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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피해의식(Victim Mentality) - WAY OF STEEL

   

인생명반 에세이 20: 피해의식(Victim Mentality) - WAY OF STEEL


[ 시대착오를 인정하며, 시대와 더 가까워진 역설 ]

 

 

■ 블랙코미디


최근 유병재가 쓴 책 “블랙코미디”를 인상 깊게 읽었다. 제목에 걸맞은 책이었다. 길어봐야 세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고, 대다수는 한 페이지 안에 끝나는 짧은 이야기들로 이뤄져있다. 단 두 세 문장 안에 끝나는 부분도 많았다. 그런 짧은 이야기들 속에 폭소와 씁쓸함을 동시에 담아냈다. 단 하나의 이야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웃겼다. 그 웃음 뒤에는 항상 깊은 생각을 동반하는 씁쓸함이 따라오기도 했다. 그 책을 단순히 유머 모음집으로 취급할 수 없었던 이유다. 과연 제목에 충실한 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한 헤비메탈 밴드가 떠올랐다. 그들의 이름은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이다.


내가 헤비메탈 밴드 피해의식에 관해 처음 알게 된 건,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 시즌 7”을 통해서였다. 딱 봐도 “우리는 글램 메탈(Glam Metal) 밴드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개성 있는 비주얼부터 눈에 띄는 밴드였다. 평소 록 음악에 빠져 사는 나에겐 반가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보컬이 자신들의 대표곡 “Heavy Metal Is Back”을 노래하자,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넌 아직 그런 구린 걸, 아직까지 하고 있냐고. 머리는 또 그렇게 길게 해야 하냐고. 진지하게 묻는 널 혼내주고 싶지만, 사실 나도 잘 몰라. 왜 이렇게 됐는지.” 자신들의 비주얼과 음악이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당당하게 인정하는 가사라니. 거기에 처절한 자학까지 곁들여져, 후렴구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노래와 밴드가 기억 속에 깊게 박혀버렸다. 심사위원들 중에서도 의외로(!) 헤비메탈에 조예가 깊은 윤종신이 가사에 격하게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도 같이 공감의 웃음을 터트렸지만, 웃고 나서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 그들이 꼭 그렇게까지 자학을 했어야만 했을까 싶어서. 이유야 어찌됐든 일단 웃기니까 그냥 넘기자 싶었는데, 뒷맛이 너무 씁쓸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 피해의식 “Heavy Metal Is Back” 라이브 영상

  

피해의식은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지키는 동시에, 대중의 주목까지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의 음악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실제로 그 방법은 꽤 잘 먹혔다. 이제야 씁쓸함의 정체가 더 명확해진다. 정말이구나. 이제 대한민국에 글램 메탈이 뜨려면, 저러는 수밖에 없구나. 그만큼 글램 메탈은 한국에서 외면 받는 장르구나. 그들은 분명 포지션 중에 뭐 하나 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음악적 역량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대중의 주목을 받기엔, 진중한 음악성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너무 잘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택했다. 차라리 그걸 깨끗하게 인정하고, 우스운 자학을 통해 대중과 가까워지자! 아, 이토록 뒷맛이 씁쓸한 코미디라니. 과연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블랙코미디는 계속 된다


이미 정규앨범도 하나 냈는데, 이젠 두 번째 정규앨범 “WAY OF STEEL”이다! 1집에서 2집으로 넘어가면서 그 사이에 밴드 멤버도 두 명이나 바뀌었다. 특유의 블랙코미디는 여전한 모양인지, 그 중엔 제목부터 황당하고 우스운 곡이 많다. “I Hate Hiphop”이라니. 1집 수록곡 “Heavy Metal Is Back”에서 래퍼들을 두고서 “사실 나도 너희들이 졸라 부러워. 우리들도 너네처럼 하고 싶었는데.”라고 말할 땐 언제고, 힙합이 싫다고 대놓고 말할 줄이야. 그런데 밴드가 유통사에 배포한 디지털 싱글의 소개글은 비굴하기 짝이 없다. “본 싱글 앨범은 단순한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하다. 힙합을 터는 것에 대해 우려들이 많은데, 난 거기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콩고물이나 좀 주워 먹어보자는 것이지 별 다른 큰 뜻은 없다. 그들도 이해할 것이다.” 납득이 가도 너무 잘 가서, 웃프다. 그러나 곡 자체는 힙합을 찢어 죽일 기세로 강력한 연주를 쏟아낸다. 마치 “힙합 같은 구린 음악은 그만 들으란 말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물론 필자는 힙합 좋아한다.


6번 트랙 “벚꽃엔딩”을 보자. 곡 제목부터 딱 버스커 버스커 노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 노래가 디지털 싱글로 선공개 되었을 때 제목을 보면 황당하다. 자신들의 노래는 버스커 버스커 노래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이, 대놓고 곡 제목 뒤에 “The Original”을 붙였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뮤직비디오들은 또 어떠한가. “벚꽃엔딩 The Original”은 처음엔 좀 진지한 이별 이야기를 촬영한 것처럼 흘러가는데, 가면 갈수록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느닷없이 물벼락 맞는 부분에만 집중된다. 7번 트랙에 수록된 “무임승차” 뮤직비디오는 분위기가 좀 진지하게 간다 싶으면, 뮤직비디오에 무게 잡는 걸 방해하는 인물이나 상황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정도 되면 자학은 그들에게 있어 단순히 주목 받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그들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 7번 트랙 “무임승차” 뮤직비디오

     

    

 

▲ 10번 트랙 “관심법” 뮤직비디오


그들의 블랙코미디는 자신들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말하거나, 사람들의 주목을 위해 웃긴 요소들을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10번 트랙 “관심법”을 보자.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필수요소로 한참 떠올라 인터넷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있는 “궁예”를 소재로 가사를 썼다. 어떻게 그런 웃긴 소재를 골라서 가사를 쓸 생각을 했나 싶어, 처음엔 웃음이 터진다. 무겁고 어두운 사운드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이 곡의 가사가 그다지 웃기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TV드라마 “태조 왕건”이 한참 인기리에 방영되던 시절에, 궁예는 시청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궁예의 광기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단 말인가. “관심법”이라는 곡을 듣다 보면, 처음엔 필수요소 궁예가 떠오르다가, 점차 그 시절의 공포의 대상이 떠오른다. “선 웃음, 후 씁쓸”의 블랙코미디 공식에 딱 들어맞는다.


블랙코미디 요소는 다른 수록곡들에서도 이어진다. 1번 트랙 “WAY OF STEEL”은 듣다 보면, 이것이 헬스장에서 죽도록 운동하는 것에 관한 곡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화려하고 육중한 헤비메탈 연주 속에 녹아내기엔, 가사의 주제가 너무 사소한 것 아니냐고 코웃음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듣다 보면, 헬스장에 잘 안 다니는 나 같은 사람도 가사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가사 속 화자가 헬스장까지 와서 운동 대충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짜증나는지 몸소 깨닫게 된다.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들이, 사소해 보이는 가사들에 강제적으로 설득력을 부여한다.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주제도 헤비메탈로 노래하면, 진중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꼰대의 입장에서 요즘 젊은 것들은 어른에게 대중교통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가사를 쓴 2번 트랙 “선물은 없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과 더 가까워진 헤비메탈


그들은 블랙코미디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4번 트랙 “처음의 나로”와 5번 트랙 “MONEY IS EVERYTHING”에서는 진지한 가사와 함께, 90년대 감성이 충만한 정통 록발라드를 만날 수 있다. 평소 김경호, 박완규, 최재훈 등의 90년대 록발라드를 즐겨드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트랙들이다. 특히 5번 트랙 “MONEY IS EVERYTHING”은 돈 때문에 마음 고생하던 지난 시절을 뒤로 하고,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절창의 고음 보컬과, 헤비메탈 느낌 충만한 웅장한 연주로 가사에 힘을 더한다. 9번 트랙 “인간쓰레기”는 과격한 가사와 강한 박자가 어우러진 정통 헤비메탈 트랙이다. 헤비메탈을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중 하나는, 들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뜨거움을 느끼기 위함이다. 그런 정통 헤비메탈의 매력에 충실한 곡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화려한 기교들이 난무하며,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게 만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트랙에서, 블랙코미디로 전부 덮을 수 없을 만큼, 두드러지는 음악적 기교들을 만날 수 있다.

   

  

 

▲ 1번 트랙 “WAY OF STEEL” 뮤직비디오

  

피해의식, 그들의 새로운 정규 앨범을 들으면서 2018년 대한민국에서도 글램 메탈이 먹힐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그들이 우스운 자학을 계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피해의식의 화려한 음악적 역량에 비하면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답고 강력하신 형님들이, 기꺼이 대중들 앞에 몸을 낮춰주셨는데, 어찌 주목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리 그들이 자학과 코미디로 겉을 두르고 있다지만, 그들의 진중한 음악성을 모두 덮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음악성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블랙코미디라는 차별화된 요소를 택한 그들의 영리함에 극찬을 보내고 싶다. 헤비메탈의 시대착오적인 면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택한 그들의 영리함이 놀랍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헤비메탈이란 어렵고 낯선 음악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피해의식이라면 그들의 편견을 깰 수 있을 것이다.

  


트랙리스트


1. WAY OF STEEL

2. 선물은 없어

3. 대기발령

4. 처음의 나로

5. MONEY IS EVERYTHING

6. 벚꽃엔딩

7. 무임승차

8. 무간지옥가

9. 인간쓰레기

10. 관심법

11. I HATE HIP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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