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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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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1: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iral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자기혐오로 옮겨지는 것에 대한 음악적 고찰

  

■ 다자이 오사무와 트렌트 레즈너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가 내 나이 스물넷이었다. 그전까지의 나는 나름대로 예술을 굉장히 사랑하고, 또 웬만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있어서는 그다지 경이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가 쓴 그 소설 한 편이, 내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은 것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은 것은,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경외심을 느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대사건이었다.

 

내가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같이 떠오른 뮤지션이 한 명 있다. 그는 내 고등학생 시절 최고의 우상이었던, 내가 신보다도 훨씬 숭배해 마지않았던 인물,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다. 그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라는 밴드의 프론트맨이다. 나인 인치 네일스는 트렌트 레즈너가 혼자 이끄는 원맨밴드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가 그 밴드의 유일한 정규 멤버인 셈이다.

 

내가 “인간 실격”을 읽고 나서, 트렌트 레즈너를 떠올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설 “인간 실격”과 트렌트 레즈너가 나인 인치 네일스를 통해 보여준 음악 세계는 비슷한 면이 많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 실격”과 나인 인치 네일스, 둘 다 데카당스 색채가 진하게 묻어난다는 점이다. 데카당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 예술의 상투적인 미의식에서 벗어나, 기괴하고 어두운 것들에 집중하여 새로운 미의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나에겐 이런 데카당스 색채가 강한 예술 작품들에게 강하게 마음이 끌리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 앨범 아트웍

■ 나인 인치 네일스가 내 마음 속으로 오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어떻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그것은 나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 시절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감당하기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지극히 자기혐오와 염세주의에 빠져 살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언제나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의 아픔 같은 건 털어놓아도, 비웃음만 받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계속 나 혼자서만 안고 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지만, 그 당시의 나는 심각했다. 아무래도 남들과 소통하는 데에 지극히 서투른 아이였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다.

 

소통에 지극히 서투룬 아이였던 나에게, 세상을 향한 증오와 자기혐오에 관해 가감없이 솔직한 감성을 내뱉는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당연히 마음에 와 닿았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 실격”이 나로 하여금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경외심을 느끼게 한 것과 같이,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에 깊이 침투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했다. 단 하나의 예술 작품이 영원히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에 관해 난생처음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이 이 지점이었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을 알고 나서는 음악이라는 것을 마냥 가볍게 대할 수만은 없었다. 음악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인생의 전부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음악뿐만 아니라, 예술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런 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

■ 나인 인치 네일스의 불세출 명반 “The Downward Spiral”과의 만남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The Downward Spiral”은 트렌트 레즈너를 나의 우상으로 만드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불세출의 명반이다. 이 앨범은 나인 인치 네일스가 1994년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앨범이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예술 잡지인 롤링스톤지에서 역대 최고의 대중음악 명반 500선을 뽑았는데, 그 목록에서 이 앨범은 당당하게 201위라는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이 앨범은 놀랍게도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둬,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앨범에 대한 업적이나 객관적인 사실들, 뒷이야기 등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크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선 이러한 것들에 관해 말을 줄이고,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또 내가 가장 얘기하고 싶은 방식으로 이 앨범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이 앨범에 대한 느낌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굉장히 더럽고, 기괴하고, 난해하고, 음산하고, 우울하고, 과격하고, 아무튼 긍정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별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앨범은 내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는가. 지금부터 이 앨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 앨범이 나를 사로잡은 매력에 관해 풀어놓도록 하겠다.

 

일단 이 앨범은 콘셉트 앨범이다. 즉, 앨범 수록곡들이 불가분의 유기성을 형성하면서,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이루는 앨범이라는 얘기다. 이 앨범의 콘셉트는 온갖 사악한 것들을 접하면서, 세상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품게 되고, 그것이 자기혐오로 이어져, 결국에는 자살에 이르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앨범의 제목 “The Downward Spiral”에 대해, 그것이 목을 매달아 자살한 사람의 시체가 공중에서 하향 나선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묘사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앨범의 스토리텔링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 앨범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Mr.Self Destruct, Piggy(Nothing Can Stop Me Now), Heresy, March of the Pigs, Closer까지 이어지며,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사악한 것들을 접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 첫 번째 부분이고, 두 번째는 Ruinner, The Becoming, I Do Not Want This, Big Man With a Gun"까지 이어지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는 화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세 번째 마지막 부분은 A Warm Place", Eraser", Reptile”, The Downward Spiral, Hurt”까지 이어지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화자가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자기혐오로 옮겨지며, 자살에 이르게 된다.

  

  

▲ 4번 트랙 “The March of the Pigs” 뮤직비디오.

■ 온갖 사악한 것들

1번 트랙 “Mr.Self Destruct는 이 앨범의 화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이런 놈이야”라며 자신에 대한 온갖 자책하는 말들을 쏟아놓는 노래다. 원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실컷 일그러진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웅장하게 몰아치며 화자의 분노를 대변한다. 신경을 난도질하는 듯 대책없이 몰아가는 소리들이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감정에 압도되게 만든다. 그렇게 청자를 실컷 압도시킨 화자는 2번 트랙 Piggy라는 또 다른 장으로 청자를 인도한다. 여기선 뭔가 분위기가 잠잠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방심하는 순간 드럼 소리가 어지럽게 난입하며 청자를 놀래킨다. 어지러운 드럼 소리 사이로 묵묵하게 지나가는 베이스 기타와 트렌트 레즈너의 보컬은 “고요한 광기”라는 단어를 새삼 온몸으로 깨닫게 만든다. 3번 트랙 Heresy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잠시 떠올리게 한다. 종교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독설을 내뿜는 가사에 못지 않게, 이 트랙에서 보여주는 사운드도 굉장히 독기와 광기가 서려있다.

 

3번 트랙까지 깊은 광기를 들이마셨으면, 이제 뭔가 편해질 법도 한데, 화자는 청자를 아직 편하게 만들 생각이 없는 듯하다. 4번 트랙 “March of the Pigs”는 가장 격렬한 드럼 솔로 플레잉으로 난폭하게 등장한다. 그 위로 잔뜩 일그러진 일렉트릭 사운드가, 폭풍을 맞이한 독수리 마냥 자신의 날개를 난폭하게 뒤흔들며 끼어든다. 그 때, 트렌트 레즈너의 목소리와 기타가 광기와 분노를 더하며 곡의 질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잠시 고요해지는 듯 연주가 잦아들고, 광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지만, 갑자기 쇼팽의 야상곡에서나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깔린다. 그러나 연주는 방금 전에 깔린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시 그 전처럼 난폭한 질주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시 피아노 선율이 깔리며 편안하게 곡이 마무리 된다. 편안함은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가지만, 괴로운 순간은 오래 지속되는 화자의 괴로운 심정이 느껴진다.

  

  

▲ 5번 트랙 “Closer”의 뮤직비디오 (혐오스러운 장면 주의)

■ 세상에 대한 분노

5번 트랙 Closer는 이 앨범의 가장 큰 세 부분 중에, 첫 번째 부분에서 두 번째 부분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트랙이다. 이 트랙은 주체할 수 없는 섹스에 대한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화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곡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으로 자신의 상처와 결점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화자의 모순된 생각과 그런 생각을 통해 오는 뒤틀린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화자는 사랑과 성적인 욕망 사이에서 심각하게 방황하고 있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어둡고 기괴한 비트, 그 위에 서서히 중첩되는 징그럽게 날뛰는 여러 악기들을 통해, 섹스로 잠시 동안의 만족을 누리지만, 결국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표현했다.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어지럽게 방황하는 화자의 감성이 청자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다.

 

6번 트랙 Ruinner에선 화자의 각성이 이뤄진다. 화자는 여기서 세상의 많은 욕망들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징그럽고 커다란 괴물이 되어버린 거지?”라고 노래한다. 트렌트 레즈너는 화자의 감정을 클래식 대편성 교향곡의 형식을 빌려, 웅장하게 표현한다. 7번 트랙 The Becoming은 어둡고 기괴하게 변한 건반 악기 소리가 어지럽게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 위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샘플링으로 깔리는데, 어지러운 연주와 비명 소리가 나뒹구는 와중에, 트렌트 레즈너의 보컬은 비교적 담담하게 화자의 감정을 풀어낸다. 그러다가 서서히 자신의 광기를 끌어올리며 음악을 진행시킨다. 화자는 자신의 광기가 아름다운 감성들을 서서히 잡아먹으며,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전달한다. 청자는 기괴하고 과격한 사운드에 얹힌 화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광기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어가는 화자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8번 트랙 “I Do Not Want This”에선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과 과격한 헤비메탈 사운드가 서로 대결을 벌이는 듯이 번갈아 등장하며 곡이 진행된다. 그러한 곡 진행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난 이걸 원하지 않아라고 말하다가도, 넌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몰라라며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건 모두 세상의 탓이라고 소리치는 화자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대변한다. 9번 트랙 Big Man with a Gun에선 화자가 참아왔던 모든 광기를 다 쏟아내는 듯 폭발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다 망쳐버리는 화자의 모습이 청자의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 14번 트랙 “Hurt”의 1995년 라이브 영상

■ 자기혐오 그리고 자살

10번 트랙 “A Warm Place”는 보컬이 없는 순 연주곡이다. 화자가 9번 트랙에서 모든 광기를 쏟아내자 너무 지쳐 쓰러진 모습이 연상되는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의 곡이다. 그러다가 11번 트랙 “Eraser에 들어서면서 박자가 조금씩 빨라진다. 빨라진 박자는 청자에게 또 다른 안 좋은 예감을 선사한다. 이 앨범 전체에 맴돌았던 조용한 가운데에 기괴하게 끼어드는 그 일렉트릭 사운드가 다시 등장한다. 마침내 이 곡 후반부에서 화자의 광기가 다시 폭발한다. 하지만 이제 그 광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향해있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지우고, 뭉개고, 죽여달라며 목이 갈라져라 소리친다.

 

12번 트랙 Reptile”에선 화자가 Closer와는 또 다른 색깔로 성적인 욕망에 대해 노래한다. Closer에선 그래도 화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따뜻한 감성을 되찾으려는 뜨거운 열망이 보이지만, 이 곡에서 화자는 아예 자신의 성적 대상을 파충류, 그러니까 냉혈로 정의하면서, 자신의 따뜻함은 완전히 종말을 맞이했음을 비참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13번 트랙 The Downward Spiral에선 꼬부라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타 연주가 잔잔하게 울려퍼지다가, 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기계적 왜곡이 더해진 상태로 울려퍼지는데, 이는 곧, 화자가 자살했음을 의미한다. 트렌트 레즈너의 보컬은 화자가 죽음에 이른 모습을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러나 잔잔함과 요란함이 동시에 어지럽게 공존하는 연주는 죽음을 맞이한 화자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노출한다.

 

화자는 13번 트랙에서 이미 죽었지만, 마지막 트랙 Hurt는 13번 트랙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미처 얘기하지 못했던 화자의 따뜻했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니까 스토리텔링적으로 과거로 돌아간 셈이다. 13번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던 광기와 우울함이 마침내 마지막 트랙에서 말끔히 씻긴 듯, 마지막 트랙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들린다.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소리가 잔잔하게 퍼지고, 그 사이에 깔리는 트렌트 레즈너의 애잔한 보컬은 청자로 하여금, 13번 트랙까지 이어져 오던 화자의 광기 이면에 감춰진 깊고 복잡한 속사정을 가늠하게 한다. 광기에 지배되었지만 그도 결국엔 따뜻함을 갈망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음악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한다. 그 아름다움에 청자는 설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곡이 끝날 땐 잠시 잊고 있었던 그 과격하고 기괴한 사운드가 다시 등장한다. 마치, 다시 다가올 인생의 괴로움을 암시하듯이...

  

  

▲ 앨범 아트웍

■ 내 안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자리한 분노와 슬픔을 건드리다

여기까지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역시 이 앨범엔 긍정적인 느낌이랄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나는 그래서 이 앨범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남들이 해 주는 상투적인 격려나 밝은 말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고, 세상에 나홀로 남겨진 것 같다. 그럴 때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격려가 아닌 공감이다.

 

그러나 나의 이 깊고 어둡고 더러운 감정들을 누구에게 함부로 하소연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죽이고 싶고, 범하고 싶고, 세상이 너무 싫고, 이런 말들을 함부로 꺼냈다가 남들이 날 훨씬 더 멀리하게 되면, 그래서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려, 살아가는 게 안 그래도 힘든데 더 힘들어지면 어쩌자는 말인가? 내가 저런 하소연들을 한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 있음을, 나를 잘 모르는 인간들에게 어떤 식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앨범은 그런 가장 깊고 어둡고 더러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과장도 축소도 없이 표출한다. 이 앨범 속 화자가 음악으로 전달한 이야기에 빠져들면, 마치 이 화자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만 같다. 이 화자야 말로 내 마음에 가장 깊게 공감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위에서 썼듯이 나는 고등학생 시절, 세상에 대한 지독한 분노와 끔찍한 자기혐오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지금은 인생을 거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적절하게 하소연하는 방법을 배우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며, 나름 그 시절에 비하면 꽤 괜찮은 인간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 만난 이 앨범은 나를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록 이토록 더럽고 기괴할지라도.

 

요즘은 그 시절만큼 트렌트 레즈너를 숭배하지도 않고, 나인 인치 네일스를 즐겨 듣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단 한 명의 뮤지션에게 가슴 깊이 은혜와 존경의 감정을 느끼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 그 때에 비하면 나는 비록 마음이 많이 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되돌아보면 인생이 재밌었던 쪽은 오히려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뭘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음악에만 기대어 살던 그 시절. 그래서 음악만 들어도 눈물나도록 행복하던 시절. 그 시절이 그리워지면 나는 다시 오랜만에 만난 친구 만나듯이 나인 인치 네일스의 음악을 듣는다. 그 때의 내 감성과 지금의 내 감성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 시절에 내가 나인 인치 네일스를 들으며 은혜를 느낀 기억은 변치 않고 날 떠나지 않았음을 느낀다. “The Downward Spiral”은 나의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앨범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트랙리스트

1. Mr.Self Destruct

2. Piggy(Nothing Can Stop Me Now)

3. Heresy

4. March of the Pigs

5. Closer

6. Ruinner

7. The Becoming

8. I Do Not Want This

9. Big Man With a Gun

10. A Warm Place

11. Eraser

12. Reptile

13. The Downward Spiral

14. H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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