안에 흐르는 여유와 평화를 술처럼 마시고, 잔뜩 취해서 잠에 빠진다. 꿈은 프리재즈 연주처럼 아무렇게나 흐른다. 아무렇게나 흐르는 꿈에 빠져 있다가 눈을 뜬다. 눈을 뜨고 맞이한 풍경은 온통 붉다. 붉은 풍경은 아침을 닮았다. 그러나 아침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가 끝남을 알리는 석양이었다. 오늘 누리던 여유가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에 슬퍼질 때 즈음, 누군가 내게 속삭인다. “너무 아쉬워 하지 마”
후회와 화해를 반복하는 삶, 이런 삶도 지친다고 생각할 무렵, 겨울은 찾아온다. 겨울의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나를 차갑게 대하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나는 바람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저 방 안에 틀어박힌다. 나는 그렇게 틀어박히고 움츠러들고 곪아간다. 침묵은 눈처럼 쌓인다. 눈은 쌓이고 쌓여 벽을 이루고, 추위는 벽을 단단하게 얼린다. 침묵은 권태가 되고, 권태는 아픔이 된다. 권태가 아프게 다가올 때 즈음, “녹슬은 기타 줄을 울”린다.
녹슨 기타 줄을 울리자, 얼어붙은 침묵이 녹아내린다. 저 멀리 종소리가 들린다. 내 삶에 새로운 시간이 찾아온다는 걸 알리는 종소리. 종소리가 따스하게 내 마음을 적시면, 공기마저 따스해진다. 따스한 공기를 타고 봄비가 내린다. 촉촉하고 상쾌한 봄비.
8번 트랙 “비 오는 날이면”은 본 앨범에서 가장 신나는 곡이다. 3번 트랙 “그날”은 격렬하지만 신나는 곡은 아니었다. 반면, 8번 트랙은 잔잔하고 신나는 노래다. 노래가 잔잔하면서도 신날 수 있다니, 이런 게 노래의 신비일까. 나는 비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비를 이토록 밝고 신나게 노래하는 걸 듣고 있으면, 비가 반가워진다. 특히 비를 만날 수 없는 요즘, 겨울에 이런 노래를 듣고 있으면, 비를 오히려 기다리게 된다.
일요일, 나는 언젠가 누렸던 여유와 평화를 다시 불러본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날은 벌써 오후. 오전 내내 잠에 빠지느라, 오늘은 오후만 있는 일요일이 되었다. 얼마나 잤던가. 대충 열다섯 시간은 잔 것 같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오래 잠에 빠지도록 했던가. 나는 잠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토요일에 밤, 나는 무엇으로부터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가. 일요일 오전을 다 날려버릴 만큼, 왜 그토록 오래 도망쳤나. 오후만 있던 일요일, 모든 것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평소에 무심하게 쳐다보던 모든 것이 간지러운 공포로 다가온다. 간지러운 공포에 시달리다가 “포근한 밤이 왔”다.
그들이 노래하는 빛나는 침묵, 달콤한 여유, 지루한 겨울,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곱씹는다. 아련한 어떤 날을 바라보며, 그날이 영영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초조한 마음을 느낀다. 그들이 노래하던 아련한 풍경에 귀를 기울인다. 그날도 오늘이고, 어떤 날도 오늘이다. 아련한 어떤 날을 그날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선명하게 만들자고 다짐한다. 두 거장의 어떤 날도 이토록 소박했다. 소박한 오늘을 어떤 날처럼 한껏 누리며 살아가면, 나도 모르게 어떤 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어떤 날을 만났다.
트랙리스트
1. 하늘
2. 오래된 친구
3. 그날
4. 지금 그대는
5. 오늘은
6. 너무 아쉬워 하지 마
7. 겨울 하루
8. 비 오는 날이면
9. 오후만 있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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