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명반 에세이 94: 도마(DOMA) -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나는 이 섬에서 외로움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가수
춥고 어두운 계절, 겨울이다.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날카롭고, 해는 짧아진 겨울. 따스함보다 차가움을 마주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계절. 상냥함보다 날카로움을 마주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계절. 빛보다 어둠을 마주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계절. 그래서 겨울은 우울한 계절이다. 이런 우울한 계절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 겨울이 되면 늘 생각나는 가수가 한 명 있다. 밴드 “도마”의 보컬, 김도마.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사운드트랙 “레인보우”를 소개한다.
“조용히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얘진다. 하아 불면 따뜻해진다. 만지면, 앗 차가. 휘익, 바람 소리, 사악, 베어내면, 하아, 웃음소리, 흔들흔들 날아가.”
김도마,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는 겨울은 춥고 어두운 계절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겨울이란, 새하얀 풍경 사이로 웃음이 고요하게 번지는 따스한 계절이다. 그가 만든 노래 중에는 이런 노래도 있다. 도마 2집 앨범 수록곡 “겨울 발라드”를 보자.
“눈 내린다, 우리 마음에. 길을 잃어 보자. 정답처럼 그대 서 있다면, 눈 감고도 만날 거야.”
내 곁에 따스함도 사라지고, 상냥함도 사라지고, 빛도 사라지면서, 나는 마치 이 계절에 길을 잃는 기분이다. 하지만 김도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의 방황을 어루만진다. 길 좀 잃어도 괜찮다고. 내 마음에 정답을 따라가면, 눈 감고도 정답을 꼭 만나게 될 거라고. 이때, 김도마의 목소리는 마치, 나와 함께 길을 잃은 사람의 격려처럼 들려서 더 깊이 와 닿는다. 그가 만든 노래 중에는 귀엽고 엉뚱한 겨울 노래도 있다. 도마 1집 수록곡 “황제 펭귄이 겨울을 나는 법”이다.
“하얀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떼어놓으려 해도,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이겨낼 수 있어. 하얗고 보드라운 알을 품고, 서리가 내려앉은 입술로, 오, 오, 오...”
내가 살면서 여러 겨울 노래를 들어봤지만, 겨울을 이렇게 귀엽고 참신하게 그린 노래는 없었다. 겨울을 이겨내는 비결이 다른 게 아니라 토실토실한 엉덩이라니, 엉덩이로 쓴 것 같은 엉뚱한 가사를 곱씹고 있으면 어느새 얼굴엔 웃음이 번진다. 그러고 보니, 위와 같은 앨범에 “너무 좋아”라는 노래도 있다. 여기서도 겨울을 노래한다.
“별이 밝다. 너도 지금 보고 있을까. 바람이 차다. 혹시 얇게 입고 있는 건 아닐까. 봄이 온다, 내 마음에도 너라는 화사함이, 따뜻하게, 따스하게, 조용하게.”
■ 이유도 없이 섬으로 가는 이유가 뭘까
섬, 그리고 겨울.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겨울이 먼저 떠오르는데, 그 다음에 따라오는 단어가 하나 섬, 섬이다. 섬, 겨울. 이 두 단어는 어쩐지 닮았다. 왠지 외로운 느낌이 드는 게 꼭 닮았다. 그런데 김도마의 노래에는 왠지, 이런 외로운 단어들을 상냥하게 감싸는 힘이 있는 거 같다. 김도마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래서, 겨울도 춥지 않고, 섬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섬에 가고 싶어진다. 관광지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고요한 무인도로 가고 싶어진다.
김도마에게 섬이란 어떤 곳일까. 김도마는 자신이 만든 밴드 “도마”에서 2017년에 1집 앨범을 낼 때 제목을 이렇게 지었다.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1집 앨범에 “섬”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을 정도면, 김도마에게 섬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 같다. 김도마에게 섬이 갖는 의미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노래가 하나 있다. 1집 6번 트랙 “섬집아기”라는 노래다.
“나만 아는 오솔길, 마른 흙길 따라, 비밀을 흘리며 걸었네. 아무도 없을 작은 외딴 섬에서, 누군가를 만나 깜짝 놀라고 싶어. 네게도 보여주고 싶지만, 사진 한 장 찍질 않았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몰랐던, 새로운 내 모습을 거기서 만나고 싶어진다. 섬, 그곳은 아무도 본 적 없는 내 모습을 만나는 곳이다. 나만 아는 섬으로 간다. 나만 아는 풍경을 만나러 간다. 아무도 보지 않은 내 슬픔을 만나러 섬으로 간다. 아무도 보지 않은 슬픔에서, 아무도 가진 적 없는 기쁨을 건진다.
소중한 기쁨, 소중해서 나만 갖고 싶지만, 소중하기에 너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너에게 주기에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소중한 기쁨이라 망설인다. 망설임은 어쩌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걸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 나만 아는 그 섬에서 건진 기쁨도 차갑게 식어버릴 거 같다. 그래서 그 기쁨은 그저 나만 아는 그 섬에만 살도록 내버려두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기로 또 다짐한다. 하지만 너에게 이토록 귀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은 떠나지 않는다.
김도마가 노래로 그린 섬이란, 이토록 설렘과 모순이 공존하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아무도 모르는 내 모습을 간직한 섬.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하고 싶은 내 모습. 그 한 사람, 딱 한 사람만 초대하고 싶은 섬. 아니, 내가 그를 초대하지 않아도, 그가 나도 모르게 거기 몰래 들어와 있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 김도마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 안에 있는 그 섬으로 고요히 흘러간다. 그렇게 외로움은 섬이 되고, 섬은 나만 아는 아름다움이 된다. 나만 아는 아름다움은 오직 당신에게만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을 곱씹고 있으면 가슴이 설렌다, 따스해진다. 너는 그렇게 나의 봄이 된다.
■ 데려온 노래가 들리지 않아도 어쨌든 섬으로 가네
섬으로 가는 길에 설레고 기쁜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방황하는 내 모습을 보며 묻는다.
“이 밤에 어딜 간단 건가요?”
그들이 내게 다급하게 물었지만, 내가 그들 앞에 내밀 수 있는 건 “비옷과 거짓말”뿐이다. 그렇게 섬을 향해 길을 떠나는데, 그들의 목소리에 스며든 상냥함이 자꾸 내 마음을 울린다. 그들이 내 걱정을 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쌓다보니 “오래된 소설을 몸으로 읽는” 기분이 든다. 섬을 향해 떠나는 중에, 항구에 “방파제”를 만난다.
“도망 다니다가 주저앉은 방파제. 숨기 좋게 생겨서 눈물이 났네.”
내 삶에 방파제가 되어주었던 친구를 생각한다. 때론 나도 그 친구 삶에 방파제가 되어주었지. 서로가 서로의 방파제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우리 삶에 다가온 거센 파도 앞에 “가벼운 농담을 마시며” 허세를 즐기던 밤. 그 밤에 너는 결국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잔뜩 울어버렸지. “네가 울던 냄새”는 마치 “코스트코 데킬라” 같았어. 우리는 파도를 어떻게든 견디고 나서, 방 하나 잡고 데킬라를 나눠마셨어. 우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시며, 얘기하고 또 얘기했어. 그때 얼마나 마셨는지 “우리는 머리가 아팠잖아요.” 웃음도 눈물도 과하게 취했던 우리였어. 우리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노래도 만들었잖아. “늙지 않는 노래”를 만들자고 그랬잖아. 그런데 지금, 너는 없네.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길, 밤이라서 까맣게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도착할 그 섬에는 뭐가 있을까 머리에 그려본다. 전에도 한 번 가봤지만, 오랜만이라서 기억을 자세히 더듬어야 겨우 떠오를 것 같다. “나를 위로해주던 풍경들은 다 그대로 있을까.” 그 섬은 “내 이불 속” 같은 “눅눅한 온기”가 나를 감싸주는 곳일까. “나를 많이 아는 낙엽과 물 묻은 흙냄새”가 나를 반겨주는 곳일까. “내 노래, 내 노래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노래들을 그곳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 날은 밝았고, 나는 섬에 도착했다.
“멀리 멀리 가던 날, 데려온 노래는 들리지도 않고.”
외롭지 말자고 다짐하며 “늙지 않는 노래”를 불러보지만, 노래는 나를 더 외롭게 만든다. 노래가 내 가슴에 전혀 듣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섬으로 들어간다. 섬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간다. “이 밤에 어딜 간단 건가요?” 그들이 나를 잔뜩 말리면서도, 내가 어떻게든 가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며 출발한 길이었다. “비옷과 거짓말”을 잔뜩 챙겨서 떠난 길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여기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벌써 돌아갈 수는 없다. 이유도 없이 외로운 것처럼, 이유도 없이 섬으로 왔다. 정말 외로움엔 이유가 없었던 걸까. 어쩌면 외로움의 이유를 찾기 위해 섬으로 온 걸까. 나는 이 섬에서 외로움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르진 않을 테니까요. 곧 돌아갈게요.
■ 슬픔에게 밥을 차려주기 위하여
도마. 김도마가 결성한 밴드 이름이자, 자신의 예명이 된 도마. 여기서 도마는 요리할 때 채소 따위를 썰기 위해 밑에 받치는 그 도마다. 김도마는 자신의 예명으로 도마를 택한 이유를 두고, 그저 도마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아서 선택했다고 말했다. 도마. 도마를 생각하면 누군가를 향한 정성이 떠오른다. 도마와 칼이 만나 내는 소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내가 먹을 요리를 위해 도마를 사용하면, 도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다. 도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땐 대게, 남이 내게 요리를 해줄 때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려고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똑, 똑, 똑, 똑. 그가 칼로 도마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는 마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똑, 똑, 똑, 똑. 내 마음의 문은 그를 향해 열린다.
과연 김도마의 노래는 도마를 닮았다. “슬픔은 저기 시장 통에 구경 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그가 이런 가사를 쓴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슬픔”이라고 이름 붙인 그 소녀에게 밥을 해주려고 도마를 두드린다.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기 위해 섬으로 떠난 소녀. 그렇게 소녀가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 소녀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까. 모르겠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섬에서 돌아온 슬픔에게 정성으로 밥을 차려주는 일. 복잡한 생각 말고, 그저 밥을 차려주면 그만이다. 슬픔에게 밥을 차려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생계를 만든다. 생계를 만들 힘을 얻기 위해, 도마를 두드리듯 김도마의 노래를 듣는다. 김도마의 목소리처럼, 모든 게 부드럽고 따스해진다. 그렇게 모든 게 괜찮다.
나는 요즘 경상도에서 가장 춥다는 청송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인터넷 설치도 불가능한 깊은 산골짜기라서, 여기서 지내다보면 내가 마치 무인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런 춥고 외로운 곳에서 웃으면서 따스하게 지낼 수 있는 건, 김도마의 노래가 내 마음을 지켜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헤어졌지만,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우리의 이별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이 겨울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다. 따뜻하게, 따스하게, 조용하게.
트랙리스트
1. Is This Love
2. 너무 좋아
3. 초록빛 바다
4. 소녀와 화분
5. 고래가 보았다고 합니다
6. 섬집아기
7. 오래된 소설을 몸으로 읽는다
8. 코스트코 데킬라
9. 황제 펭귄이 겨울을 나는 법
10. 방파제
11. 나를 위로해주던 풍경
12.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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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희은(Yang Hee-eun) – 양희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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