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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버닝 햅번(Burning Hepburn) - She Is Seven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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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명반 에세이 19: 버닝 햅번(Burning Hepburn) - She Is Seventeen

  

[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음악에 대한 열정 ]

 

  

■ 삶을 지탱하는 것

 

세월이 흐르다 보면,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변해버리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변화라는 건 이렇듯 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이란 불확실성의 연속이며, 그래서 뭔가를 변하지 않도록 지켜낸다는 건 힘들다. 그런 와중에도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밴드가 있다. 대한민국의 펑크 록(Punk Rock) 밴드 버닝 햅번(Burning Hepburn)의 이야기다.

 

버닝 햅번은 2017년 12월에 세 번째 정규앨범인 “She Is Seventeen”을 발매했다. 앨범 제목에서의 “She”라는 건 밴드고, “Seventeen”이라는 건 그들이 밴드를 운영한 년 수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밴드의 년차를 앨범 제목으로 내세운 셈이다.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밴드 년차를 앨범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을까. 일단 밴드를 “She”라는 단어로 의인화시킨 것부터 밴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밴드라는 건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도구도 아니고, 수단도 아닌, 친구 그 이상의 소중한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다. “Seventeen”을 앨범 제목으로 내세운 건, 이 앨범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그 17년이라는 세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그들이 밴드로서 지내온 17년의 세월을 어떻게 여겼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뭔가를 변하지 않도록 지켜낸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뭔가를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기 위해선 그것에 대한 수많은 노력과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밴드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변치 않고, 이렇게 17년 차에 세 번째 정규앨범을 내게 된 건, 그만큼 그들이 이 밴드에게 쏟는 노력과 애정이 상당하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음악이라는 건, 더 나아가서 예술이라는 건, 그것을 지켜봐주는 관객이 없으면 지탱될 수 없다. 그들의 인지도가 트와이스나 아이유, 레드벨벳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그들의 음악을 꾸준히 찾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밴드를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버닝 햅번(Burning Hepburn). 좌측부터 김희정(키보드), 한상우(베이스), 송원석(리드보컬, 기타), 정우원(리드기타, 보컬), 오근택(드럼)

    

■ 17년

 

그들이 17년 동안 어떤 힘으로 밴드를 지탱했으며, 17년 동안 밴드를 운영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살펴보자. 앨범의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펑크 록 밴드답게 신나고 경쾌한 사운드가 주로 이어지지만, 2010년에 발표한 정규 2집 앨범 “Life Goes On”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워졌다. 2집 앨범에서는 스카(Ska)의 색채가 강했는데, 이번 앨범에선 스카의 색채는 조금 줄고, 브릿팝(Britpop) 특유의 세련되고 푹신푹신한 느낌이 더해진 것 같다. 아무래도 17년 동안 쏟은 밴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폭발력 있는 사운드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펑크 록 밴드로서의 가공할 폭발력도 지니고 있다. 여전히 폭발적이면서도 부드러움과 세련됨이 더해졌다는 게 전체적인 느낌이다.

 

1번 트랙 “Wake Up”은 17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이 있다는 걸 과시하듯, 활기찬 사운드를 선보인다. 2번 트랙 “ORS”는 부드러운 감성이 돋보이는 전주로 시작한다. 연주가 조금 더 바빠지고, 후렴 부분에서 폭발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 폭발력 있는 사운드는 어딘가를 향해 공격적인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단, 자신의 정서 속에 들어있는 애잔한 추억의 색채를 뿜어내는 것 같다. 3번 트랙 “넥타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발력과는 거리가 먼, 편안한 사운드가 이어진다. 가사 속 화자는 자신의 가족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넥타이”의 가사를 살펴보면, 자신의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이 자신에게 넥타이를 목에 멘 평범한 회사원이 되길 바랐는데, 자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보컬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런 것에는 이미 익숙해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그 중에 어딘가 위로를 바라는 애잔한 정서가 느껴진다. 위로라는 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위로라는 건 해 주는 사람도, 그 과정에서 위로 받게 되는 것이다. “넥타이” 이 노래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해, 죄스런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청춘에게 다가가, “나도 그래”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 3번 트랙 “넥타이” 라이브영상 

  

■ 인생의 싸움

 

4번 트랙 “Vertigo”는 3번 트랙의 애잔한 느낌을 뒤로 하고, 다시 활기찬 사운드를 선보인다. 이 곡에서 “버티고, 버티고, 버텨내라. 참고, 참고, 또 참아내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3번 트랙에서 얘기한 소중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강한 열망이 느껴진다. 4번 트랙이 싸움에 관한 얘기였다면 5번 트랙 “Seventeen”은 싸움에서 승리한 기쁨에 도취된 찬가다. 4번 트랙과 마찬가지로 활기차고 직진적인 사운드가, 17년 간 이어온 밴드 생활에 대한 기쁨을 한껏 표현한다.

 

기나긴 싸움 끝에서 항상 승리에만 도취될 수는 없는 법.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며, 하나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무작정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선 지난 세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6번 트랙 “한살”은 성찰에 관한 노래다. 5번 트랙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사운드가 애잔한 감성을 전달한다. 부드러운 곡 진행으로 계속 이끌어가다가, 노래의 중후반 부분에 닿아서는 “나 조금도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못하고, 나이만 한 살 먹었나보다.”라는 가사가 폭발적인 사운드와 함께 뿜어진다. 가사만 떼어놓고 보면, 체념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가사가 폭발적인 사운드와 결합이 되니,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고 싶은 열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7번 트랙 “왜?”는 자신들이 힘들게 지켜온 길에 대한 성찰이다. 신나는 스카 리듬 속에 숨어있는 긴장감 섞인 사운드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 6번 트랙 “한살” 라이브영상

 

▲ 9번 트랙 “서른둘”

8번 트랙 “4619”는 가사의 내용으로 보아, 밴드 활동을 하며 끌고 다니던 스타렉스의 차번호로 유추된다. 밴드 생활을 하면서 악기들을 싣고 달리던 스타렉스가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모습을 보고 쓴 노래로 보인다. 3번 트랙 “넥타이”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곡 진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사운드는 은근히 밝은 편인데, 가사가 슬프니까 들으면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런 복잡한 감정이야 말로, 그들이 이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9번 트랙 “서른둘”은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로 청자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6번 트랙 “한살”에서 보여줬던 가사와 사운드의 결합으로 생겨나는 역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후렴구 가사에서는 분명 “다 작아져 가네, 꿈도, 즐거움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운드는 오히려 웅장하고 무겁다. 작아지는 자신의 꿈과 즐거움이 싫다며 울부짖는 것 같다. 10번 트랙 “Hater”는 누군가를 향한 격렬한 질투심에 관한 노래다. 가사처럼 사운드도 격렬함으로 가득하다. 11번 트랙 “지난겨울”과 12번 트랙 “그날이오면”은 가사에 있어서 하나의 곡처럼 느껴진다. 11번 트랙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터질 것 같은 열망과 거기에서 오는 분노에 관한 노래고, 12번 트랙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날에 관한 노래다. 그래서 사운드 면에서는 두 곡이 약간 다르다. 11번 트랙은 긴장감 넘치는 록 사운드고, 12번 트랙은 부드러운 어쿠스틱 사운드가 가득한 잔잔한 노래다.

   

   

▲ 정규 2집 “Life Goes On” 수록곡 “No Punk No Life”와 “Let's Skanking” 라이브영상

 

■ 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첫 번째 트랙 “Wake Up”과 마지막 트랙 “그날이오면”에서 드러냈듯이, 그들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부르짖는다. 그날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운 좋게도, 나는 그들의 3집 발매 기념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평 정도의 공연장이 터져버릴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귀환을 열성으로 축하했다. 그들의 힘이 넘치는 사운드와 거기에 더욱 뜨겁게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어, 17년이나 이어온 오랜 행보에도 불구하고, 10년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로 나온 3집 위주로 셋 리스트가 구성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그 노래들을 신나게 따라 부르며 넘치는 열성으로 응답했다. 버닝 햅번 정규 3집 앨범 “She Is Seventeen”은 그들이 17년 동안 걸어온 행보에 대한 탁월한 증명이다. 이 앨범을 듣다 보면, 여기 2번 트랙에 실린 “가장 좋았던 그 때보다 더 멋진 순간들을 만들 수 있어”라는 가사처럼, 그들이 앞으로도 더 멋진 순간들을 만들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트랙리스트

 

1. Wake Up

2. ORS

3. 넥타이

4. Vertigo

5. Seventeen

6. 한살

7. 왜?

8. 4619

9. 서른둘

10. Hater

11. 지난 겨울

12.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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