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70: 양희은(Yang Hee-eun) – 양희은 1991
나무를 닮은 노래, 나이테처럼 퍼지는 울림
■ 누가 기술과 유행을 비난할 수 있으랴
“누구나 노트북, 아이패드 같은 걸 갖고 있죠. 그게 우리 시대의 전통 악기입니다. 20세기의 대화는 사람 VS 기계였습니다. 모더니스트들 이진법이죠. ‘PC 뮤직(PC Music)’은 일렉트로닉(Electronic)과 어쿠스틱(Acoustic)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냈어요.”
올해 2022년, 때는 바야흐로 “하이퍼팝(Hyperpop)”의 시대였다. 하이퍼팝 유행을 선도한 것으로 알려진 레이블 “PC 뮤직”의 대표 A. G. 쿡(A. G. Cook)은 2020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앙팡 테리블(Enfnts Terribles)과 인터뷰를 가지며, 이제 음악의 표현 수단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는 걸 역설했다. 음악을 통기타로 표현하든, 컴퓨터로 표현하든, 사람의 손을 거치면 그건 모두 사람의 음악이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이 새로운 음악의 흐름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특히 퀴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역할로서,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을 주류로 올라오게 만드는 진정 인간적인 도리를 수행했다.
그보다 약 10년 정도 앞서, 한국의 방시혁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평론가 분들이나 기자 분들이 그런 걸 잡아내지 못 하는 게, 저는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인데 ‘후크송’에 대해서 의미 없는 후크(Hook)의 나열이니... 비난할 일이 아니에요. 시대가 변하고 있는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원하는 거예요. 옛날처럼 더 이상 좋은 아름다운 가사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귀에 와서 두드려주고 심장을 건드리는, 옛날에는 심장을 조물조물했으면, 이제는 때리는 걸 원하는데, 얘들 노래도 그런 것들을 실제적으로 시도를 했고 반응이 좋더라고요.
시장 편향, 저는 옹호한 적이 없어요. 시장편향이 옳다고 얘기한 적도 없고. 저는 사실 굉장히 슬픈 사람 중의 하나인 게, 사실 제가 가수 ‘진주’ 때부터 프로듀서를 했고, 진주, 케이윌, 에이트, 임정희, 이런 친구들은 다 보는 음악이 아니에요. 듣는 음악 쪽 사람인데 이런 분들의 프로듀서를 쭉 해온 제 입장에서, 보는 음악 편중이 얼마나 즐겁겠어요. 오히려 되게 야박해요, 대중들이. 사업적으로 봐도 시장이 다양해야, 새로운 시도들이 있고,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장을 더 선호해요.
그걸 자꾸 아이돌을 비난하는 논리로 쓰는데, 그게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있나요? 우리나라 아이돌들 너무 잘 하는데, 노래를 못 한다고 하는데, 노래 잘 하고요. 춤, 세계에서 제일 잘 춘다고요. 한 팀에 다섯 명이면 다섯 명이 다 그래요. 이런 건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거거든요. ‘어떻게 이런 일이 대한민국에 일어났지?’ 싶은 건데 그 부분에 대한 평가가 전혀 없이, 되게 몰이해적으로 그냥 비난을 하는 거잖아요.”
2011년 3월 “피플 인사이드”라는 케이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아이돌 그룹과 “후크송”을 비난하는 평론가, 기자들을 겨냥하여 한 말이었다. 시장의 편향은 비판할 수 있어도, 그것이 아이돌 그룹을 비난하는 근거로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며, 이런 유행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음악도 변한다. 유행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이런 흐름을 두고 음악의 본질, 사람의 향기를 잃는다며 비난할 수는 없다. 유행하는 음악에도 본질은 있고, 사람의 향기가 있다.
■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본질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듣는 음악이 록이든, 힙합이든, 클래식이든, 내 마음을 울리는 요소에 장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유독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록, 힙합, 댄스 같은 쇠 냄새, 플라스틱 냄새 가득한 음악을 듣다가, 문득 음악에서 나무향기, 꽃향기를 맡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포크(Folk)를 찾는다. 포크를 듣고 있으면, 확실히 다른 음악을 들을 때보다 노래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음악을 표현하는 수단이 통기타든 컴퓨터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통기타 하나로 감동을 자아내는 현장을 겪고 있노라면 역시, 컴퓨터의 현란한 기술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감동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통기타와 컴퓨터가 대립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들이 다 같을 수는 없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통기타는 통기타라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고, 컴퓨터는 컴퓨터라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 이건 분명해 보인다.
음반이라는 건, 현대 기술의 산물이다. 음악 안에 소리들이 꽃과 나무를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내 귀에 닿는 과정은 전부 디지털 신호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디지털 신호라도, 그 신호 안에 들어 있는 소리가 다르지 않은가. 그 신호가 나에게 꽃과 나무를 느끼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음반이 상용화되면서, 사람들은 많은 걸 잃었다. 하지만 새롭게 얻게 된 것도 있으니, 음악을 독서를 하듯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음반이 상용화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음악을 집이나 버스 등에서 간편하게 들을 수 없었을 터. 덕분에 나는 음악을 혼자서 깊이 음미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기술은 때론 감성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시대가 사람들을 독서와 멀어지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글쓰기에 천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세기는 참 즐길 게 많아진 시대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수천, 수만 개의 영화, 만화, 음악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굳이 이미지나 사운드도 없이 텍스트만 나열된 글 따위를 읽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다른 것도 아닌, 글이라서 전해줄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이 감각은 시대가 어느 때든, 그걸 전하는 신호가 종이가 되었든 디지털이 되었든 변하지 않는다. 나도 글을 쓸 때, 모든 글을 디지털로 쓴다. 하지만 글이 갖고 있는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 디지털 신호로 풀과 나무의 향기를 전달하는 것처럼.
“양희은 1991” 이런 앨범을 듣고 있을 때, 노래의 본질이란 역시, 섬세한 가사와 그 가사를 표현하는 감성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컴퓨터의 화려한 기술이 가사와 감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때론 그런 화려한 최신 기술 없이도, 통기타 단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는 거다. 철과 플라스틱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들었지만, 때론 내 건강한 두 다리로 직접 힘들게 동산에 올라, 풀과 나무와 함께 호흡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는가.
■ 한국 가요계에 20년을 머무른 거목
때는 1991년, 대한민국 가요계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미 80년대에 나미,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이 출현하여, 전자음이 주도하는 댄스 음악의 가능성을 한국 가요계에 실컷 선보인 이후였다. 이듬해 92년엔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현하여 본격적인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양희은이 발표한 앨범은 시대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희은 1991” 안에 들어있는 8개 곡 모두, 이병우의 통기타 한 대와 양희은의 목소리 하나로만 이뤄졌다. 앨범 전체를 이렇게 일관하는 건 어찌 보면, 극단적일 정도로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앨범에선 외부를 향한 그 어떤 다짐이나 결의도 느낄 수 없다. 이런 간결한 구성을 택한 건 오히려, 노래의 본질에 더 깊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보일 뿐이다. 주변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그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에 충실할 뿐이다. 묵묵하게 꿋꿋이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양희은의 음악이 원래 그러하였고, 그가 몸담은 포크라는 장르 자체가 원래 그러하였지만, 이 앨범은 특히 노래가 가진 본질에만 충실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노래는 섬세한 가사와 풍부한 감성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걸, 자신의 목소리와 통기타 한 대로만 증명하다니, 이렇게 고요하고도 확실한 증명이 또 있을까. 양희은이 1971년에 “아침 이슬”을 부를 때도 그러하였지만, 20년이 지나서 발표한 앨범에선 더욱 간결해진 모습이었다. 악기 구성만 그랬던 게 아니라, 양희은 본인이 노래하는 목소리 또한 더욱 담백해졌던 것이다. 이런 간결한 구성과 담백한 목소리는 오히려, 이것이 바로 본인이 20년 간 한국 가요계를 버틴 힘이라는 걸 증명한다. 그로부터 30년이 또 지난 지금 들어도, 그 힘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어떻게 한국 포크의 거목으로 자리 잡았는지, 정말 나무처럼 증명한다.
나무. 이 앨범을 표현할 때 단 하나의 단어만 쓰라면,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것 참, 나무 같은 앨범이다. 흔히 양희은을 표현할 때 한국 포크의 거목(巨木)이라고 표현하는데, 거목이라는 표현이 그 흔한 수식어가 아니라, 바로 양희은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양희은을 위한 수식어. 통기타는 나무의 울림을 가장 잘 전해주는 악기일 것이다. 앨범 전체에 악기를 통기타 딱 하나로만 일관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가사를 전달하는 양희은의 목소리에서 나이테가 느껴진다. 이병우의 기타는 바람 같고, 양희은의 목소리는 나무 같다. 별개의 존재로 보이던 바람과 나무는 노래 속으로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바람이 나이테를 만드는 것처럼.
■ 나이테 같은 목소리
나무는 나이테만 봐도, 그 나무가 겪은 세월과 그 세월 속에 스민 공기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나무를 그렇게 깊게 연구해본 적이 없어서, 그게 정말 가능한 건지 직접 시험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양희은의 목소리가 그런 나이테를 닮았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이테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마치 출렁이는 악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양희은의 나이테는 그의 목소리를 타고 울림이 되어 청자의 마음에 가닿는다.
기둥만 봐선 그 나무가 처한 계절을 파악하기 어렵다. 나무가 처한 계절을 보기 위해 가지들을 본다. 앙상한 모양에 그리움만 송골송골 매달린 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것 같다. 가지에 붙은 그리움의 모양이 위태로워 보일 때도 있지만, 기둥의 단단한 모습을 보아하니, 땅 밑에 내린 뿌리가 그만큼 견고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무는 어떻게든 위태로운 계절도 잘 견뎌낼 것이다. 나무의 든든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그 밑에 기대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어느새 나는 나무 아래서 안심하고 있다.
양희은의 나이테는 우선 “그해 겨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며, 차가워진 공기를 맞고 있으려니, 벌써 겨울을 예감하게 된다. 겨울에 만나, 겨울에 헤어진 당신. 당신 떠난 자리엔 나를 달래주는 수선화 한 송이 피었지만, 당신을 그리게 만드는 찬바람은 내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찬바람을 따라, 내 곁을 떠난 건 당신뿐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떠올린다. 바람은 어느새 “그리운 친구에게” 내 기억을 데려다준다.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그 친구뿐만 아니라 그 때 내 젊음마저도 그립다.
“강물은 흐르고, 흐르는 강물 따라 세월도 흘러, 지나가버린 바람처럼 우리들의 젊음 또한 가버리고. 이제 여름도 가고, 어느새 바람 속엔 가을 냄새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지나간 내 젊음이 돌아올 수 없듯이, 지나간 세월도 돌아올 수 없다. 내 삶은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가을이다. 바람은 내 그리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흘러간다. 나의 여름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슬퍼질 무렵, 가을에 수확한 탐스럽게 익은 열매들이 나를 반긴다. “가을 아침” 밝아오는 햇살이 나의 예쁜 열매들을 비춘다. 이토록 고단한 하루 속에 “고추잠자리 하나”가 내 마음처럼 피곤하게 “비잉 비잉” 돌지만, 내 삶의 가을이 수확한 열매들은 여전히 예쁘기만 하다.
바람은 곧 인생이다. 인생이라는 단어 안에는 그 단어 하나로 전부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과 굴곡이 있다.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은 아니다. 어떤 바람은 상냥하고, 어떤 바람은 맹렬하다. 어떤 바람엔 먼지가 가득하고, 어떤 바람은 맑고 상쾌하다. 나무는 어떤 바람을 맞았느냐에 따라 다른 나이테를 가진다. 나무마다 다른 나이테를 가지게 되는 건, 나무마다 맞았던 바람이 다르고, 그 바람 안에 담긴 공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희은이 맞아온 바람에는 어떤 공기들이 있었을까. “저 바람은 어디서?” 양희은 그 또한 노래로써 묻는다.
“왜 사는지 알고 싶어서 머나먼 길을 떠났지.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 세상에 혼자만 버려진 느낌. 아무래도 알 수 없었던 산다는 일의 의미를, 그 어느 날 나를 지나간 바람이 가르쳐줬지.”
■ 누군가 쉬어갈 수 있는 나무
바람에게 물었던 질문을 바람으로부터 답을 받는다. 그 해답은 “11월 그 저녁에” 불어온 바람에 있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을 맞이할 그 바람 속에, 인생의 해답이 있었다.
“산다는 것이 뭐냐 하던, 사랑이 모든 것이냐던, 누가 내게 대답해주냐던, 인생 참 어려운 노래여라. 나의 어제가 그랬듯이, 나의 오늘이 이렇듯이, 혼자서 걸아가야만 하는, 인생 참 외로운 여행이어라.”
인생의 해답을 받았지만, 그 해답이 오히려 나를 더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 인생은 어떻게든 외로울 수밖에 없노라고 바람이 속삭인다. 이토록 어려운 인생의 해답. 그는 이 모든 해답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그저 온몸으로 맞이하며 꿋꿋이 서있는 나무처럼. 그렇게 나무는 자라서 더 튼튼해진다. 그렇게 외로운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을 견디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누군가 쉬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무와 아이”는 내 곁에 머무른 외로운 아이에 관하여 노래한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언덕을 찾아와서, 내 그늘에 기대 쉬며 휘파람 불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 노래.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외로운 아이의 노래. 바람이 불면 아이는 나무를 찾아갔었네. 그냥 기대어 있기만 해도 외롭지 않았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나와 음악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내게 음악은 언제나 나무 같았다.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만큼 많은 말을 하지는 않는 존재. 내게 닿는 건 아무런 실체도 없이 오직 소리뿐이지만, 그래서 더욱 깊게 기댈 수 있었던 존재. 내 곁에 아무도 없어 외로울 때조차,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이던 존재. 내게 음악이란, 노래란, 그런 존재였다. 아무도 몰라줄 것 같았던 나의 외로운 마음이 음악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 노래”가 되곤 했다.
이 노래는 19세기 스페인 클래식 기타 음악의 거목 “페르난도 소르(Fernando Sor)”의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이를 통해, 이 노래가 양희은 본인이 은혜를 입은 거목들을 향한 헌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희은, 그도 누군가의 노래에 기대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외로울 때마다 노래를 했더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 거목이 되어 갔을 터. 이제는 그 거목에 기대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양희은이라는 거목에 기대 쉬던 사람들도, 양희은을 따라 거목이 되어갈 것이다. 아이유 목소리를 타고 “가을 아침”이 울려 퍼지는 풍경이 떠오른다. 나무라고 하니, 다른 사람이 노래한 나무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우선 김광석 노래 “나무”가 떠오른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 없지.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하오.”
김민기는 “상록수”를 통해 나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김민기는 양희은이 기댔던 거목이었고, 김광석은 양희은에게 기댔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한국 포크 계에 거목이 된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노래하는 걸 듣고 있으면, 헤르만 헤세가 나무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걸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가정집 안에서, 크고 작은 숲 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나무는 마치 고독한 존재와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려는 사람과는 다르다. 마치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고독하게 버텨낸 위대한 사람 같다.”
■ 힘들고 외로워도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책임지고
이렇게 튼튼한 나무조차 버티기 힘든 순간이 오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이토록 튼튼한 거목도 흔들리게 만드는 폭풍이 된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사랑의 폭풍을 묵묵히 온몸으로 받아 버틸 수밖에 없었던 쓸쓸한 처지를 노래한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겪게 될 폭풍이며, 내 삶의 뿌리부터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는 걸, 이토록 담백한 음색으로 표현한다. 이런 폭풍 앞에서도 우리는 버틸 수밖에 없다는 걸, 이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표현한다. 이토록 폭풍 같은 사랑을, 양희은의 노래는 이토록 담백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받아낸다. 이 노래가 내 삶도 그렇게 될 수 있으라 주문을 외워주는 것 같다. 이 주문은 마법이 되어, 내 삶을 어떻게든 버티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내 삶은 나무를 닮아간다.
폭풍이 지나고, 편안한 밤이 찾아온다. 양희은의 목소리는 “어린 왕자”를 읽어준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이지만, 그 시간들을 기꺼이 버티라고, 그 시간들에 마땅히 책임을 지라고, 그래야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이 속삭임을 따라, 내 인생도 그런 나무가 되길 소망하게 된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김민기의 노래처럼 “돌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어떻게든 아름답게 자라나는 그런 나무.
나무가 되어, 내게 다가오는 시간들을 기꺼이 책임지며 살고 싶다. 내 그늘 아래 쉬어가는 사람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유행도 좋고, 사람들의 환영도 받고 싶지만, 나는 결국 나무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것이 내 글쓰기가 가진 본질이다. 나무를 닮아가는 내 인생에, 나무를 닮은 양희은의 노래가 들린다. 양희은의 나이테는 나의 나이테가 되어, 나의 가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트랙리스트
1. 그해 겨울
2. 그리운 친구에게
3. 가을 아침
4. 저 바람은 어디서?
5. 11월 그 저녁에
6. 나무와 아이
7.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8. 잠들기 바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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