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92: 이랑(Lang Lee) - 늑대가 나타났다
내 얘기 들어줄래요? 나는 충분히 잘 듣고 있으니까
■ 밥은 굶어도 시는 쓰고 죽어야지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족속들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그냥 말로 해도 될 걸, 굳이 운율과 행과 연을 맞춰서 시를 쓰고, 거기 가락을 붙여 노래로 만들고, 글을 잔뜩 써서 책으로 만들고, 온갖 장비를 동원하여 영화로도 만든다. 내 감정이랄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감정 표현하는 데 그렇게 공을 들일까. 그건 분명 말로 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까 말에 운율과 가락을 붙이고 악기도 곁들이고, 서사를 또 붙이고, 그걸 영상으로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겠지. 즉 예술은 소통이다.
아무리 창작과 발표를 많이 해도, 여전히 돈도 없고 인기도 없는데 굳이 꿋꿋이 예술 창작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꼭 남들이 잘 건드리지 않는 걸 건드리더라. 사람들이 안 건드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건데 말이다. 왜 그럴까. 관심 받고 싶어서? 단순히 관심 받고 싶어서 그랬다기엔, 5년, 10년, 20년, 너무 오래 창작을 했다. 뭔가 관심 그 이상을 바라고 창작을 하는 것 같다. 김남주 시인은 옥중에서 이런 편지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문명사회에서 펜과 종이는 밥과 수저와 같이 생활상에 절박한 필수품입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이 날에서는 수인들에게, 특히 정치범들에게 펜과 종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문제로 과장이 바뀔 때마다 건의를 하고 사정을 하고 했습니다. ‘시인에게 펜을!’ 이것이 내 절실한 요구입니다. 나의 이 절실함 때문에 언젠가 나는 모 교무과장에게 밥 한 끼를 안 먹을 테니까 하루 한 시간씩만 펜과 종이를 허락해 줄 수 없느냐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문학 하는 사람에게 펜과 종이를 주지 않는, 아니 문인에게서 펜과 종이를 빼앗아 가는 나라는 동서고금에 없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들어 쫙 늘어놓았습니다.”
밥은 굶더라도 시는 쓰겠다는 의지다. 이렇게 보면, 예술 창작이란 때론 끼니 챙기는 일보다도 중요한 것이겠다. 예술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예술은 밥을 먹어야 할 이유를 준다. 왜 그런가. 예술은 소통이고, 소통 없는 사람은 살아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통을 해야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이 생기고, 감정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사랑이 있어야 삶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 안에 생긴 감정은 밖으로 꺼내야 마땅하다. 꺼내지 못한 감정은 내 안에서 썩고 곪아 나를 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잔뜩 곪은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은 자살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에겐 예술 창작이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 마녀, 폭도, 늑대, 이단
여기 예술이 곧 생존의 문제인 사람이 있다. 창작 활동에 힘쓰느라 집세가 밀리더라도, 절대 창작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미루면서 창작 활동을 했던 걸까. 일단 살려면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밥을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긴 번다. 그런데 밥을 먹어도, 밥을 먹는 이유가 없으면, 돈을 벌고 싶을까. 그러니까 이 사람에겐 돈을 버는 것보다, 밥을 먹는 이유를 찾는 게 더 급했던 거다.
그가 세상을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대게, 자기처럼 밥 먹는 이유를 찾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밥 먹는 것 자체가 밥 먹는 이유가 되어버린 사람들 같고, 어쩌면 삶에서 사랑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이 그의 둘레를 이루고 있고, 그는 왠지 이런 둘레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은 그의 가슴에 쌓이고 또 쌓여서 썩기 직전이다. 누가 내 말을 들어줘야 나는 살 수 있는데, 내가 말로 하니까 안 듣네. 노래를 해야지, 그림을 그려야지,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어야지. 노래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책을 써도, 영화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내 말을 충분히 듣질 않네. 또 노래를 해야지, 또 그림을 그려야지, 또 책 써야지, 또 영화 만들어야지.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노래를 잘 듣고 있는지 묻는 가수가 있다. 2012년에 첫 앨범을 내고, 2021년에 세 번째 앨범을 낸 가수, 이랑이다. 이랑의 세 번째 앨범 “늑대가 나타났다”를 들어보면,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 듣는 게,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 같다. 앨범과 같은 이름을 가진 1번 트랙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누구를 위해 노래하는지 밝힌다.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들은 게 없는 아이가 어떻게 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내가 듣는 것이 곧 내가 말하는 것이다. 이랑은 누구의 말을 들어왔던 걸까. 이랑은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위해 노래한다. 그들을 위한 노래지만, 그들을 향한 노래는 아니다. 노래는 그들을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들은 왜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라고 불리게 된 걸까.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도 가난한 여인이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죽기 전에 분명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그렇게 열심히 울었을 텐데, 엄마는 자식의 울음을 듣고 분명히 밥 좀 나눠달라고 여기저기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들도 가난한 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가난한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자기들끼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는 먹고 먹어도 먹을 게 남는 부자들을 습격한다. 그렇게 그들은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 되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들은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 된 거다.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아서 화가 난 사람들, 그들이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 된 거다. 이랑은 왜 마녀, 폭도, 늑대, 이단들의 말을 들었을까.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그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보다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보게 된 거다. 자신의 가난이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들의 처지가 곧 자기 처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해 노래할 필요를 느꼈던 거다.
■ 청자를 시험하며 청자에게 도전한다
이랑은 2번 트랙과 3번 트랙 두 노래를 통해, 청자를 시험하며 청자에게 도전한다. 정말 자기 노래를 잘 듣고 있는지. 그런데 듣는다는 건 뭘까. 귀가 열려 있어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그걸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용한 곳에 가더라도, 발소리, 숨소리, 새소리, 귀뚜라미 소리, 바람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 이런 소리들이 반드시 들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들을 들어놓고 5분 후에 잊어버린다면, 그걸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랑은 진짜로 듣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이렇게 노래한다.
“잘 알고 있어요. 듣고 있어요. 기억하고, 외우고도 있죠.”
진정 뭔가 들었다는 건, 기억하고, 외우고, 알게 된다는 거다. 그런데 이랑은 오히려 자기가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아듣지 힘들게 노래를 구성했다. 2번 트랙 “대화”에선 돌림노래를 시도했는데, 돌림노래는 대게 같은 가사를 따라 부르는 것으로 구성되지만, 이 노래는 돌림노래가 시작될 때마다 각자 다른 가사를 노래해서 알아듣기 힘들다. 가사를 분명하게 들리게 노래를 구성해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힘든데, 오히려 사람들 기억에 더 남기 힘든 구성을 취한 거다. 이는 이랑이 세상과 소통이 부족하다는 걸 표현한 거다.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노래를 해도 세상이 듣질 않으니, 세상과 자신이 소통이 안 되어서 짜증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 거다. 이런 감정은 벌써 이 노래 시작할 때부터 드러난다. 여기는 돌림노래가 시작하기 전이라서 뚜렷하게 들린다.
“이 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들이 있을 테고, 그건 내 얘기는 아니라는 것은 난 잘 알고 있어.”
노래를 듣기 쉽게 만들어도 어차피 사람들은 안 들으니까, 그냥 대놓고 듣기 어렵게 만들어서 청자를 시험해보는 거다. 정말 내 노래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노래라도 열심히 들어주겠지. 이렇게 생각한 거다. 이런 시도는 3번 트랙 “잘 듣고 있어요”에서도 드러난다. 2번 트랙만큼 난해한 구성을 취한 것도 아니고, 가사도 뚜렷하게 잘 들리는데, 가사 내용이 좀 뜬금없다. 잘 듣고 있나요, 이렇게 청자에게 질문해놓고, 뜬금없이 맥락도 없이 “별주부전”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별주부전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자기 친구들 이야기를 여기저기 끼워 넣은 걸 들을 수 있다. 2번 트랙과 3번 트랙을 들으면, 기분이 어리둥절하다. 이 사람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궁금증도 생기고. 궁금증? 그래, 이랑은 청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구나. 청자가 자기에게 궁금증이 생겨야 자기 말을 더 잘 들어줄 테니까. 결국 2번 트랙과 3번 트랙은 난해한 구성으로 노래한 덕분에 오히려, 청자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부른다. 얼핏 난해하게 들리는 이런 구성은 알고 보면 꽤 영리한 의도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기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 이랑은 2016년에 발표한 2집 앨범 수록곡 “평범한 사람”에서도 그런 마음을 노래한 적이 있다.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에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요.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5년 후에 발표한 3집 앨범에서도 같은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가 가진 이런 답답한 마음은 얼마나 오래된 걸까. 3집을 발표하기 5년 전에 비하면, 3집 발표할 무렵에는 이랑이 예전보다 꽤 유명해진 거 같은데, 이랑 본인은 자기가 예전보다 좀 더 유명해졌어도, 자기가 진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전히 전해지지 않았다고 느낀 걸까. 그가 이토록 청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청자에게 도전하면서, 청자에게 간절하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라도 들어줄래?
4번, 5번, 6번 트랙은 세상을 덮고 있는 우울함에 관한 노래들이다. 이랑은 청자를 시험하길 마치자마자 가장 센 얘기부터 한다. 자살. 4번 트랙 “환란의 세대”는 자살에 관한 노래다. 노래가 본격적으로 자살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는 우선 자기 친구와 공항에서 이별하는 이야기부터 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금도 만나고 있는 친구 숫자보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친구 숫자가 더 많아진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서로 바빠서 못 만나게 되고, 만남이 줄면서 당연히 친구 사이도 멀어진 거다. 그 누구도 멀어지길 바라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바쁘게 살다보니, 그렇게 멀어지게 된 거다.
2집 수록곡 “도쿄의 친구”가 떠오른다. 일 때문에 알게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만나러 일부러 도쿄에 왔더니, 그 친구는 마침 일 때문에 도쿄를 떠나버려 그 친구를 만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 “환란의 세대”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계속 이별해야 한다면, 더 이상 이별하지 않게 다 같이 죽어버리자고 노래한다. 먹고사는 문제와 귀한 친구들과 이별하는 슬픔은 반복되고, 반복되는 문제와 아픔은 나를 숨 막히게 하는데, 내가 대체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죽고 싶다. 나 혼자 죽으면 외로우니까, 우리 다 같이 죽자.
그래. 나도 이게 듣기 힘든 이야기라는 거 알아. 나도 아니까, 내가 신나게 노래할게. 신나게 노래할 테니까, 나의 이런 아픔을 좀 들어줘. 이건 나만의 아픔이 아니야. 너에게도 이런 아픔이 있지 않니? 우리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같이 신나게 노래하자.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목도 안 메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물에 안 빠져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안 먹어도 되고, 한꺼번에 싹 다 가버리는 멸망일 테니까.”
5번 트랙 “빵을 먹었어”는 창작 활동을 먹고사는 일에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빵”이라는 은유로 표현한 노래다. 내 작품은 어떻게 빵이 되고 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묻어나는 노래다.
“빵을 먹고 빵을 그렸어. 그린 빵을 걸어놓았어. 빵을 보러 모두들 찾아왔어. 빵을 보며 이야기했어. 빵을 보고 모두들 돌아갔어. 빵은 얼마인가에 팔렸어.”
이 구절을 듣고 있으면, 내 작품이 팔린 것처럼 가슴에 감동이 벅차오른다. 내 작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 내 빵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딘가 슬퍼지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노래 시작할 때 나온 구절이 노래 끝날 때까지 마음에 남았기 때문인 거 같다.
“빵을 먹고 빵을 남겼어. 남긴 빵을 그려보았어.”
빵을 남겨야만 빵을 그릴 수 있는 처치. 다르게 말하자면, 배고파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고통스러운 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 이토록 불안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내 사랑을 받아줄래?
4번 트랙과 5번 트랙에서 노래한 불안은 6번 트랙에 불면증으로 이어진다.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이 노래가 나올 차례다. 이랑은 이 노래에서 자신의 오래된 불면증을 한참 호소하다가, 이 노래에 대한 소개를 살짝 흘린다.
“이게 사랑 노래라는 걸 내 친구들은 알겠지.”
작게 흘리듯 속삭이는 구절이라서, 깊이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든 구절이다. 이랑 본인도 이 노래가 “사랑 노래”라고 불리기엔, 좀 이상한 노래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수줍게 흘리듯이 고백한다. 무슨 사랑일까. 2집 수록곡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친구가 돌아와 이층에 올라가 잠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서야 나도 멍하니 있다가 슬슬 잠이 들었다. 멍청히 있다가 친구가 돌아오면 슬슬 슬슬 잠이 들었다.”
알고 보면, 이랑은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외로움을 얼마나 잘 타는지, 혼자서는 잠도 제대로 못 잔다. 그래서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 노래는 사실, 사랑하는 친구를 향한 노래다. 친구야, 나는 네가 없으면 잠도 잘 수 없을 만큼 너를 사랑해. 10년 전에 “졸업영화제”를 노래했던 것처럼 “아이고, 모르겠다.” 이런 말과 함께 가볍게 잠에 들면 참 좋을 텐데. 사실 그때부터 불면증은 있었지. 그때는 불면증을 참 경쾌하게 노래할 수 있었는데, 10년이 지나고 오히려 불면증은 더 심해진 거 같아. 이젠 그때처럼 경쾌하게 불면증을 노래할 수도 없어.
이토록 많은 불안에 시달리는 불안한 인생이지만, 이랑은 사람들을 사랑하길 멈추지 않는다. 불안한 인생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사랑이 나를 아프게 해도, 역시 사랑이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까. 7번 트랙 “그 아무런 길”은 노래 끝에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이렇게 걸음을 세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어찌나 길을 많이 걸었는지, 남한에서 시작한 걸음이 북한을 지나 러시아까지 도달했다.
이토록 불안한 인생 속에서도 씩씩하게 나아가는 사랑은 “박강아름”에게 닿는다. 박강아름, 그는 이랑이 존경하는 영화감독이다. 이 곡은 박강아름 감독의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수록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서 이랑은 박강아름의 일상을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먹는 거, 학교에 가는 거, 결혼, 육아까지, 정말 꼼꼼하고 야무지게 그린다. 이런 섬세한 묘사에 박강아름을 향한 이랑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많지만, 아직도 나는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듯, 노래에 이런 말을 반복하며 마무리한다.
“박강아름은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강아름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까”는 아, 아, 이런 소리로 이어진다. 아, 한 번에 박강아름을 향한 걱정이 묻어나오고, 아, 또 한 번에 박강아름을 향한 믿음이 묻어나온다. 아, 아, 이렇게 내뱉는 이랑의 목소리에 촉촉한 떨림이 느껴진다. 걱정과 믿음이 교차되는 불안한 사랑이지만, 어쩌면 불안을 껴안는 힘이 느껴져서 더 깊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강함도 사랑하지만, 당신의 불안까지도 사랑한다는 다짐이 느껴진다.
■ 이름이 없는 것에게 이름을 주고, 목소리가 없는 것에게 목소리를 주는 사람
이랑은 이런 힘든 노래들을 왜 계속하는 걸까. 그건 이랑이 시인이라서 그런 거다.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은 이름이 없는 것에게 이름을 주고, 목소리가 없는 것에게 목소리를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름이 없어서 관심을 받을 수 없는 존재를 찾아가고, 목소리가 없어서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목소리가 없다고, 그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목소리도 없이 그렇게 위태롭게 존재한다. 그렇게 시인은 이름도 없고 목소리도 없는 존재들을 위로한다. 이랑에겐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밥을 먹는 이유가 되었다. 그들에게 이름을 주고 목소리를 주느라 밥은 좀 굶었지만, 그래도 밥을 먹는 것보다 밥을 먹는 이유를 찾는 게 우선이니까, 힘들어도 위로를 멈추지 않는다.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알까. 나 아니면 누가 이 일을 말할 수 있을까. 이건 나밖에... 이건 나밖에... 이건 나밖에... 이건 나밖에...”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읊조리며, 그는 다시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끔찍한 자살 충동이 우글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깊고 어두운 곳에 빛을 준다. 그곳은 점차 밝아진다. “환란의 세대”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벌써 한 번 죽어본 것처럼 기뻐서, 다시 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합창으로 새로 편곡된 “환란의 세대”를 듣고 있으면, 이 노래가 천사들의 합창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내가 왜 시를 쓰는지, 시 쓰는 일이 그토록 나를 아프게 해도, 왜 계속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 생각한다. 그래, 내가 쓴 시로 위태로운 존재들을 보살펴야, 내 위태로운 인생도 보살핌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네가 살아야 나도 사니까. 나는 너를 듣고, 너를 말한다. 그렇게 주고받은 소통은 감정이 되고, 감정은 사랑이 되고, 사랑은 삶이 된다.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저들은 우리를 마녀, 폭도, 늑대, 이단이라고 부르지만, 우린 이렇게 사랑으로 뭉쳤으니까, 우리는 아름답다. 그러니 우리 더 크게 노래하자. 노래를 멈추지 말자. 우리의 목소리가 세상 끝까지 닿도록. 우리의 아름다움이 더 커지도록.
트랙리스트
1. 늑대가 나타났다
2. 대화
3. 잘 듣고 있어요
4. 환란의 세대
5. 빵을 먹었어
6.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7. 그 아무런 길
8. 박강아름
9.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10. 환란의 세대 (Choir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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