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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김광석(Kim Kwang-seok) - 김광석 네번째

인생명반 에세이 71: 김광석(Kim Kwang-seok) – 김광석 네번째

 

삶에 대한 회의를 떨치고, 일어나, 일어나, 자유롭게

 

■ 노래는 집이다

십오 년 동안 귀를 떠나지 않은 가수가 있는가. 내게는 김광석이 그런 가수다. 고등학생 때 “사랑했지만”으로 처음 알게 된 김광석,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그의 노래를 이토록 오랜 시간 듣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어느새 서른이 넘었는데, 김광석의 노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노래로 영생을 얻은 김광석을 보고 있으면, 나만 변하고 늙는 것 같아 문득 슬퍼지는데 결국,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김광석 노래가 있어 마음이 든든해진다. 김광석은 정규 3집에 수록된 곡 “나의 노래”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그에게 노래는 양식이고, 빛이며, 힘이자, 삶이었다. 나에게 노래는 집이기도 하다. 내 마음의 집. 그 자리에 들어가 쉴 수 있고, 위로 받고, 격려 받을 수 있는 그런 곳.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집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은 땅 위에 내 집을 갖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추세로 흐른다. 이럴 때, 노래가 내 마음의 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이고 격려일까. 양식과 빛, 힘과 삶, 이 모든 게 있는 곳이 집이다. 노래는 집이 될 수 있다.

 

집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더라도, 나는 어쨌든 변한다. 시간이 흐르니까, 나도 변한다. 집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더라도, 집 안에 풍경은 항상 다르다. 따라서 집을 향한 나의 마음과 생각도 변한다. 어제 집 안에서 벌어진 일이 오늘 반드시 똑같이 벌어지리라 장담할 수 없고, 오늘 집에 있던 사람이 내일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위안이라고 다 같은 위안이 아니고, 격려라고 다 같은 격려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위안과 격려에 여러 무늬를 새긴다. 어제의 위안과 오늘의 위안은 반드시 다른 무늬를 가질 것이다. 오늘의 격려와 미래의 격려는 반드시 다른 무늬를 가질 것이다. 내 마음에 든든한 집을 마련해주었던 김광석의 노래. 시간은 김광석 노래를 통해 받은 나의 격려와 위안들에 어떤 무늬들을 새겼을까.

 

 

▲ 노래 “서른 즈음에” 관한 김광석 본인의 생각을 담은 이야기

■ 서른에 “서른 즈음에”를 들었더니

김광석을 두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한국인의 일생을 노래한 가수라고. 군대에 갈 때는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청춘의 시련을 극복하고, 중년에 접어들 때 문득 생이 허무하다 느껴질 땐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위로를 받고, 황혼에 접어들 때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들으며 지난 생애를 추억한다는 거다.

 

한국 나이 서른둘에 들어선 나. 아직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아무튼, 김광석 노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십오 년 동안 “이등병의 편지”와 “서른 즈음에”를 지나왔다. 군대 간다는 게 내 삶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졌던 고등학생 때 듣던 “이등병의 편지”와 군대에서 이등병을 지낼 때 들었던 “이등병의 편지”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직 한창 청춘을 보낼 때 듣던 “서른 즈음에”와 서른을 맞이하여 듣는 “서른 즈음에”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등병으로서 듣는 “이등병의 편지”도, 서른을 맞이하여 듣는 “서른 즈음에”도, 그렇게 특별할 게 없었다.

 

“서른 즈음에”와 “이등병의 편지”에 관한 감상은 오히려, 내 삶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김광석 노래를 가장 많이 들었던 고등학생 시절 나에게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다. 고등학생 땐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아직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내가 들어도 이렇게 감정이 사무치는데, 군대 안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어떨까 잔뜩 상상에 젖었다. “서른 즈음에”를 들을 땐, 가사에서 묘사하는 허무한 감정에 공감하며,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허무한데, 서른이라는 나이는 얼마나 무서운 나이일까. 내가 그 나이를 견딜 수 있을까, 지레 겁을 먹곤 했다.

 

막상 서른이 넘으니, 감수성이 그때처럼 예민하질 않아서, 서른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등병 땐, 훈련과 선임들에게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등병으로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과 감상에 젖을 시간이랄 게 없었다. 오히려 선임들이 틀어주는 아이돌 댄스 음악 들으면서, 모든 걸 잊고 한껏 가벼워지는 게, 이등병으로서 훨씬 큰 격려이자 위안이었다. 이렇듯 “이등병의 편지”도 “서른 즈음에”도 막상 그 나이에 닿은 나에겐 별 힘을 쓰지 못했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내가 고등학생 때, 이 노래들과 함께 맞이할 미래를 너무 많이 상상해버려서, 막상 그 미래가 닥쳤을 때 이 노래들에 관한 감상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져버린 것 같다.

 

그렇다고 “이등병의 편지”와 “서른 즈음에” 노래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갔을 때도, 저 두 노래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울린 순간들이 있었다. 제대를 한 지 몇 년이 흘러 “이등병의 편지”를 들었을 때, 나는 문득 그 시절 어리숙했던 이등병 내 모습을 추억하며 감상에 실컷 젖은 적이 있다.

 

 

▲ 김광석

■ 김광석의 서른 즈음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서른 즈음에” 이걸 두고 얘기하자면, 나는 오히려 스물여덟, 아홉, 그 무렵에 이 노래가 가장 와 닿았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이 노래는 서른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는 걸. 서른이 아니라 서른 즈음에 관한 노래다. 즈음, 이게 중요하다. 이 노래에 공감하려면 꼭 서른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서른이 가까운 사람, 서른이 넘은 사람이라도, 서른 비슷한 그 즈음 나이에 있다면 누구든 이 노래에 공감할 수 있다. 서른을 포함하는 개념인 거지, 서른만 딱 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는 거다.

 

재밌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서른이라는 단어는 제목에만 들어갔지, 막상 가사 안에는 서른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비처럼 음악처럼”이라고 “November Rain”이라고, 꼭 비 내리는 날에만 공감해야 하나, 꼭 11월에만 감동 받아야 하나. 이 두 노래는 날씨가 화창한 날에 들어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비 내리는 날에는 꼭 제목에 ‘비’가 들어간 노래를 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감상에 방해 될 때가 있다. 제목과 가사는 노래에 깊이를 더하고 해석을 도와주지만, 그게 꼭 정답은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데 정답이 있다면, 그런 음악 감상이란 얼마나 답답할까. “서른 즈음에” 이 노래는 단지, 서른 즈음에 으레 이런 감정들을 많이 느끼더라, 그냥 의견과 감상을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 노래는 서른이나 그 즈음 나이가 아니라도, 내가 지나온 모든 생이 시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상실, 허무, 이런 감정들에 시달릴 때면, 언제든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

 

이건 내 감상이고, 문득 나는 김광석 씨 마음이 궁금해졌다. 이 노래를 부른 김광석 씨는 무슨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대 위에서 이 노래에 관해 얘기한 유명한 구절 몇 줄이 있는 건 안다. 그러나 내겐 이걸로 모자란 느낌이다. 나는 감히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예술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깊이 받아들이고, 한껏 음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예술이고, 창작자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건, 그 방법이니까. 감상이란 그 지점에서 피어나는 거니까. 사람이 사람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다만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것이고, 마땅히 다양해야만 한다.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데 정답은 없다. 그래서 예술엔 정답이 없다. 예술엔 정답이 없지만, 내 마음엔 정답이 있다. 여기선 무엇을 내 마음의 정답이라고 불러야 할까. 노래와 내 마음이 일치하는 지점, 그걸 내 마음의 정답이라 말하겠다.

 

내 마음과 김광석 노래가 일치하는 지점을 더 많이 찾기 위해, 나는 김광석 정규 4집을 들었다. 1994년 “김광석 네번째”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앨범은 김광석 한국 나이 서른하나, 요즘 화제에 오른 국제 나이로서는 딱 서른에 발매된 앨범이다. 딱 “서른 즈음에” 감성이 앨범 전체에 녹아든 작품이라 말할 수 있겠다. 김광석 마음에 들어온 서른 즈음 풍경을 더욱 넓게 보기 위해 “서른 즈음에”가 수록된 앨범 전체를 들여다보자.

 

 

▲ 1번 트랙 “일어나”

■ 그의 서른 즈음엔 희망이 더 많았다

“김광석 네번째” 앨범엔 총 열 곡이 실렸다. “서른 즈음에” 가사를 음미하고 있으면, 사람이 느끼는 상실과 허무를 이보다 세련되고 상냥하게 표현한 가사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노래만 놓고 보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이란 온통 이런 상실과 허무로 가득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앨범 전체를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서른 즈음에”가 분명 이 앨범에서 중추 역할을 맡는 건 사실이지만, 앨범 전체를 보면 이런 우울한 노래조차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이번에 이 앨범을 들으며, 김광석을 슬픈 가수 틀에만 가두는 사람들의 감상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광석, 흔히 사람들은 그에 대해, 슬프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노라 말한다. 그의 노래도 그의 삶을 닮아 밝은 노래에도 어딘가 슬픔이 묻어난다고 말한다. 다른 앨범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앨범만 놓고 보면, 김광석은 슬픔보다 기쁨을, 절망보다 희망을 더 풍부하게 노래한 가수였다. 이 앨범 수록곡들을 희망과 절망으로 간단히 분류해보자. 이 앨범은 네 곡의 절망과 여섯 곡의 희망으로 이뤄져있다. 앞에 세 곡이 희망을 노래하고, 마지막 세 곡이 희망을 노래하는데, 절망을 노래하는 부분은 앞뒤 희망에 둘러싸인 꼴을 하고 있다. 삶이란 희망으로 시작해 절망의 과정이 있지만, 결론은 희망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딱 봐도 희망이 더 많은 앨범이다. 김광석, 그에게 서른 즈음이란 희망이었다.

 

김광석은 총 여섯 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김광석 네번째”는 사실 그가 다섯 번째로 발표한 앨범이다. 그 사이에 “다시부르기 1”을 발표했는데, 이건 김광석 자신이 과거에 발표한 노래들을 다시 불러서 수록한 앨범이라 정규앨범은 아니지만, 김광석의 노래가 세월과 함께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볼 수 있어, 그가 발표한 네 장의 정규앨범 못지않게 중요한 앨범이다. “김광석 네번째”는 구성 면에서 지난 네 앨범들에서 보여주지 않은 파격이 있는데, 김광석이 작사 작곡을 맡은 곡을 처음 두 트랙에 배치하고, 마지막 트랙에도 김광석이 작사 작곡을 맡은 곡을 배치했다는 거다. 이 앨범 안에 김광석이 작사를 맡은 세 곡이 모두 희망에 관한 가사라는 건 특기할 부분이다. 이런 수미상관 구성은 김광석 본인이 “김광석 네번째” 앨범 전체를 얼마나 진심으로 노래했는지 역설하는 것 같다.

 

■ 지혜란 회의에 빠지지 않는 것

1번 트랙 “일어나”는 이 앨범 전체의 흐름을 압축한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가사를 보면, 절에선 염세를 노래하는데, 후렴에선 뜬금없이 희망을 노래한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 순간에 말라버리지.” 절에선 이렇게 한탄하다가 후렴에선 갑자기 이렇게 외치는 식이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가사만 보면 뜬금없는 구조인데, 이런 파격적인 구조를 무리 없이 귀에 들어오게 만드는 건 역시 가락의 힘이요, 그 가락을 절과 후렴 구분 없이 담백하게 읊조리는 가창의 힘이겠다. 물론 절보다 후렴에서 힘이 더 들어가는 음색을 들을 수 있지만, 그 마저도 담백한 기운을 잃지 않는다.

 

 

▲ “제이레빗”이 노래한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삶을 대하는 그의 여유로운 자세와 거기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음미할 수 있다. 삶이란 으레 그런 것이다. 탐구에 탐구를 거듭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염세적인 고민들이란, 아무리 몰두해봐야 아무 짝에 쓸모없다. 그걸 깨달았으면, 그런 생각들을 당장 끊고 벌떡 일어나야만 한다. 그게 삶이요, 지혜다. 이 노래가 보여주는 절과 후렴의 선명한 대비는 왠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Hunky Dory” 앨범을 떠올리게 만든다. “Quicksand”가 1면을 마감하면, “Fill Your Heart”가 2면을 개시하는 구조 말이다. 삶에 대한 회의가 유사처럼 나를 갉아먹을 땐, 머리를 치우고 가슴으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게 지혜라고 외치지 않던가.

 

삶에 대한 회의를 떨치고 일어나, 김광석이 향하는 곳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부드러운 기타 소리는 햇볕 안으로 청자를 초대한다. 기차는 달리고, 차창 밖 풍경은 흘러가지만, 햇볕은 상냥하게도 이 모든 풍경을 감싸준다. 밝게 빛나는 기타 연주 위로, 김광석의 읊조림이 산들바람처럼 스친다. 잠시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 상념에 젖지만 상쾌한 바람이 “뒤돌아볼 수는 없”다며 내가 가아할 저 넓은 들판을 보여준다. 이토록 들판 풍경에 실컷 감탄했는데, 끝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상념들이 있다. 상념들은 나를 우수와 애수에 다시 빠져들도록 만든다. 상념에 젖은 내게, 그의 목소리는 다시 살금살금 다가온다. 살금살금 발걸음은 간질간질 손짓으로 변해, 청자를 웃음으로 초대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그런 무거운 생각들에 시달리지 말고, 차라리 “어린 아이들의 가벼운 웃음처럼 아주 쉽게, 아주 쉽게 잊”어버리라고 속삭인다.

 

■ 지혜마저 닿지 못하는 깊은 슬픔

살다 보면, 그 어떤 격려와 사랑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을 겪게 된다. 4번 트랙 “회귀”는 그런 감정을 노래한다. 아무리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가벼운 웃음처럼” 날려버리려 해도, 끝내 마음에 남는 슬픔들이 있다. 이럴 땐, 슬픔 앞에 엄숙하고 진지해야 할 때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가 한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보자.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그리고 아둔하게 치료한 질병처럼 그런 슬픔들은 물러나는 척하였다가는 짧은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전보다 훨씬 무섭게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들이 가슴속에 집적되어 인생이 되면, 그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한 삶, 거부된 삶, 실패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머리가 미치는 곳보다 좀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감지력의 망루를 지나 좀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들을 우리의 기쁨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신뢰로 참아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을 극복하긴 위해선, 슬픔을 시끄러운 곳으로 끌고 가지 않고, 슬픔 앞에 엄숙해야 한다. 슬픔을 신뢰해야 한다. 신뢰는 진지하다. 고로 슬픔을 다룰 땐 진지해야 한다.

 

 

▲ 4번 트랙 “회귀”

“회귀”를 시작하는 피아노 연주는 진지한 공기를 뿜어낸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피아노 연주보다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 슬픔을 엄숙하게 마주한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가 진행될수록 성량을 고조시키며, 무섭게 솟아오르는 슬픔을 어떻게든 신뢰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이토록 슬픔 앞에 진지하더라도, 결코 극복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는 슬픔이 남는다. 사랑.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는 목련을 보며, 내 “젊은 날”을 그리워하지 않았을 텐데. 이토록 그리움에 신음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이 남긴 상처와 거기서 오는 슬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이 남긴 상처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할퀴고 지나가, 내 마음을 불구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죽을 만큼 아파서, 아픔을 잊으려 “돌아와 술잔 앞에 앉”는데 흐르는 눈물이 알려준다. 술로도 이런 아픔은 극복할 수 없다는 걸. 때론 날카롭게, 때론 우렁차게, 내 마음을 위협하는 아픔들, 담백하게 기타를 두드리며 어떻게든 달래본다. 그의 목소리는 사랑이 남긴 아픔들과 벌인 분투를 기록한다. 분투 속에서도 슬픔을 경청한다. 경청만이 신뢰를 낳을 수 있으니까.

 

“서른 즈음에” 나를 괴롭히는 허무와 상실에 관한 상념들. 이런 상념과 함께 나는 “혼자 남은 밤”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상념들이란 나 혼자 감당하기엔 벅차다. 상념들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상념들이 나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이걸 깨달을 무렵, 기타 소리는 점점 상냥하게 들리고, 내 눈물은 높아지는 성량을 따라 더욱 “환하게 밝아”진다. 외로움은 절망을 만든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외로움은 내가 만든 것이라는 걸. 밝아지는 눈물이 속삭인다. 이제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외로운 밤에 잔뜩 흘린 눈물은 비처럼 내 마음에 잔뜩 스며들어 “여러 송이 희망”을 꽃피운다.

 

■ 끊어진 길 너머로 자유롭게

눈물이 꽃피운 희망들을 보니 마음이 들뜬다. 들뜬 마음은 나를 “끊어진 길” 너머로 이끈다. 희망이란 끊어진 길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희망이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다. 불안한 미래에 배신당하고 다친 게 몇 번이던가. 하지만 내 눈물이 꽃피운 희망들을 보고 있으니, 지금 내겐 과거의 실패를 생각할 틈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상쾌하게 울리는 기타 연주와 그 위를 뛰노는 건반 연주가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나 혼자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내 뒤에 같은 가사로 노래하는 목소리들이 붙는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저 끊어진 길 너머를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다.

  

 

▲ 9살 “이관수” 군이 부르는 “일어나”

 

▲ 8번 트랙 “끊어진 길”

들뜬 마음으로 끊어진 길 너머를 뛰놀다가 문득, 내가 마주한 풍경이 아름다워 멈춘다. “맑고 향기롭게” 내 마음을 적시는 풍경들. “맑고도 향기로움이 멀리 있진 않”다는 걸 흠뻑 깨닫는 순간이다. 웅장하게 울리는 악기들은 나를 더 넓은 들판으로 이끈다. “쉽게 단정 지은 일들”“나와 너를 구속하”던 시절, 그런 시절들이 다시 나를 찾아와도, 나는 이제 어떻게 그런 시절을 이겨낼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나는 “자유롭게” 내 삶을 거닌다. 자유는 내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었다. 너그러운 마음은 내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서른이 넘어 다시 들은 “김광석 네번째” 앨범. 비록 “서른 즈음에” 노래에선 특별한 감상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서른 즈음에 녹음하고 발표한 이 앨범에선, 많은 새로운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예민한 감수성을 온통 삶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증오하는 데 썼던 나. 그런 내가 서른이 넘었더니, 마음에 좀 더 여유가 생긴 걸 느낀다. 그 여유가 이 앨범 속에 들어있는 풍성한 희망을 받아들이게 했다.

 

김광석, 그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도 진심이었지만, 기쁜 노래를 부를 때도 진심이었다. 작품은 창작자의 삶과 분리해서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언제나 쉽지는 않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노래에도 스며들 것 같을 때, 이걸 기억하자. 그의 삶이 한 때, 그가 노래했던 희망을 배신했을지라도, 희망을 향한 그의 진심은 이 앨범 안에 오롯이 들어있다는 걸.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남았다. 그의 노래 안에 깃든 진심은 그의 삶조차 해칠 수 없을 것 같다. 생보다 오래 살아남은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 노래가 그의 이루지 못한 희망을 이루어줄 것이다. 그는 결국 그의 노래 속에 온전히 살아있다. 그의 노래 속에 깃든 희망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따스하고 상냥한 집처럼.

 


트랙리스트

1. 일어나
2. 바람이 불어오는 곳
3.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4. 회귀
5.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6. 서른 즈음에
7. 혼자 남은 밤
8. 끊어진 길
9. 맑고 향기롭게
10.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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