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명반 에세이 26: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 광기도 때론 그리움이 되고... ]
■ Wish You Were Here
“Wish You Were Here” 앨범의 진가를 깨닫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Shine on You Crazy Diamond” 속에 스며든 짙은 그리움을 이해하는 데에 딱 그 만큼 걸렸다. 고등학생 때,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였다. 핑크 플로이드는 록 음악에 대해 한참 알아가던 그 시절엔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아직 생소한 밴드였다. 이름만 들어볼 게 아니라, 음악을 직접 들어봐야겠다 싶어 처음 구입한 앨범이 “Wish You Were Here”였다. 사실 기대를 많이 했다. 워낙에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극찬하니까, 말로만 듣던 전설이 직접 현실로 다가올 것 같은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감은 철저히 부수어지고 말았다. 음악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내가 록 음악을 들을 때 항상 기대하던 과격함이나 신나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멜로디가 귀에 잘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가사는 왜 몇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도 않는 건지. 첫 번째 트랙을 듣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에이, 안 들어. 안 듣는다고. 음악이 지루한데다가 한 곡이 무슨 13분 32초씩이나 되고 말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이런 음악을 좋다고 듣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 다들 실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좋다고 그러니까 괜히 허세부리고 그러는 거 아냐? 전설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은 기대감은 환멸로 바뀌었다. 첫 트랙도 지루해서 못 넘기는 이런 음반을 어떻게 들으란 거야.
시간이 좀 흘러서, 우연히 TV에서 “The Great Gig In The Sky”에 맞춰 피겨스케이팅 무대를 펼치는 걸 보게 되었다. 내가 1번 트랙만 듣고 치워버린 음반 “Wish You Were Here”에서 들은 음악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부드럽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 위에 서서히 격렬하게 고조되는 여성 보컬. 그와 함께 광기를 뿜어내는 다른 악기들까지. 그래, 록이라면 이래야지. 나는 “The Great Gig In The Sky”가 수록된 앨범인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샀다. “Wish You Were Here”와는 달리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The Great Gig In The Sky” 말고는 딱히 좋은 곡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 비로소 알게 된 진가
어느덧 내 나이 이십대 중반이 되었다. 그 사이에 자금 사정으로 인해, 한참 처박아두기만 하고 듣지도 않았던 핑크 플로이드 앨범들을 팔아버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십대 중반이 되고 나니, 록 음악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예전에는 난해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졌던 음악들도 훨씬 좋게 들리게 되었단 얘기다. 내가 이렇게 되려고 억지로 노력한 것도 아닌데, 시간의 마법인가. 자연스레 내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갑자기 잘 듣지도 않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나,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음악에 열광하게 되었고, 록 외에도 재즈도 이전보다 훨씬 깊게 감상하게 되었다.
특히 도어즈(The Doors)의 음반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앨범들에 관한 얘기들을 듣게 된다. 핑크 플로이드는 지금이야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 밴드로 유명하지만, 초기에는 사이키델릭 록 밴드였다고 한다. 그래서 음악적 색깔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핑크 플로이드 음악과는 영 다르다는 얘기였다. 얼마나 다르기에? 곧바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핑크 플로이드가 67년에 발표한 정규 1집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틀었다.
1번 트랙 “Astronomy Domine”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가 “Wish You Were Here” 앨범과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형성했던 핑크 플로이드 음악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음악이 꽤 요란했다. 거칠게 갈겨대는 기타 연주에, 그 사이로 스쳐가는 건반 악기의 몽롱한 연주. 사이키델릭 록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만의 색깔이 뚜렷하게 살아있는 음악이었다. 확실히 대세에 편승한 음악은 아니었다. 다른 사이키델릭 록을 들어보면, 거친 연주와 몽환적 느낌이 한 데 어지럽게 섞인 느낌인데, 핑크 플로이드는 그렇지 않았다. 거친 연주와 몽환적 느낌이 정확히 둘로 나뉘어, 서로 격렬히 자웅을 겨루는 것 같았다.
■ 시드 배릿
핑크 플로이드 정규 1집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기타리스트 “시드 배릿(Syd Barrett)”이다. 요즘 핑크 플로이드를 대충 아는 사람들에게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명을 대면, 시드 배릿보다는 베이시스트인 “로저 워터스(Roger Waters)”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앨범을 제작할 무렵엔 데이비드 길모어는 밴드에 가입조차 안 되어 있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길모어는 시드 배릿이 핑크 플로이드로 활동하는 게 힘들어져, 그의 대타로 세션을 하던 기타리스트였는데, 시드 배릿이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하며 메인 기타리스트가 된 것이다.
이 앨범을 듣다 보면 시드 배릿이 핑크 플로이드라는 밴드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일단 1번 트랙부터 느껴지는 확연히 다른 음악적 질감부터가 그 영향력을 잘 전달한다. 그 영향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진다. 시드 배릿은 한 곡을 제외한 앨범 전곡에 작사 및 작곡에 참여했고, 심지어 편곡까지 혼자서 한 곡이 많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핑크 플로이드는 시드 배릿의 원맨밴드나 다름없었다. 총 11개의 트랙 중 4번, 5번, 6번 트랙만 다른 멤버들과 같이 만들고, 나머지 여덟 트랙은 시드 배릿이 혼자서 만든 곡들이다. 밴드 내에서 한 명의 영향력만 이렇게 비대칭적으로 크면, 밴드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할 텐데 말이다. 오히려 먼 훗날 그들은, 밴드를 탈퇴한 시드 배릿을 그리워하며, “Wish You Were Here” 앨범을 시드 배릿에게 헌정하기까지 했다.
음악을 듣다 보면 깨닫게 된다. 시드 배릿은 충분히 그리워할만한 존재였다는 것을. 2번 트랙 “Lucifer Sam”의 비장한 분위기. 3번 트랙의 “Matilda Mother”와 4번 트랙 “Flaming”, 8번 트랙 “The Gnome”의 동화 같은 느낌. 9번 트랙 “Chapter 24”와 10번 트랙 “The Scarecrow”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11번 트랙 “Bike”의 어지러우면서도 발랄한 느낌.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다양한 정서가 표출될 수 있다는 점이 경악스럽다. 게다가 작사, 작곡, 편곡 모두 혼자서 맡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경악스럽다. 이런 강렬한 음악적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시드 배릿이었으니,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른 멤버들도 그의 음악적 재능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약간의 불만은 있었을지언정, 이토록 경악할만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한 밴드에 속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러니 “Wish You Were Here” 앨범을 시드 배릿에게 헌정했겠지.
■ Interstellar Overdrive
하지만 핑크 플로이드는 적어도 시드 배릿의 독재가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밴드는 아니었다. 전술했듯 전체 11개 트랙 중 세 트랙은 다른 멤버들이 만든 곡이다. 6번 트랙 “Take Up Thy Stethoscope and Walk”는 왠지 시드 배릿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건 실은 로저 워터스가 만든 곡이다. 비장하게 울려 퍼지는 거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곡인데, 몽환적이고 기묘한 질주감이 일품이다. 5번 트랙 “Pow R. Toc H.”와 7번 트랙 “Interstellar Overdrive”는 가사가 없는 연주곡인데, 이 두 트랙은 멤버 네 명이 같이 만든 곡이다. 특히 7번 트랙 “Interstellar Overdrive”에서는 시드 배릿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탁월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거칠게 달리는 시드 배릿의 기타에 로저 워터스의 베이스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이 둘에게 질세라, “닉 메이슨(Nick Mason)”의 드럼도 실컷 광기를 내뿜으며 돌진한다. 그러다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건반 연주가 서서히 끼어들며,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곡 전체를 몽환적인 방향으로 조율한다. 특히 이 곡은 리처드 라이트의 사운드 메이킹 실력이 이 앨범에 실린 어느 트랙보다도 탁월하게 드러나는 곡이다. 네 명이서 같이 만든 곡이다 보니, 리처드 라이트의 역할이 다른 곡들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당연했을 터. 그럼에도 리처드 라이트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정규앨범인 “The Endless River”는 리처드 라이트에게 헌정된 앨범이다. 이 곡에서 드러나는 시드 배릿과 리처드 라이트의 강한 존재감을 생각하면, 그 공교로움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시드 배릿을 위한 헌정 앨범도 있고, 리처드 라이트를 위한 헌정 앨범도 있다는 게.
시드 배릿이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본 앨범이지만, 모든 멤버들이 같이 참여한 이 곡에서, 다른 멤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마 시드 배릿은 이 곡을 같이 만들면서 이들의 재능을 보고, 자신이 이 밴드를 떠나도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안심하지 않았을까. 이 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롭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별과 별 사이를 날아간다는 뜻을 가진 제목인데, 그에 걸맞게 우주의 역동성과 신비로움을 한 데 잘 담았다.
■ Shine on You Crazy Diamond
시드 배릿은 조현병이 심해지면서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했다. 사실 1집을 듣다 보면, 그의 조현병에서 오는 정서가 잘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음악만 들어도 조현병의 전조증상이 느껴지는 것 같다. 조현병을 앓았으니 만큼, 그의 사생활은 그가 만든 음악 그 이상으로 훨씬 광기에 가득 찼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와 함께하는 멤버들도 그가 앓고 있던 조현병 때문에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멤버들은 그를 미워하기보다,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의 조현병을 그저 병으로만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비유했다. “Wish You Were Here” 앨범의 첫 번째와 마지막 다섯 번째 트랙의 제목인 “Shine on You Crazy Diamond”는 이런 배경을 두고 지어진 제목이다. 시드(Syd)의 철자를 노래 제목에 대입했던 것이다. 그의 광기가 한 때는 멤버들을 힘들게 만드는 고역이었을지라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선 미칠 듯이 빛나는 그리움이 되었나 보다. “Crazy Diamond”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을 그리워할 때, 처음에는 그의 친절했던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같이 다투던 기억마저도 선명해진다. 그러면서 차라리 다시 다투게 되어도 좋으니, 곁에만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의 광기는 멤버들을 힘들게 만들고, 그를 밴드로부터 떠나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런 광기가 시드 배릿의 경악할만한 재능의 원천이 되기도 했고, 그런 경악할만한 재능이 핑크 플로이드를 10년, 20년 넘게 존속하게 만든 영향력이었다. 시드 배릿에게 헌정한 “Wish You Were Here” 앨범이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앨범들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광기가 있었기에, 그는 더욱 독보적인 빛을 내는 “Crazy Diamond”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독보적인 시드 배릿의 빛은 남은 멤버들에게 짙은 그리움을 남겼다. 심지어 시드 배릿과 짧은 시간만 함께했던 데이비드 길모어까지.
“Shine on You Crazy Diamond(Parts 1-5)”의 지독하게 느리고 끈적끈적한 곡 진행은, 시드 배릿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만큼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이 가진 시드 배릿에 대한 그리움이 지독하고 끈적끈적했던 것이다. 그런 그리움을 음악으로 표현하기엔 오히려 하루 종일 연주해도 모자라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이해한다. 역설적으로 내가 누군가 보기에 허세 부리려고 핑크 플로이드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이 된 셈이다. 나의 협소한 음악적 식견이 쓸데없는 삐딱한 생각을 키웠다는 걸 알고 부끄러워졌다. 이젠 진심으로 그들이 좋아서 그들의 음반을 모으고 있다.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듣고 나서야, “Wish You Were Here” 앨범에 깃든 멤버들의 진심이 보였다. 난 이제 이 앨범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오히려 하루에 몇 번을 듣고, 다음날 또 들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친해지는데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이었다.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앨범을 들은 덕분이다. 이 앨범은 나에게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세계로 더욱 깊게 들어가게 만든 관문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혹시 자신이 지닌 광기에 번민하고 있다면,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앨범과 “Wish You Were Here” 앨범을 번갈아 청취해보길 권한다. 당신의 광기가 누군가에겐 지독한 그리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르니.
트랙리스트
1. Astronomy Domine
2. Lucifer Sam
3. Matilda Mother
4. Flaming
5. Pow R. Toc H.
6. Take Up Thy Stethoscope and Walk
7. Interstellar Overdrive
8. The Gnome
9. Chapter 24
10. The Scarecrow
11. Bike
같이 보면 좋은 기사
▲ 락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70년대 ROCK 명반 BEST 5
▲ 락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60년대 ROCK 명반 BEST 5
'인생명반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치스(The Kitsches) - The Kitsches (4) | 2018.11.17 |
---|---|
허클베리핀(Huckleberry Finn) - 18일의 수요일 (0) | 2018.11.17 |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Drinking Boys And Girls Choir) - Keep Drinking (0) | 2018.11.16 |
키시단(氣志團, Kishidan) - BOY'S COLOR (0) | 2018.11.16 |
루디건즈(Rudy Guns) - MW-38423 (0) | 2018.11.16 |