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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크라잉 넛(Crying Nut) - OK목장의 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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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18: 크라잉 넛(Crying Nut) - OK목장의 젖소


[ 부조리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유쾌하게 살아가는 방법 ]

 

 

■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


밝게 떠오르는 새해와는 달리, 하나 더 늘어난 나이 때문에 표정이 어둡게 물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동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어난 나이 하나 때문에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밝아오는 새해를 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대했을까 돌아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가는데, 겨우 하루 지난다고 당장에 뭐가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다만 내가 특별하게 여겼던 건, 1월 1일이 휴일이라서 회사에 안 가도 된다는 것뿐이었다.


특히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슬프다며 호들갑떠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해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이가 한 살 늘어나는 것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사실,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게 좋았다. 나이가 늘어가면서 내 안에 더 많은 글과, 더 많은 음악과, 더 많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발견하게 될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맞이할 생각에, 오히려 가슴이 기쁨으로 설렜다. 얼굴에 잔주름 몇 백 개 정도 늘어나는 건, 세상의 흥미로운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될 기쁨에 비하면 미세한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10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10년 전에는 지금의 내 모습이 이렇게 밝아질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다. 10년 전의 나는 우울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삶을 긍정하는 나 자신의 미래를 상상할 여유 따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오히려 경이로운 것 같다. 내 모습을 과거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으로 바꿔놓으니까. 10년 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레 그 시절에 내가 자주 들었던 음악들도 같이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엔 내가 그 시절 가장 많이 듣던 음악 중 하나인 크라잉 넛(Crying Nut)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크라잉 넛(Crying Nut) 좌측부터 한경록(베이스), 김인수(키보드, 아코디언), 박윤식(보컬, 기타), 이상혁(드럼), 이상면(기타)
  

  

 크라잉 넛의 변화


내가 그 시절에 가장 자주 들었던 크라잉 넛 앨범은 정규 1집이었다. 크라잉 넛의 앨범은 모두 명반이지만, 1집은 내가 생각하기에 특히 빼어난 명반이었다. 레코딩은 크라잉 넛의 모든 앨범들 중에서 가장 조악하지만, 특유의 날것 느낌이 풍기는 게 좋았다. 크라잉 넛의 모든 앨범들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가장 시끄럽다는 점도 좋았다. 그 시절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그런 류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대한민국 국가대표 펑크 밴드답다고나 할까, 그들의 최고 히트곡인 “말달리자”가 수록된 건 물론이고, 그 노래보다 훨씬 좋은 다른 수록곡들이 앨범을 빛냈다. 나는 특히 “파랑새”와 “요람을 흔드는 돈”을 제일 좋아했다. 1집을 통해 크라잉 넛에 깊이 빠져들었고, 정규앨범을 하나 둘 더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5집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5집은 1집과 비교하면 분위기부터 많이 달랐다. 십 년 전에 내 생각은, 록 음악이란 무조건 과격하고 어두워야 진짜배기라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나는 나인 인치 네일스, 마릴린 맨슨, 섹스 피스톨즈, 너바나 등 절대로 밝거나 편안한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밴드만 들었다. 가끔 록 음악이 아닌 음악도 듣기는 했지만, 처절한 슬픔을 내뿜는 발라드나 포크 등을 주로 들었지, 밝은 정서의 음악은 아예 듣지도 않았다. 실은 안 들은 거라기 보단, 못 들은 것에 가깝다. 밝은 정서의 음악은 내 마음이 받아들이질 못했다. 크라잉 넛 정규 5집 “OK목장의 젖소”는 원래 같았으면, 내가 딱 거부하는 밝은 정서로 가득 한 앨범이었다. 1집을 보면, 그토록 날카롭고 독한 사운드가 가득하고, 과격한 사회비판이 난무하는 가사로 가득했는데, 어쩌다 그들은 5집처럼 밝은 정서가 가득한 앨범을 만들게 된 걸까? 그게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난 그 앨범이 좋았다. 그 시절에 내가 즐겨들었던 몇 안 되는 밝은 정서가 주를 이루는 앨범이었다.


일단 1집과 5집은 대표곡만 비교해 봐도 무척 다르다. 1집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곡의 가사는 “닥쳐!”다. 반면에 5집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곡의 가사는 “룩, 룩, 룩셈부르크. 아, 아, 아리헨티나”다. 크라잉 넛 특유의 유머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정서가 다르다. 목이 터져라 “닥쳐! 닥쳐!” 외쳐대던 무서운 양아치 형님들은 어디가고, 유치원생이 부르는 동요 같은 가사로 노래하는 친근한 동네 아저씨들이라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들의 변한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다. 그 당시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별로 파헤치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다시 “OK목장의 젖소”를 들어보니, 그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 크라잉 넛 정규 5집 “OK목장의 젖소”의 2번 트랙 “룩셈부르크” 라이브영상

  

  

 OK목장의 젖소


“OK목장의 젖소”는 크라잉 넛이 2006년에 발표한 정규 5집 앨범이다. 표지부터 젖소가 얼굴을 내밀며 귀엽게 맞이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밝은 정서가 주를 이루는 앨범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밝고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 이별이나 자아성찰,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 등의 진지한 주제도 다룬다. 진지한 주제도 크라잉 넛 특유의 유쾌함으로 녹여내, 크게 무겁거나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진지한 주제에서도 절망보단 밝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 앨범을 듣고 있다 보면 크라잉 넛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앨범에서 크라잉 넛은 근엄한 스승이나 강한 운동가의 모습이 아니다. 음악으로 뭔가를 억지로 바꾸려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술 한 잔 느긋하게 나누면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친구로서 인생에 관해 논한다. 그래서 이 앨범은 크라잉 넛의 어떤 앨범들보다도 마음이 편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앨범과 동명의 1번 트랙 “OK목장의 젖소”는 앨범을 시작하는 인트로 트랙이다. 재치 있는 내레이션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샘플링이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내는 트랙이다. 2번 트랙 “룩셈부르크”는 나라 이름을 여러 개 나열하면서, 결국엔 “피부 색깔, 말은 모두 틀려도 우리는 자랑스런 인간이다”라고 외치며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다. 펑크록(Punk Rock) 특유의 직진성 가득한 사운드에 몸을 들썩이다 보면, 외국을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유쾌한 펑크록이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의 비행기가 크라잉 넛 월드로 나를 데려가서, 맨 처음 착륙한 곳은 3번 트랙 “부딪쳐”다. 2번 트랙보다 더욱 빠르고 강력해진 펑크록 사운드가 2번 트랙에서 들뜬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4번 트랙 “명동콜링”은 제목에서 뭔가 펑크록의 거물 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이라는 노래를 패러디한 것 같다. 그러나 “London Calling”의 뻣뻣하고 심각한 분위기와는 달리, “명동콜링”은 아련하고 촉촉한 러브송이다. 러브송이지만 떠나간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 4번 트랙 “명동콜링” 뮤직비디오


“명동콜링”의 애절한 분위기에 살살 젖어갈 때 즈음, 친구들이 다 잊어버리라며 내게 술을 권한다. 5번 트랙 “마시자”의 등장이다. 전 트랙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다 잊힐 정도로 흥겨운 노래다. 정겨운 피리 연주가 들어가서 더욱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연출되는 곡이다. 6번 트랙 “유원지의 밤”은 3번 트랙처럼 정통 펑크록에 좀 더 가까운 곡이다. 깊은 밤, 지난 추억을 회상하며 다시 그 때의 느낌을 느껴보자며 소리친다. 템포가 느려졌다 빨라졌다 변화를 거듭하며, 감성에 젖은 느낌과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픈 뜨거운 열망을 동시에 표현했다. 7번 트랙 “뜨거운 안녕”도 정통 펑크록 트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운드는 6번 트랙보다 훨씬 직진적인데, 어딘가 애절함이 더해진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8번 트랙 “물밑의 속삭임”은 이색적이게도 심수봉과 호흡을 맞춘 곡이다. 심수봉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펑크록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크라잉 넛에게도 충분히 대선배라고 할 만한 뮤지션이다. 그런 대선배와 호흡을 맞춰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이 놀랍다. 게다가 같이 호흡을 맞춘 뮤지션이 펑크록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니 보니, 곡의 분위기가 이 앨범에서 가장 이색적이다. 크라잉 넛의 좀 더 다양한 음악을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느리면서도 부드럽게 퍼지는 하모니카 소리와 해금 소리가 애절함을 더한다.



 강력한 뒤쪽 트랙


아무리 명반이라도 대부분의 정규앨범은 당연하게도 뒤쪽 트랙보다 앞쪽 트랙이 더 좋게 느껴진다. 그건 노래의 퀄리티가 뒤쪽 트랙이 더 딸려서 그런 거라기 보단, 아무래도 사람이 앨범을 듣다보면 뒤로 가면서 점점 지쳐가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앞쪽 트랙도 좋지만, 이상하게 뒤쪽 트랙이 더 좋다. 지금까지 앞에 여덟 트랙을 살폈으니, 이번엔 뒤에 여덟 트랙을 살펴보자. 뒤쪽 트랙을 살펴보면, 앞쪽 트랙보다 훨씬 다채로운 음악적 실험과 훨씬 강력한 사운드가 뿜어지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앨범은 뒤로 갈수록 지치는 게 아니라, 뒤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해진다.

  

  

 

▲ 9번 트랙 “백수일기(白水日記)”

  

9번 트랙 “백수일기(白水日記)”는 내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가사와 사운드가 조화를 이뤄 내 머릿속에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 넣기 때문이다. 이 곡 자체가 하나의 영화 같다. 이 곡 하나만 들으면 청춘의 사랑을 주제로 만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것 같은 감동이 몰려온다. 가사는 옛날에 써둔 일기를 무심코 펼쳤다가,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미쳐가는 내용이다. 힘차게 뻗어나가는 펑크록 사운드가 가사 속 화자의 자괴감을 대변한다. 가사 속 화자가 미쳐서 난리피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우습기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그 모습이 공감되어서 애잔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9번 트랙의 우습고도 슬픈 광기가 지나가면 10번 트랙 “새”의 잔잔한 리듬이 마음을 적셔온다. 우쿨렐레 연주와 아코디언 연주가 하와이의 노을 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하와이 특유의 따스한 기온과 진한 노을 아래 느긋하게 누워서, 떠난 연인을 떠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1번 트랙 “My World”는 10번 트랙의 애잔함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신나는 곡이다. 요즘 나는 “돌아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 떠나가면 모두가 그리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결국엔 “나는 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아서, 뭐가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모두 나의 것. 싸우지 말고 살아 봐요”라고 말하는 이 노래 가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이 앨범에서 가장 현란한 아코디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곡이라서 색다른 느낌을 준다. 12번 트랙 “순이 우주로”는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잔잔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곡이다. 13번 트랙 “오줌싸개 Generation”은 도어즈처럼 몽환적인 건반 악기 연주와 직진적인 펑크록 연주가 교차되며 묘한 긴장감을 주는 곡이다. 14번 트랙 “한낮의 꿈”은 어딘가 국악 느낌이 나는 잔잔한 곡이다. 15번 트랙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은 13번 트랙과 좀 비슷한 느낌인데, 신디사이저와 아코디언이 더욱 비중이 커져서, 몽환적이고 실험적인 느낌을 더한 곡이다. 마지막 16번 트랙 “튼튼이의 모험”은 위에 모든 트랙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잔잔한 곡이다. 지난 트랙들이 줬던 감동을 다시 음미하기에 딱 알맞다.



 그들처럼 나이 들어간다면 나이 드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크라잉 넛은 분명히 변했다.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세상을 향한 독기는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독기를 조금 덜어냄으로써 삶과 세상을 긍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에 저항하는 걸 멈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생을 즐길 땐 제대로 즐기고, 맞설 땐 제대로 맞설 줄 아는, 그런 성숙함을 몸에 익혔다는 뜻이다. 크라잉 넛의 정규 5집 앨범 “OK목장의 젖소”는 그들이 세상의 부조리와 인생의 고난 앞에서도 유쾌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증명한 작품이다. 그들의 인생철학을 음악으로 유쾌하게 표출했다.

  

  

 

▲ 크라잉 넛 대표곡 “말달리자” 라이브영상


그들의 음악을 듣다 보면, 나도 그들처럼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들처럼 살 수만 있다면 새해도 꽤 유쾌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크라잉 넛 1집을 들어보면, 나의 10년 전 모습처럼, 그들도 세상을 향한 분노와 독기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속에서도 능숙하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런 그들의 인생이 음악으로 자연스레 표출된 것이다. 그들의 변화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게 된다. 이미 반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어 살아가는 모습이 좀 변하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고, 계속해서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트랙리스트


1. OK목장의 젖소

2. 룩셈부르크

3. 부딪쳐

4. 명동콜링

5. 마시자

6. 유원지의 밤

7. 뜨거운 안녕

8. 물밑의 속삭임 (feat. 심수봉)

9. 백수일기(白水日記)

10. 새

11. My World

12. 순이 우주로

13. 오줌싸개 Generation

14. 한낮의 꿈

15.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16. 튼튼이의 모험

17. (Hidden 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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